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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살인(20)

운영자 2012.02.21 15:21:37
조회 270 추천 0 댓글 2

  변호사가 속이 타는 순간은 결정적인 증인이 법정에 나오지 않을 때다. 법원은 소환장 한 장 보내는 것으로 끝이다. 구인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그건 죽은 법규정이다. 20년 변호사생활에서 변호사측 증인이 실제로 끌려오는 걸 본 적이 없다. 검사와 변호사 양자가 대등해야 게임이 되는데 한쪽은 힘이 없다. 법의 여신이 든 저울은 조각상에서만 수평을 유지하고 있었다. 변론주의도 법관을 면피시켜주기 위한 제도였다. 증인이 출석하지 못해 유죄가 되도 그건 당사자 책임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변호사가 정보와 증거를 합법적으로 수집하고 그 증거능력을 인정받을 수가 없었다. 그런 속에서도 눈물겨운 일이 벌어졌다. 안나오겠다던 김항식이 법정에 나온 것이다. 김항식은 내게 말해줬던 모든 걸 법정에서 정직하게 얘기해 주었다. 유일하게 강철윤에게 유리한 진술을 한 사람이었다. 검사가 반대신문이라는 이름아래 재를 뿌리기 시작했다.

 

  “증인은 피고인 강철윤과 어느 정도 친했죠?”

 

  “군대 선배인데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만났습니다. 만나서 이런 저런 속사정들을 얘기했습니다.”

 

  그가 침착한 태도로 대답했다.

 

  “강철윤의 비닐하우스에서 손도끼를 봤죠?”

 

  검사가 핵심을 물었다. 죽은 여자의 언니는 강철윤이 손도끼로 나뭇가지를 치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못 본 것 같은데요.”

 

  “손도끼가 있었는데 당신이 못 봤을 수도 있지.”

 

  검사가 단정하는 듯한 태도로 찍어 눌렀다.

 

  “제가 강철윤 선배 하고 같이 일을 했는데 장비들 중에 손도끼는 없었습니다. 비닐하우스 농사에 손도끼는 필요 없죠.”

 

  그가 분명히 말했다. 검사가 다시 유도했다.

 

  “손도끼가 있는지 없는지 정확히 확인해 본 건 아니고 대충 손도끼가 없다는 취지로 지금 말하는 거 아닌가요?”

 

  “제가 강철윤선배와 함께 조경일도 했습니다. 조경 일에도 손도끼가 필요 없습니다.”

 

  그가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다.

 

  “사건발생 무렵 강철윤을 만난 적이 있죠? 그때 머리형태가 어땠어요?”

 

  검사가 물었다.

 

  “빡빡깍은 머리였습니다.”

 

  이번에는 재판장이 묻기 시작했다.

 

  “잡혀간 강철윤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증인이었죠?”

 

  “그렇습니다.”

 

  “처음 면회했을 때 뭐라고 하던가요? 그 말만 정확히 다시 해보세요.”

 

  “이삼일이면 나갈테니 아이들에게는 어디 잠시 지방으로 출장갔다고 하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증언이었다. 강철윤 자신이 결백하다는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었다.

 

  “사건 얘기는 하지 않던가요?”

 

  재판장이 다시 확인했다.

 

  “제가 들은 건 살인사건 때문에 들어왔는데 집에 딸만 있으니까 알리지 말라고만 했습니다.”

 

  재판장이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조경 일을 하는데 필요한 도구가 뭐죠?”

 

  “낫하고 톱 그리고 가위정도였습니다.”

 

  “그것 이외에 강철윤의 비닐하우스에 보관하고 있던 도구들은 어떤 것들인가요?”

 

  “비닐하우스에 있는 도구로는 삽, 호미, 낫, 가위, 톱등이 있었습니다.”

 

  여성재판장은 하나하나 꼼꼼히 따지며 묻고 있었다. 경찰과 검찰의 수사의 허점을 발견한 것 같았다.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재판이 끝나고 모처럼 좋은 기분으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며칠 후 아침에 온 신문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강철윤 사건의 재판장이었던 전숙희 부장판사가 신문의 한 면 위에서 활짝 웃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헌법재판관이 탄생했다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이런 내용의 기사가 나와 있었다.

 


  ‘사법부 개혁을 부르짖는 시민단체들, 이들과 코드를 맞춘 행정부, 대법관제청을 둘러싸고 감돌던 대법원과 행정부 시민단체간의 팽팽한 긴장감은 헌법재판소 사상 최초 여성 재판관의 등장으로 일시에 녹아내렸다. 헌재재판관으로 임명장을 받은 전숙희 재판관은 격랑에 휩쓸린 사법부를 구원한 것처럼 법 앞의 평등에 목말라 하는 여성의 숙원을 이루어 줄 것인가? 26년간 일했던 법원을 떠나 헌법재판소로 가는 그를 만났다’

 

  신문을 보면서 나는 앞이 캄캄했다. 그동안 재판장의 가슴에 담겨있던 귀중한 심증들이 안개같이 모두 증발해 버린 것이다. 강철윤은 지독히도 운이 나쁜 남자였다. 모든 게 허무의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나는 신문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논설위원이 전숙희 헌법재판관과 인터뷰한 내용들이 나오고 있었다.

 

  “첫 여성 헌법재판관이셔서 여성계의 기대가 큽니다”

 

  논설위원의 첫질문이었다.

 

  “고향에 갔더니 정치를 잘해주라는 얘기까지 하더군요. 분명한 것은 소수자 약자의 의견에 귀 기울이겠지만 한쪽 편만 들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한 성폭력범의 40여분이나 되는 긴 최후진술을 끝까지 들어줬다는 일화가 있더군요”

 

  논설위원이 물었다.

 

  “저는 판사의 일이 법 이론에 따라 결론을 내려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절차상 당사자의 주장을 잘 들어주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고 봅니다. 나중에 기각이 될 지라도. 경청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받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죠.”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사실 젊었을 때는 그런 면에 소홀히 하지 않았나 반성합니다. 나이 들어 재판 오래하면서 국민이 바라는 바가 그런 것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더하게 됐지요. 법정에 오는 사람들이 승패를 떠나 절차상으로 존중받았다 균등한 대우 받았다는 느낌을 받아야 승복하는 자세가 생길 것 아니겠습니까? 후배 법관에게도 증인이나 당사자가 법관에게 홀대받았다는 기분 이 안 들게 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건관계인이 찾아오면 어서 오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라고 꼭 인사해요.”

 

  “지금까지 몇 건이나 재판을 하셨어요? 야근을 한 경우도 많지요?”

 

  “일 년에 몇 백건씩 하다보니 셀 수 없어요. 때때로 밤샘도 하죠.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는 보따리를 싸가 지고 집으로 갔어요. 남편도 싸들고 오고. 같이 하는 거죠.”

 

  그녀의 남편도 고등법원부장판사였다. 순천여고에 이대를 나온 그녀는 번쩍거리는 학벌은 아니었다. 눈에 띠는 미모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속에는 어머니 같은 따뜻함이 들어있었다. 나는 정말 재판에 필요한 판사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강철윤에게서 좋은 재판장은 떠나갔다.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감옥 안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하게 어루만지곤 했다. 이런 날이면 난 교도소로 향했다. 슬퍼하는 사람 옆에 가만히 있기만 해도 위로가 되듯이 감옥을 찾는 변호사 자체가 위안이었다. 오후 네 시 경 안양교도소 접견실로 들어섰다. 몇 명의 재소자들이 벽 의자에 앉아 조용한 소리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안녕 하세요”

 

  내가 그들을 보면서 인사했다.

 

  “------”

 

  모두들 머쓱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다른 변호사가 자기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교도소의 죄수들이 껄끄러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찾아오는 변호사나 일반인의 눈길이라고 했다. 그들을 만나는 순간 자신이 죄수인 걸 자각하고 참담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다. 그걸 없애주기 위해 난 자연스럽게 인사말을 건네곤 했다.

 

  접견실로 들어가 앉았다. 유리창에 박힌 빗방울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강철윤이 접견실로 들어왔다. 많이 편안해 진 듯한 표정이었다.

 

  “웬일이세요?”

 

  그가 의외라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목소리가 밝았다.

 

  “비가 오네요. 이런 날 변호사가 오면 좋아들 하더라구요.”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가 순간 잔잔한 감동을 받은 표정으로 변했다. 이런 일이 변호사의 보람이었다. 순간순간 주위사람들에게 작은 기쁨이라도 주고 사는 것 그게 세상을 사는 참 맛이 아닐까. 친절한 한 마디도 되고 한 번의 미소도 된다. 내가 물었다.

 

  “지금 마음이 어때요? 재판장이 바뀌어 불안하지 않아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주 편해요. 이제는 어떤 결과가 나와도 승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모든 걸 내려놓은 듯 편안해 보였다. 그가 계속했다.

 

  “일심재판장은 아예 저를 사람으로 보지 않더라구요. 법정에서 저에게 말하는 것도 그랬어요. 너 저기 가 있어 자식아 그런 식이었어요. 내가 말하려고 하면 무안을 주고 소리치고 입을 막았어요. 내가 감옥으로 돌아와서 그렇게 많이 써내도 한번 읽지도 않았어요. 수백 장을 써 낸들 읽어 주겠어요? 그리고는 단칼에 무기징역을 선고했어요.”(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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