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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시인의 마지막 노래

운영자 2012.11.06 17:47:44
조회 217 추천 0 댓글 0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검은 아스팔트 바닥을 무심히 비추었다. 나는 달동네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K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죽음을 준비할 시간조차 빼앗은 의사에게 소송을 걸어달라고 했다. 도심의 불빛이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시인의 임대아파트가 있었다. 그는 썰렁한 방안에 혼자 있었다. 뼈에 가죽만 덮어 놓은 듯 바짝 말랐다. 극빈의 삶이었다. 인근 중학교 급식반에서 남은 누룽지를 가져다주고 성당에서 국과 반찬을 대준다고 했다. 나라에서 주는 40만원이 생존의 원천이었다. 가족이 보이지 않았다. 혼자 살다가 고독한 죽음을 맞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이 밀려드는 방에서 그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녁이 오면 이윽고 밤이 오듯 죽음이 겁이 나지는 않습니다. 더 이상 삶에 미련은 없습니다. 한밤이 되면 발끝부터 서늘한 죽음의 기운이 피어 올라와요. 의사가 죽음을 준비하라네요. 지난 세월 호기도 많이 부렸는데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르니까 이제야 나를 감싸고 있던 꾸밈이라는 막이 걷히는 것 같네요.”

 

  이미 그는 한발자국을 저세상에 들여놓고 있었다. 형식적인 위로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물었다.

 

  “삶이 어땠어요?”

 

  “자동차정비공으로 일하면서 열여덟 살 때 두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당선됐죠. 신났어요. 받은 상금을 가지고 세상을 흘러 다녔죠. 사십대에는 인도에도 오래 있었어요. 돈은 아주 조금만 있으면 돼요. 우리 돈으로 칠백원이면 밥 한 그릇을 먹고 오백원이면 국수로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곳이 인도죠. 그렇게 살다 보니 묘지 옆에서 낮잠 자던 청년이 한바탕 꿈을 꾸고 났더니 노인이 되어 있더라는 옛이야기처럼 어느새 나이 육십이 된 거예요. 정신을 차리고 그동안 축적된 내공으로 시를 쓰기로 했죠. 그런데 죽음의 천사가 갑자기 들이닥친 겁니다.”

 

  그는 옆에 있는 앉은뱅이 책상위에 있는 낡은 노트북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보면서 하소연 했다.

 

  “앉아서 저걸 두드릴 기운조차 없어요.”

 

  “어떻게 죽음의 천사가 다가왔죠?”

 

  누구에게나 닥치는 운명이다. 암이 아니라도 말이다.

 

  “달동네 임대아파트를 얻었어요. 한 달 가스비가 삼천원이고 전기세도 만이천원이면 해결 되요. 모든 게 행복이고 감사였죠. 창문을 통해 맑게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면서 시를 쓰기 시작할 무렵인데 기침이 나는 겁니다. 검사했는데 의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거예요. 그 후에도 세달 동안 밤이면 계속 콜록대는 겁니다. 다시 큰 병원을 찾아갔어요. 전문의가 폐암말기라면서 이전 세 달 사이에 갑자기 암이 퍼진 것 같다는 거예요”

 

  그 세 달의 시간을 그는 절실하게 아쉬워했다.

 

  “행복했습니까?”

 

  저세상으로 건너가는 그에게 삶의 본질을 물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부자가 되지는 못할 것 같더라구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저에게 글 쓰는 재능을 주셨죠. 제가 공들여 만드는 글 속에서 저는 대통령도 될 수 있었어요. 저의 본질은 문인입니다. 문인으로서의 삶은 행복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는 것 자체로도 행복합니다. 옆집에 식물같이 누워있는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어요. 그래도 저는 아직 기어 다닐 수는 있다는 데 감사하죠.”

 

  문득 그 옆에 책 두 권과 십자가가 놓여 있는 게 보여 물었다.

 

  “아쉬운 게 남았어요? 삶에서 시와 책은 무엇이었나요?”

 

  “제게 시는 생명이고 책은 밥이었죠. 내면의 깊은 우물 속으로 들어가 보석 같은 영혼의 시들을 끌어 올리려고 노력했죠. 시란 우주의 아름다운 선율을 수신하는 마음의 안테나가 작동되야 하는 거였고 고행과 방랑은 접속을 위한 준비과정이었죠. 돈은 없어도 평생 모은 수천 권의 책을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둘 곳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죽기까지 어떤 책을 친구로 동반할까 하다가 성경과 논어를 남기고 모두 다 남을 줬어요. 제게 결국은 그 두 권의 책만 필요하더라구요.”

 

  책도 지혜의 원천이 담겨 있으면 충분했다.

 

  “바로 여기서 지금 보는 세상이 어떻습니까?”

 

  “창문 밖으로 영롱한 아침이슬이 맺힌 호박꽃을 피면 그 자체가 감동이고 기적 이예요. 누가 호박꽃을 밉다고 했는지 모르겠어요.”

 

  시인에게서 나는 인생에서 정말 필요한 게 뭔지를 알았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은 자유인이던 그의 영혼은 지금 반짝이는 남한강가 나무아래서 에서 미소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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