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트리니티의 어느 순백의 저택, 테라스에서는 찻잔을 놓는 소리만이 고요히 울렸다.
"오랜만이네요, 하나코 씨. 아니, 이젠 우라와 부인이라고 부르는 게 적절하려나요?"
"편한대로 부르면 된답니다? 우리 사이에, 허물이랄 것도 없으니까요."
"허물이라... 네, 확실히 그렇네요."
테이블에 마주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주위를 지키고 있던 수행원들도 침을 꿀꺽 삼킬 정도였다.
"그래서, 절 이곳까지 부른 이유가 뭘까요? 단순히 친교를 다지기 위해서...는 아니겠죠?"
"후훗, 보기보다 급한 성격이네요. 별건 아니고..."
하나코의 건너편에 앉은 여성은, 그녀에게 편지 봉투를 건넸다. 날개와 찻잔의 문양이 찍힌 밀랍으로 봉해져 있어, 그 출처가 어디인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이건... 티파티에서 보낸건가요?"
"네, 티파티 주최로 교류회가 열릴 예정이거든요. 귀여운 후배들이 훌륭한 선배를 보고 싶어해서, 이렇게 제가 대신 초대장을 드렸답니다?"
"교류회라..."
일단 초대장을 받아 외투 주머니에 넣은 하나코는, 맞은편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온화하지만 빨려드는 매력이 있는 호박색 눈동자, 말투와 몸짓에서 느껴지는 묘한 카리스마.
티파티의 전 호스트이자 필리우스 분파에서 '철의 여인'으로 불린, 아지타니 히후미는 그런 여자였다.
"그럼 초대에 응하시는걸로 알고... 자세한 일정은 추후에 알려드리도록 하죠."
"네, 감사합니다. 언제나 신세를 지네요, 히후미."
"이 정도는, 친구로서 당연한 일이니까요."
하나코에게 싱긋 웃으며 윙크한 히후미는, 곧 주위의 수행원들을 불렀다.
"여러분들은 그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티파티에서의 용건도 끝났고, 지금부터는 좀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예정이라서요."
"아, 네! 그럼..."
히후미는 수행원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사람 위에서 사람을 부리는 자로서의 예의이리라.
"히후미 님, 엄청 멋있어! 졸업하셨어도 카리스마가 그대로라니까!"
"나기사 님도 멋있긴 하지만, 철의 여인을 곁에서 모실 수 있다니... 내가 그래서 필리우스 분파에 남은 거라고!"
"다, 다들 조용히 해! 히후미 님이 듣고 계셔!"
자기들끼리 담소를 나누며 수행원들이 나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히후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우우, 너무 긴장해서 몸에 힘이 안 들어가요오..."
아니, 정확히는 테이블에 엎어졌다.
"후후후... 믿고 따라주는 후배들이 저렇게 많다니, 부러운데요?"
"아하하,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역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면 긴장이 된달까, 아무튼 쉽지 않네요."
아까까지의 팽팽한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이, 두 사람은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선생님이랑 딸을 못 부른 건 미안해요, 하나코 쨩.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았어서..."
"뭘요, 어쩔 수 없었잖아요? 마침 그이도 트리니티에서 만날 사람이 있댔고... 아, 개구쟁이 딸을 그이랑 둔 건 좀 걱정되려나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근황을 묻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꽤나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탓이었다.
"선생님은, 여전히 바쁘시군요... 졸업생들이 샬레의 업무를 어느 정도 분담하는걸로 아는데, 그래도요?"
"덕분에 주말이 확보돼서 좋다고 그이는 말하지만... 아무래도 아내된 입장에선 무리하지 않나 걱정이죠. 옛날엔 그 일을 혼자서 다 했다니..."
"선생님은, 예나 지금이나 책임감이 강하시니까요."
책임감, 확실히 그랬다. 하나코가 그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도, 그를 신뢰할 수 있어서였으니까.
"그러고보니까 히후미 쨩, 요즘 아즈사 쨩은 어떻게 지내나요? 역시 D.U에서 지내면 소식을 접하기가 어려워서..."
"아즈사 쨩이라면, 아마 여전히 이곳저곳 여행 중일거예요. 저한테 한 달에 한 번씩 엽서를 보내거든요. 한 번 볼래요?"
"어머, 그럼 사양 않고..."
급히 뛰어가는 히후미를, 하나코가 뒤따랐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히후미의 침실이었다.
"분명 여기 어디에 놔뒀는데..."
"어... 여전히 모모프렌즈, 좋아하는군요?"
침실에 따라들어온 하나코는, 살벌한 인테리어에 하마터면 다리가 풀릴 뻔했다.
덕질의 완성은 부동산이라고, 하나코는 남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말대로, 히후미의 방은 그것을 완성한 경지였다.
으리으리한 침실 곳곳을 채운 모모프렌즈 인형들과 전시장에 진열된 페로로 피규어들, 그리고 한쪽 벽에 걸린 페로로 태피스트리들까지.
히후미는 아무래도, 졸업 후 모모프렌즈의 팬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사는듯했다.
"아, 찾았다! 같이 읽어볼래요, 하나코 쨩?"
"흐음... 기대되는데요?"
조그마한 나무 케이스 안에 차곡차곡 쌓아둔 엽서들에는, 아즈사의 자유로운 여정이 기록되어 있었다. 바닷가 마을의 모습을 찍은 사진과 간단한 근황 보고, 그리고 안부를 묻는 내용이 엽서의 주 내용이었다.
"아즈사 쨩... 정말 어른이 되어버렸네요."
"그러니까요. 조금은, 부럽달까요?"
두 사람은 마치 훌쩍 커버린 딸을 보는 것처럼,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 죄송해요! 제가 부른건데 괜히 울적한 이야기를 한 것 같네요."
"괜찮아요, 아즈사 쨩은 저도 좋아하니까요. 그것보다도..."
하나코는 방에 걸려있던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4시, 저녁 준비를 해야할 시간이었다.
"아쉽지만 이만 돌아가야할 시간이네요. 슬슬 그이한테 연락해야..."
"아, 벌써요... 아, 그럼!"
히후미는 좌절한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좋은 생각이 난듯 손가락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도 딸도 트리니티에 있댔죠? 같이 저녁 식사라도 하고 가는거 어떤가요?"
"어머, 저녁을요? 하지만 갑자기 식사를 같이하는 것도..."
"그런건 전혀 상관없으니까요! 자자!"
"아... 후훗, 그렇게까지 얘기한다면,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죠?"
하나코는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거절하려 했지만, 히후미의 간절한 눈빛에 못 이겨 결국 받아들이기로 했다.
"환영합니다, 선생님. 키보토스의 퍼스트 패밀리를 초청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안녕, 히후미. 그렇게 말하니까 꼭 나기사 같은데?"
"... 에헤헤, 꽤 비슷했나요?"
초대에 응한 선생은, 딸의 손을 잡고 히후미의 저택에 입장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기다린 것은...
"우와아... 이거, 진짜 다 먹어도 돼?"
"고기가 엄청 커!"
노릇하게 익은 두툼한 스테이크와 각종 곁들임 채소, 그리고 핏빛보다 진한 고급 와인들이 놓인 식탁이었다.
"특별한 손님이니만큼 신경을 써달라고 부탁했어요. 부디 입맛에 맞으시면 좋겠네요."
"괜한 걱정 아니야? 원래 고기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난 엄마 옆에 앉아야지!"
"후훗, 그럼 식기 전에 어서 먹을까요?"
먼저 자리에 앉아있던 하나코 옆에 소녀와 선생이 앉은 후, 히후미는 그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 어서들 먹죠! 트리니티의 소고기는 상등품이니까, 식고나서 먹으면 손해라구요?"
"잘 먹겠습니다~!"
소녀의 명랑한 목소리와 함께,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으~음, 왜 안 잘라지지..."
소녀는 지금 일생일대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눈앞에 맛있는 고기가 있는데, 어째선지 썰리지 않는 것이다.
"끄응~, 우으, 안 잘려..."
"아, 그건..."
"우리 딸, 엄마가 도와줄까요?"
소녀를 도와주기 위해 히후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한발 먼저 하나코가 소녀의 양손을 잡고 스테이크 써는 법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자, 이렇게 누른다는 느낌이 아니라 당긴다는 느낌으로..."
"우와, 잘린다! 신기해!"
무언가를 배워 진심으로 기뻐하는 아이와, 이를 보며 행복해하는 어머니. 본 적 없던 친구의 모습에, 히후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하나코 쨩..."
"저런 모습은, 꽤 낯설지?"
"어라? 어, 으에에! 선생님!?"
상념에 잠겨있던 탓일까, 히후미는 바로 뒤에 선생이 와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먼저 식사를 마친 선생은, 와인잔을 들고 아내와 딸을 지켜보고 있었다.
"친구인 네가 더 잘 알겠지만, 아이가 생기고 나서 하나코는 많이 바뀌었거든. 자기보다 아이를 먼저 생각하고,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노력하고 있어."
"확실히, 아이에게 애정을 쏟는다는 게 느껴져서... 뭐랄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소녀가 자신이 썬 고기를 자랑하며 하나코에게 먹여주는 모습을 보면서, 히후미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좋은 아내를 두었네요, 선생님."
"그럼! 예전엔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을지 꽤 걱정했지만... 결국은 기우였던거지, 내가 만난 여자 중에 가장 현명한 아이였으니까."
선생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하나코를 다시 바라봤다. 예전과는 달리 진실된 미소를 띄고 있는 그 얼굴은, 역시 무엇보다 아름답다고 그는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꽤 늦은 시간, 선생 가족은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다만 선생이 와인을 마셨기 때문에, 대리운전을 부르려고 했으나...
"그... 정말 괜찮겠니? 야밤에 운전은..."
"걱정 마세요! 히후미 님의 부탁이니까요! D.U까지 모셔다드리면 되죠?"
낮에 왔던 필리우스 분파의 수행원 중 하나가 히후미의 연락을 받고, 선생의 운전기사를 자처하였다.
"아하하... 후배들의 팬심이 대단하네요, 히후미 쨩?"
"아우우... 그, 그럼 부탁드려요, 후배님."
"우후후... 히후미 님의 부탁이라면 키보토스 일주도 할 수 있습니다!"
와인의 취기 때문에 낮과는 달리 격식을 차리지 않은 히후미였지만, 그런 모습도 귀엽다고 생각한 수행원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럼 부탁할게, 차 키는 여기 있어."
"옷! 나이스 캐치!"
차 키를 받아든 수행원은, 곧바로 시동을 걸어 출발 준비를 하였다.
"그럼 어서들 타시죠. 꼬마 아가씨는 이쪽으로..."
"고맙습니다~! 언니, 진짜 착하다!"
"엣! 뭐, 뭐~ 이 정도야..."
아이의 순수한 칭찬에 조금 부끄러워진 수행원은, 곧바로 운전석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그럼 히후미, 나중에 또 올게!"
"교류회 때 봐요, 히후미 쨩!"
"이모, 빠빠이!"
"다들 나중에 봐요~!"
손흔들며 인사한 후, 선생의 가족은 차를 타고 저택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하나코 쨩... 좋은 가족이 생겨서 다행이에요."
선생의 차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며, 히후미는 혼잣말을 했다. 그러던 중, 그녀의 핸드폰이 조용히 울렸다.
[모모톡!]
"어? 이건... 아즈사 쨩?"
모모톡에는 어느 바닷가 마을의 사진과 함께, 간단한 문자메시지가 적혀있었다.
[이번에 찍은 사진이야. 더 많은 사진은 엽서로 보냈으니까, 그걸 확인해주면 좋겠어.]
"아즈사 쨩, 한결같네요... 아, 그렇지! 이번 교류회에 아즈사 쨩도 부를까요? 분명 하나코 쨩도 기뻐할거예요!"
히후미는 주먹진 오른손을 왼손바닥에 통 두드렸다. 스스로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고 있을 그때,
"네! 저희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기사 님께도 미리 전달해둘까요?"
"우, 우와아! 당신들,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정원의 수풀에서 불쑥, 사람이 튀어나와 맞장구를 쳤다. 틀림없이 낮에 왔던 수행원들이었다.
"히후미 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 그것이 우리 히후미 님 팬클ㄹ... 수행원의 역할이니까요!"
"그렇게까진 안 해도 되거든요!? 그것보다 이거 범죄라구요~!"
히후미는 마구 바둥대며, 수풀에 숨어있던 두 사람을 저택 밖으로 쫓아냈다.
꽤나 요란한 소리 때문에, 저택의 하인들 모두가 듣고 말았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
이번 편에선 히후미를 다뤄봤습니다. 나기사를 롤모델로 삼아 닮으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본질은 평범한 소녀라는 점이 재밌지 않나요.
티파티 수행원들이 뭔가 이상한 것 같다면 정답입니다. 아마 샬레와 교류하면서 폐쇄적인 분위기가 많이 희석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에 이렇게 묘사해봤어요.
본 내용에서 언급된 교류회는 좀 나중에 다룰것 같습니다. 다음화엔 모녀간의 일상에 더 집중하려구요.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소설 보기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