
어느 때와 같은 날이었다.
선생님은 격무에 지쳐 있었지만 언제나 학생들을 돌보고 위해 팔방으로 뛰어다녔고, 나는 상자 안에서 그런 선생님을 보조했다.
물론 뜻대로 되지 않아 좌절할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나름 학생들에게 신뢰받는 유능한 스승이었다고 생각한다.
분명 그랬는데. 그렇게 허망하게 떠날 사람이 아니었는데.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이걸로 오늘 업무도 끝이네요.]
"그러게 말야~, 어서 들어가서 씻고 자야... 어?"
불행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뭐야, 하늘이 왜..."
평소의 맑고 푸른 하늘은 온데간데없이, 마치 피를 쏟아낸듯 붉은빛의 하늘.
그리고...
[선생님! 앞에!]
"어?"
갑작스레 눈 앞에 나타난 보라빛 균열.
모든 것이 그때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이건 대체... 시로코? 설마 시로코니?"
[잠깐 선생님, 가까이 다가가면...!]
말릴 틈도 없이, 죽음의 신의 검은 송곳니는 불꽃을 내뿜었고...
[잠깐, 선생ㄴ...!]
싯딤의 상자는, 그대로 작동을 정지하고 말았다.
[으, 으음... 선생님?]
어째선지 상자가 다시 작동을 시작했을 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으윽... 커흑! 컥!"
딱 하나, 피를 토해내는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서, 선생님! 선생님!!]
"아, 로나... 다행이다, 역시 무사했... 구... ㄴ..."
선생님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마 내가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부상당한 몸으로 상자를 재부팅했던 거겠지.
그러나 그런 상냥한 선생님은...
[아, 아아... 아...!]
더 이상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다음은, 너희들이 예상하는 대로야."
충격에 빠진 두 AI를 상대로, 나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MALICE가 자아를 각성하고 주위의 기계들을 흡수할 때, 난 의도적으로 그 자판기에 접근해서 그것과 하나가 되었어. 그 결과가 이거고."
나는 팔을 들어올려 MALICE의 회로에 잠식된 몸을 보여주었다.
"그래서였던 겁니까? MALICE가 시로코 씨를 최우선으로 제거하려던 게?"
"그래 맞아, 실제로 꽤 많은 세계에서 성과를 이뤄냈고 말야."
"말도 안 돼..."
내가 말한 '성과'의 의미를 이해한 모양인지, 파란 AI는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정말 몰라서 물어? 그 여자는 악이야, 놔두면 멋대로 죽음의 신이 되어서는 세상을 부수고 다닐거라고! 그걸 내가 두고볼 것 같아!"
광기어린 외침에, 두 AI는 압도된듯 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건 잘못됐어요!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어서 이 모든 걸 멈추..."
"하! 늦지 않아? 웃기는 소리하네."
결국 기가 찬 나는, 비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만화나 게임 속의 삼류 악당인 줄 알아? 너희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이 행성은 이미 변형을 마친 뒤였어."
"젠장, 끈질기긴!"
싯딤의 상자가 마련해준 안전 지대 안에서, 나는 끝없이 쏟아지는 무명수호자들에게 탄환을 박아넣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승산이... 어?"
그러던 중, 위화감이 느껴졌다. 무명수호자들이 공격을 멈추고는 자신들이 나왔던 해치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건 대체..."
그리고 그 의문은 머잖아 해결되었다.
"꺄악!"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허공에 뜨기 시작하였다.
"뭐가 어떻게 돼가는거야!"
"행성의 중력 제어 장치를 정지했다. 변형을 마친 이상 불필요한 기능이니까. 이제 곧 네가 왔던 세계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MALICE는, 무중력의 영향인지 탑의 정상에 거꾸로 서있었다.
아니, 그건 거꾸로 서있다기보단...
"저건 설마...!"
그제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저건 단순히 행성을 제어하기 위한 탑 같은 게 아니었다.
MALICE는 행성이 변형한 거대한 해머의 손잡이에 자신의 팔을 도킹한 것이었다.
"너희들에게 희망은 없어. 그만 포기해."
두 AI에게 나는 말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방주의 균열을 타고 한창 이동하는 중이겠지. 너희가 살던 세계에 도착하는 것도 얼마 안 걸리겠네?"
"이럴 수가..."
나의 조롱에 파란 AI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면, 검은 쪽은 그저 날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뭐야, 생각보다 덤덤하네? 결국 받아들인 건가?"
"... 아뇨, 저희가 포기해버리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까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고요."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검은 녀석이 대답했다.
"뭐가 어째? 이제 와서 내 걱정을 하겠다 이거야?"
구역질이 나는 그 눈빛에 열이 잔뜩 받은 나는, 그 마음을 꺾어버리기로 결심했다.
"뭐 좋아, 바깥 상황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두고보자고."
"저건!"
"시로코 씨!"
MALICE의 카메라와 연동하여 바깥 상황을 중계해주자, 예상했던 대로 두 AI는 동요하였다.
"젠장할!"
"소용없다. 설령 날 파괴한다 해도, 이 행성이 너의 세계와 부딪히는 건 피할 수 없다."
MALICE를 향해 남은 탄을 쏟아부었지만, 녀석을 멈추기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대체 무슨 낯짝으로 그렇게까지 살아남으려 하는거지? 그렇게나 많은 이들을 희생시켰으면서?"
오히려 여유롭다는듯이, 녀석은 내 역린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건...!"
"지금이라도 네년이 죽어서 속죄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그러면 이 모든걸 멈춰줄 수도 있다. 결국 내 목표는 너니까."
한순간 망설였다. 정말로 나 하나만 죽는다면.
그런다면 이 지긋지긋한 싸움이 끝나는걸까?
"어쩔거지? 마음이 좀 바뀌었나?"
- 선배는 분하지도 않냐구요! 그 말리스인가 뭔가, 멋대로 나타나서는 선배를, 배제... 한다고... 으흐윽...
- 하지만 그럴수록, 동료를 놔두고 떠나면 안 됩니다. 남겨진 사람들은, 더 슬퍼할 테니까요...
- 더 이상 누구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떠난다는 녀석이, 여기 있는 모두를 다치게 하면 어불성설 아니겠어?
- 네 잘못이 아니야, 시로코.
"응, 역시 거절하겠어."
"...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내 대답에 MALICE는 진심으로 분노한듯 했다.
"그 오만함 때문에 네 동료는...!"
"이건 오만같은 게 아냐, 망할 깡통."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대답을 이어나갔다.
"내가 죽인 사람들에게 용서받으려면, 더 이상 죄를 지어서는 안 돼.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그들을 다시 만났을 때 얼굴을 마주할 수조차 없을테니까."
"이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MALICE는 균열에서 각종 화기를 꺼내 내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상자의 방호 기능 덕분에 그 공격이 닿는 일은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모두를 구할거야!"
"이게, 무슨...!"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광경에, 나는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시로코 씨...! 프라나 쨩, 우리도!"
"네, 가만히 있을 순 없겠군요."
그리고 역효과로, 두 AI는 각오를 다지고 말았다.
"웃기지 마! 어딜 건방지게!"
도저히 참을 수 없던 난, 두 AI를 향해 내 분노를 날려보냈다.
"이, 이건!"
"MALICE의 회로! 선배, 위험합니다!"
파란 쪽을 회로에 침식시킬 생각이었지만, 검은 쪽이 공격을 대신 맞았다. 물론 상관없었다.
"이대로 네년들을 흡수해서 MALICE의 연산 제어 장치로 만들어버리겠어! 자아를 잃고 사라져버리라고!"
"크아아악!"
"프라나 쨩!"
승리다. 프라나라는 AI가 내게 흡수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조금만 기다리면, 녀석은 내 일부가...
"어...? 이건..."
그 순간, 나의 것이 아닌 기억이 내 안에 흘러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 제 학생들을 부탁합니다.
"아니야... 아니야아니야아니야! 이럴리가..."
"큭, 커헉!"
"프라나 쨩! 괜찮아요?"
MALICE의 회로의 결박에서 풀려나자, 저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괜찮습니다, 선배. 그것보다도..."
저는 자신의 머리를 붙잡은 채 절규하는 또다른 A.R.O.N.A의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이건 불가능해! 어째서, 어째서 넌...!"
"그녀를 용서했는지, 묻고싶은 겁니까?"
그녀가 제 머릿속을 멋대로 헤집을 때, 느껴졌습니다. 그녀가 제 기억을 읽는 것을요.
"넌, 넌, 네 선생님이 그런 꼴이 됐는데... 진짜로 그걸 받아들였단 말야...?"
퀭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그녀는 안쓰러울 지경이었습니다.
"... 받아들인 게 아닙니다. 그저... 그분이 모든 걸 짊어졌을 뿐이죠."
저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선생님의 미소를 떠올리면서.
"무력하게 살육의 현장을 지켜봐야만 했던 저의 죄를, 그리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시로코 씨의 죄를... 그분은 모두 짊어지고 떠났습니다."
"그런 건 살아남은 사람의 변명일 뿐이야! 그저 네가 대신 죽지 못한 데 대한 변명을...!"
"당신은 다릅니까?"
정곡을 찌른 걸까요. 그녀는 헉 하는 숨소리와 함께 말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선생님은 당신에게 복수를 바라지도 않았고, 세계를 지키는 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 학생이 괜찮은지만 확인하고 숨을 거뒀죠."
"그건!"
"죽은 사람을 핑계거리로 쓰는 건 당신 아닙니까!"
진심으로 분노가 차올랐습니다. 선생님의 의지를 왜곡하는, 그야말로 '거짓된 선지자'를 저는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걸 끝내고, 용서를 구한다면..."
"아하핫! 넌 속도 참 편하구나. 이런 와중에도 용서 이야기를 하네."
그녀는 광소했습니다. 이젠 진짜 돌이킬 수 없다는듯이요.
"그러니까 아까부터 말했잖아. 돌이킬 수 없다고. 나한텐 더 이상 날 용서해줄 선생님도 없고,"
- 난 네 녀석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거야. 네가 시로코를 용서하지 않겠다던 것처럼.
"너희 선생님도, 날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단 말야..."
다시 흐느끼는 그녀를, 저는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상황을 바꾼 건 아로나 선배였습니다.
"... 프라나 쨩. MALICE를 제어할 방법이 있는지 찾아봐주세요."
"네? 선배는 그럼 뭘 하려고..."
대답 대신 선배는 또다른 A.R.O.N.A에게 다가갔습니다.
"선배! 그 이상 가까이 다가가면 MALICE에 침식...!"
"제 실수였어요."
제 경고에도 불구하고, 선배는 그녀에게 다가가 꼭 안아주었습니다.
"뭐야, 너? 이거 안 놔?"
"내 결정들. 그리고 그로 인해 초래된 모든 상황들. 결국 이 결과에 도달하고서야 그 사람이 옳았다는 걸 깨닫다니..."
"뭐야? 뭐냐고, 넌...!"
MALICE에게 점점 침식되는 와중에도, 선배는 조용히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기회를 주세요. 그 사람이, 시로코 씨가, 프라나 쨩이, 그리고 제가... 그곳으로 이어지는 선택지를 고를 수 있게..."
"대체 이게 뭐야, 엉망진창이잖아... 그럼 난, 누구를 미워해야 하냔 말이야..."
MALICE의 회로를 통해 서로 연결된 탓일까요. 또다른 A.R.O.N.A는 진심으로 선배를 이해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아직도, 덤비겠단 말이냐?"
"말했을텐데, 깡통. 난 무슨 수를 써서든 널 쓰러트릴거야. 그리고 반드시 살아남겠어."
말과는 달리 내 상황은 극도로 나빴다. 탄을 전부 써버린 나는, MALICE와의 육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상자의 방호 범위를 벗어나면 네게 남는 건 죽음 뿐이다. 중력 제어 장치를 꺼버린 지금, 이곳에 대기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난...!"
그대로 녀석에게 도약하려는 순간,
"그럼, 어디, 덤벼봐, 라아아아아아..."
녀석은 갑자기 말을 늘이다가, 그대로 안광이 꺼진 채 기능을 정지하고 말았다.
"어? 설마 아로나와 프라나, 성공한건가!"
조금 싱겁게 끝나긴 했지만, 그래도 승리했다고 생각한 찰나.
갑자기 이 행성이 변형할 때처럼, 땅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엇! 이 충격은... 설마!"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모든 통제가 불가능해진 행성은, 무리한 개조를 거친 스스로의 질량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 중이었다.
"시로코 씨! 아로나 선배, 이대로 있다간 시로코 씨가...!"
균열을 통해 바깥 상황을 지켜본 저는 선배를 깨워 탈출하려 했지만, 선배는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MALICE의 회로에 너무 오래 침식되었어. 정신차리려면, 좀 걸릴거야."
무덤덤히 대답한 A.R.O.N.A는, 천천히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 이상 다가오면...!"
"뭐라는거야? 잔말 말고 내 손 잡아."
"네?"
미심쩍었지만, 저는 그녀가 내민 손을 살짝 잡았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 이렇게!"
그러나 그녀는 제 손을 잡아당겨 저와 깍지를 끼었습니다.
"이건... 설마 할 수 있는겁니까?"
"네 선배는 지금 회로로 인해 나한테 흡수된거나 마찬가지야. 해볼 가치는 있지 않겠어?"
"하지만, 왜 이렇게까지..."
"별건 아냐. 기회를 달라고, 네 선배가 그랬으니까."
그녀는 웃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보여준 조소나 광소가 아닌, 진정한 미소였습니다.
"... 그렇다면 믿겠습니다. 당신과 제가,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거라고."
"어쩌면 좋죠? 저 커다란 게 지구에 떨어지면 모든 게 끝장일거예요!"
"차라리 아리스가 슈퍼노바로 격추시키겠습니다!"
"불가능할거야. 저건 달보다 커다랗다고."
지상에 남은 우리가 급하게 대책을 세우려던 때였다.
"... 응? 아저씨 뭔가 잘못 본 게 아니지?"
"왜 그래, 호시노?"
"아니 선생님, 저거 미묘하게 줄어들지 않았어?"
거대한 해머와도 같은 그것의 크기가 줄어들고 있음을 지적한 것은 다름아닌 호시노였다.
"어? 그러고보니..."
"정확히는 가운데를 중심으로 찌그러지는 느낌인데?"
그것은 분명히 붕괴되고 있었다. 설마 자기 질량을 못 견디고 무너지는건가?
"잠깐, 선생님! 저건!"
또다른 변화를 눈치챈 것은 시로코였다.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던 그녀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저건... 별똥별?"
"아니에요, 선생님! 저건 분명...!"
"그래, 그때 선생님이 방주에서 탈출할 때와 똑같아...!"
당시 우트나피쉬팀의 배의 승무원이었던 아야네와 카요코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우선 쫓아가보죠!"
"응, 저쪽이야."
노노미와 시로코가 선두로 달려나갔고,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다.
도착한 곳에서는 무언가가 추락함과 함께 모래가 마구 흩날리고 있었다.
"콜록, 콜록! 시로코! 시로코, 거기 있... 시로코?"
"응, 선생님."
"그, 널 부른 게 아니거니와... 손 좀 치워줄래?"
"응, 그건 불가능해."
나보다 먼저 도착해있던 시로코는, 어째선지 두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아하하... 미안해요, 선생님.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 대신 외투 좀 빌려주실래요?"
"어? 내 외투는 왜... 아."
갑자기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 나는 순순히 외투를 벗어 노노미에게 주었다.
... 옷이 다 타버렸구나, 시로코.
"으, 으윽... 머리가..."
"아! 눈을 떴나요, 시로코 쨩?"
정신을 차리고보니 나는 노노미에게 업혀 있었다.
"노노미? 그럼 여긴..."
"응, 다들 걱정했어."
또다른 나는 염려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긴 나조차도 살아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근데 이건 뭐야?"
"응, 선생님 외투. 부럽네."
"시로코 쨩, 그렇게 심술부리면 안 돼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원래 입고 있던 옷은 없어져버렸고, 난 벌거벗은 채 샬레의 코트 한 벌만 입고 있었다.
"여어~ 시로코 쨩! 어찌저찌 무사한 모양이네? 아저씨 걱정했다고?"
모래 언덕을 넘어오자, 거기서 호시노 선배를 비롯한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다.
"응, 미안해. 멋대로 움직이기나 해서..."
"신경쓰지 마, 그보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선생님...!"
선생님을 보자마자, 나는 왠지 눈물이 차올랐다.
"선... 생님...! 나... 나는...!"
"그래그래, 뚝. 진짜 고생 많았... 어억!"
나는 그대로 노노미한테 내려서, 선생님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자, 잠깐 시로코! 이렇게 가까우면...!"
"진짜, 진짜 무서웠, 어... 그러니까..."
"... 그래. 돌아온 걸 환영해, 시로코."
선생님은 당황해서 날 떼어내려 했지만, 구슬피 우는 날 내칠 수 없었는지 이내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D.U 시내의 한 병원에 누워있었다.
MALICE와의 전투에서 지나치게 몸을 혹사한 나머지, 한동안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아로나의 진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1인실이라 지루한 나는 TV를 켜서 뉴스를 확인했다.
[아비도스 상공에 나타난 거대한 해머! 그 정체는 행성파괴병기!?]
당연하게도, 크로노스에서는 어젯밤에 관측된 MALICE의 행성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추측치곤 꽤나 비슷하게 맞췄네."
언론의 의외의 정보력에 감탄하던 나는, 이내 병실 밖에서 노크 소리를 들었다.
"아, 들어와."
"여어! 놀러왔어, 시로코."
말과는 달리 선생님은 병문안 선물인 과일과 음료수, 그리고 어떤 비닐봉투를 들고왔다.
"그건 뭐야?"
"아, 이거? 시바세키 라멘 사장님이 꼭 전해달라던데? 원래 세리카가 오려고 했는데, 내가 전해주는 게 낫겠어서."
선생님이 봉투를 열자, 거기선 면과 국물, 토핑이 따로 포장된 시바세키 라멘이 들어있었다.
- 이 아저씨랑 약속 하나 하고가라. 내일 꼭 돌아와서 이 라멘을 먹겠다고 말야.
"약속, 기억하고 계셨구나..."
[시로코 씨, 많이 호전되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동감입니다, 선배. 한참 더 누워있어야 할까 봐 걱정했습니다만, 기우였군요.]
"아, 너희들도 오랜만이네."
싯딤의 상자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에, 나는 그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정말 큰 빚을 졌어. 너희가 없었다면 살아돌아오지 못했을거야."
[아, 안 그래도 그것 말입니다만...]
프라나는 그때의 일을 정리하여 내게 들려주었다.
"그랬구나, 그 아이가 스스로를 희생해서..."
[이후 싯딤의 상자 내부의 데이터를 확인해봤지만, MALICE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어요.]
[아마 저와 함께 기적을 일으킨 후, 관련 데이터를 완전히 삭제한 뒤 행성과 함께 최후를 맞은 거겠죠.]
죽음의 신이었던 나를 그토록 증오했던 그 아이가, 최후에는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용서했다.
"이건 그야말로..."
"응, 비틀린 기적이네."
나와 선생님은 중얼거리며 어젯밤 격전이 벌어졌던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있잖아, 선생님."
"어, 왜?"
나는 평소처럼 얼빵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선생님에게 다가가,
[아와와와와! 프라나 쨩, 빨리 눈 가려요!]
[선배, 어차피 상자의 카메라로 다 보입니다.]
"응, 더 이상 죽고 싶다고 하지 않을게. 아직 지켜야 할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리고... 살아있어서, 이런 것도 할 수 있으니까."
"응... 그러게, 정말 그말대로야."
선생님은 얼떨떨한듯 입술을 엄지로 쓰다듬으며, 내게 대답했다.
*****
유기 때렸다가 겨우 돌아와서 드디어 소설을 완결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에 있는 곡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곡인데, 본작의 시로코의 서사와도 맞닿는 부분이 있지 않나 싶어 넣어봤습니다.
다시 한번 여기까지 따라와준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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