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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큼한 여름날의 향기

운영자 2012.09.20 15:21:17
조회 178 추천 0 댓글 0

  따가운 햇살이 바늘 끝 같은 오후였다. 안암역 계단을 벗어난 나는 고대병원언덕길을 헉헉거리며 올라갔다. 찐득한 땀이 얼굴에 달라붙어 불쾌했다. 삼년 전부터 끈질기게 도와달라고 편지가 온 사건이었다. 변호사 경험으로 볼 때 질 나쁜 사건 같았다. 교통사고였다. 치료한 의사들이 모두 고소당했다. 변호사가 네 번이나 바뀌었다. 서초동 변호사사무실들에서 거절당하며 흘러 다니는 사건이었다. 나는 반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헐렁한 배낭차림이었다. 입원실로 살짝 스며들어 그 사람을 관찰하고 싶었다.


  그는 6층 입원실 창가 쪽에 누워 있었다. 1톤 트럭을 몰면서 혼자 과일장수를 하다가 뒤에서 달려온 차가 추돌한 사고였다. 허리와 목을 다쳐서 일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8년째 병원에서 살고 있다. 가족도 없다고 했다. 그 정도면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았다. 의외로 선량해 보이는 해맑은 얼굴이었다. 그의 침대 옆으로 가서 앉았다. 모든 사람에게 망각된 채 그는 정물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나는 꼼짝 않고 세 시간 정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 법정에서 기계적으로 처리되는 손해배상사건과 병실 안 환자의 내면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얘기가 끝나갈 무렵 내가 궁금한 걸 물었다.


  “변호사는 왜 네 번이나 갈아치웠어요?”


  “병원을 찾아온 사람에게 사건을 의뢰했는데 소송이 취하됐다는 겁니다. 알아보니 브로커 같았어요. 그 사람이 가운데서 변호사를 소개하지 않고 혼자 기록을 꾹 쥐고 있다가 쌍불을 당했대요. 다시 브로커가 다가와서 사건을 맡겼더니 담당변호사는 아무것도 모르고 허수아비로 법정에 나가 재판장한테 욕만 먹더라구요. 또 다른 변호사는 재판 도중에 기러기 아빠라 외국으로 간다면서 사임을 하고 어떤 변호사는 내가 의사를 고소해 달라고 하니까 돈과 기록을 내게 돌려주고 가버렸어요.”


  “의사들을 왜 고소했어요? 별로 좋게 보이지는 않던데”


  “병원에 돈을 주는 보험회사들의 힘이 막강해요. 그 사람들의 압력으로 의사들이 있는 그대로 진단을 하고 치료해주지 않고 자꾸만 축소시키려고 해요. 제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저를 가짜환자같이 만들었어요. 사고로 허리를 다쳤는데도 기왕증이 있었다고 하면서 수술을 해주지 않아 지금 일어나지 못하잖아요? 시신경에 손상이 갔다고 하는데 진단서를 보면 안구동통 정도로 축소되어 있어요. 양심적인 의사선생님이 얘기해 줘서 나도 안거죠.”


  은밀히 숨겨져 있는 뭔가 내부의 부당거래가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내가 그걸 파헤칠 힘이 없다는 것이다. 일어서려는데 우연히 그의 머리맡에 있는 성경이 보였다. 불쌍한 영혼 같았다. 우선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의 양손을 잡고 기도하자고 했다. 침묵의 순간 갑자기 ‘흑’하고 나도 모르게 흐느꼈다. 그 파동이 상대방의 마음에 가서 파문을 일으킨 것 같았다. 그의 깊은 속에서 울음을 터져 나왔다. 그가 오열하고 있었다.


  ‘이 불쌍한 영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게 해주세요.’


  나의 기도였다. 서로의 마음 문이 열리면서 따뜻한 액체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상큼한 여름날 토요일 오후에 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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