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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질 의뢰인

운영자 2012.09.20 15:33:52
조회 614 추천 1 댓글 4

  오십대 초반의 한 여성이 사건을 의뢰했다. 감옥에 있는 남편은 죽기 위해 열흘째 물도 음식도 거절하고 있었다. 수사기관에서 접견할 때 본 그는 힘이 빠져 손가락으로 밀기만 해도 쓰러질 정도로 휘청거렸다. 그런데 아내의 태도가 납득할 수 없었다. 사무실로 찾아올 때 마다 화장을 하고 화려한 옷에 악세 사리까지 치렁거렸다. 남편에 대한 걱정이 없는 태평한 표정이었다. 남편 면회를 갈 때도 같이 가자고 했다. “아잉”하면서 여성특유의 고양이 같은 콧소리까지 냈다. 그녀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세계에서 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여자는 저녁때 찾아와 밤 열시가 되도 돌아갈 줄을 몰랐다. 물은 얘기를 또 묻고 그냥 같이 있어주면서 위로해 주기를 요구했다.

 

  이런 의뢰인을 만나면 곤혹스럽다. 한번은 그녀에게 변호사와 함께 있는 시간들이 다 나중에 돈으로 청구된다고 경고를 했다. 변호사인 나는 시간을 팔아 살아가는 지식노동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땀 흘린 만큼 돈을 받겠다는 직업관이다. 그 여자는 막무가내였다. 고운 얼굴로 떼만 쓰면 통하는 적당한 세상을 살아온 것 같았다. 그녀에게 변호사란 돈 몇 푼 던져주면 남편의 죄를 표백시키고 자신을 위해 봉사하는 서비스맨으로 착각했다. 불쾌했다. 참다가 한마디 했다. 남편이 고통 속에 있는데 아내로서 그렇게 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순간 여자의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

 

  얼마가지 않아 마음속에서 서리가 내린 그녀의 복수가 시작됐다. 첫 공판일이었다. 법정 앞 복도에서 만난 그녀는 팔짱을 낀 채 하얗게 눈을 흘겨 뜨면서 비웃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찬물을 뒤집어 쓴 듯한 모멸감이 엄습했다. 법정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앉을 변호인 좌석에는 바로 전날 선임한 다른 변호사가 앉아 있었다. 나는 통지도 받지 못한 채 해임 당했다.

 

  얼마 후 그녀가 변호사회에 진정을 했다. 받은 돈을 돌려받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아무 일도 한 게 없다면서 험담과 모욕이 가득 적힌 서류들이 접수되었다. 조사위원의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그녀는 이번에는 조사위원도 의심스럽다면서 대한변협에 재진정했다. 흠이 없으니까 영수증을 트집 잡고 나중에는 구치소에 알아보고 30분밖에 접견을 안했는데 왜 2시간의 비용을 부풀려 청구했느냐고 몰아쳤다. 그녀는 내가 순간적으로 공간이동을 하는 초인으로 취급했다. 수사기관 조사 시의 입회는 그녀에게는 변호사가 일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또 밤중까지 변호사를 잡아놓고 있었던 것은 의논이지 법률과는 상관없다고 우겼다. 이년동안 끊임없이 시달렸다. 가족에게도 전화를 걸어 괴롭혔다.

 

  조사담당 변호사가 얼마를 돌려주고 타협하라고 제의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사촌오빠가 세무서에 다니는 걸 이용해서 사람을 협박한 전력도 있었다. 이건 돈이 아니라 변호사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변호사의 노동이란 편한 게 아니다. 막힌 차들 뒤에서 한없이 기다리면서 냄새가 풍기는 어둠침침한 구치소로 가서 지루한 시간을 죽여야 했다. 경찰서에서 또 검찰청에서 냉대를 받으며 철의자에 앉아 몸으로 때워야 하는 곤한 직업이다. 수천 장의 기록을 잠 못자고 뒤지면서 변론을 준비한다. 그렇게 힘들게 버는 돈은 보석 같은 나의 땀의 결정체였다. 품값을 저질의뢰인에게 착취당할 수 없었다. 오늘도 나는 싸운다. 제 것도 찾지 못하는 변호사는 남의 권리를 보호해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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