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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물 뒤집어 쓴 ‘더 웨이’

운영자 2012.11.06 18:02:29
조회 210 추천 0 댓글 0

  수은등이 검은 아스팔트 바닥을 묵묵히 비치는 밤이었다. 앞 건물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비품들이 내려와 트럭에 실렸다. 간판도 뜯기고 있었다. 사무실을 이전하느냐고 물었다.

 

  “아니요, 여기 변호사님이 암이 말기라 곧 돌아가신답니다. 그래서 이제 법률사무소 문을 닫는 겁니다.”

 

  평소에 더러 얼굴을 마주치던 그 변호사와 살가운 인사 한 번 못했다. 그런 일이 더러 있었다. 얼마 전 아는 분의 부고를 받고 영안실로 들어갈 때였다. 바로 옆방의 문 입구에 나를 보면서 방긋 웃고 있는 얼굴사진이 보였다. 도로 맞은편에서 사무실을 하던 윤변호사였다. 그가 죽은 지 전혀 몰랐다. 삼십대 중반 한 시절을 같은 직장에서 지내던 동료였다.

 

  변호사를 20년 했어도 달팽이 같이 고립되어 있어서인지 이웃 변호사의 아픔도 죽음도 모르고 지냈다. 법정에서 만나면 으르렁대며 이빨을 보이다가 헤어지는 게 직업적 숙명이다. 시장을 가보면 힘들어도 상인끼리 마음을 나눈다. 자리를 비웠을 때 대신 팔아주기도 하고 종이 잔에 담긴 싸구려 커피 한잔을 나누면서 함께 울고 같이 웃는다. 변호사들도 그렇게 마음이 흘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따지고 보면 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다. 꽉 닫힌 마음들이 우리를 메마르게 했다.

 

  마음을 통하게 하는 방법으로 ‘샘터’같은 얇은 감성 잡지를 만들어 변호사들의 애환을 담고 싶었다. 문제는 예산이었다. 변협에서 발행하는 ‘인권과 정의(종합편)’가 유사한 역할을 해 왔지만 구독률이 거의 없었다. 낡고 더러운 건물을 리모델링하듯 서류가방 속에 들어가게 크기를 작게 하고 산뜻한 이름으로 바꾸어 참신한 내용을 담으면 될 것 같았다. 나는 홍보과 직원 세 명과 함께 잡지사들을 순방했다. 벤치마킹이 기본이었다. 컨셉이 분명해야 했다. 그건 법률가의 삶과 애환이었다. 꽃이 많아도 그걸 하나로 묶는 다발이 중요하듯 휴면감성잡지가 그 기능을 하기를 희망했다. 잡지 만들기는 사실상 자원봉사에 가까웠다. 바쁜 변호사들이 쓰는 원고는 몇 푼의 형식적인 원고료 때문이 아니다. 섬세한 감성을 요구하는 일이라 여성변호사회 간부들에게 편집장이 되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시간적 여유가 있는 분이 없었다. 변협직원 세 명이 데스크가 되어 원고 청탁과 편집을 담당하고 나는 제일 아래의 현장기자가 됐다. 변협직원들에게는 정상적인 업무 외의 추가로 에너지를 쏟는 면이 있었다.

 

  성공의 핵심은 좋은 글이었다. 고시공부를 하다 작가가 된 이문열씨를 힘들게 만나 그 속을 들여다보고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 취재를 거부하는 ‘아침이슬’의 작곡가 김민기를 만나 하룻밤을 같이 하면서 그가 겪은 고문의 아픔을 듣기도 했다. 변호사들이 호응하기 시작했다. 윤배경, 박형연 변호사가 인터뷰기자의 역할을 맡아주기도 했다. 강금실 변호사가 문학에 다가가는 즐거움을 써주었다. 화가인 김원중 변호사가 행복을 색칠하는 즐거움을 써주었다. 윤상일변호사가 소설을 써서 보냈다. 어느덧 네 번째 책까지 나왔다. 주저하던 변호사들이 마음 문을 열기 시작했다. 홍천의 산 속에서 암 투병하는 변호사의 얘기가 잔잔한 감동으로 퍼졌다. 배금자 변호사가 강북으로 이사한 집에서 느끼는 오롯한 마음을 써 보내주기도 했다. 첫사랑의 경험들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쓰기도 했다. 잡지 전문가들로부터 수준급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변호사들이 이렇게 감성적이고 글을 잘 쓰는지 몰랐다고 감탄을 하기도 했다. 동아일보에서 편집과 일러스트 등을 염가에 도맡아 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전 변협의 한 임원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무도 보지 않고 오자마자 쓰레기통에 쳐 넣는 그런 책을 만들지 말라는 게 위의 지시입니다. 폐간 안을 올리세요.”

 

  갑자기 찬물을 확 뒤집어 쓴 것 같았다. 진짜 그런 것인지 샘플조사를 해 봤다. 아니었다. 어떤 일이든 반대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아무도 보지 않고 단번에 쓰레기통에 버린다는 말은 너무했다. 잡지 ‘더 웨이’가 정말 싫은 분은 안보면 된다. 구독료를 달라는 것도 아니고 예산을 특별히 쓴 것도 아니다. 발행비용조차 변협임원의 한번 해외 출장비정도다. 어쨌든 이제 잡지 ‘더 웨이’의 발간이 중지될 지도 모른다. 그동안 ‘더 웨이’를 반갑게 맞이해 주고 사랑해준 회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한 모 변호사의 마음도 앞으로는 활짝 열렸으면 하는 소망이다. 따뜻한 마음과 사랑이 있을 때 진짜 변호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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