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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살인(21)

운영자 2012.02.21 15:25:45
조회 263 추천 0 댓글 0

  접견실 벽의 조금 열린 창문 틈으로 쇠격자가 보였다. 그 작은 사각의 틀 속에서 비에 젖은 후박나무의 잎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수정 같은 빗방울이 끝에서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비냄새를 머금은 상큼한 공기가 메마른 접견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변호사는 법정보다 감옥을 더 많이 찾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선적으로 꾸민 딱딱한 법정보다 때 묻은 회벽 앞에서 죄인과 마주앉는 게 수채화의 물감처럼 경계를 넘어 상대방의 내면으로 스며들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마음이 부드러워진 강철윤이 얘기를 계속했다.

 

  “저는 변호사님이 사건현장을 가고 증인들을 만나 일일이 확인한 일들에 대해 정말 감사해요. 그 은혜를 죽어도 잊지 못할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게 없어요.”

 

  그의 말에는 진정이 어려 있었다. 사실 변호사가 현장을 확인해 보고 증인도 만나봐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수사기록은 범인을 의심하는 속에서 작성된 것이다. 모든 조서와 증거물은 그가 범인이어야 한다는 논리 속에서 작성되고 구해진 것이다. 변호사는 그 로직을 깨야할 의무를 가진 사람이었다. 변호사는 수사의 대척점에서 증거나 사람들의 말을 찾아나서야 했다. 수사기록 이상으로 두꺼운 변호기록을 만들어야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싸울 수 있었다. 전관예우나 비굴하게 사정을 해서 형량을 줄여보려는 건 프로답지 않은 구걸행위였다. 발로 뛰어 얻은 살아있는 증거라야 판사들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군대에 계속 있지 왜 사회에 나와 이렇게 고생합니까?”

 

  안정된 직장을 던진 그가 안타까웠다.

 

  “군에 있을 때 내가 군수담당이었는데 참모장이 은근히 시키는 게 도둑질이었어요. 일주일에 쌀 오륙 십 가마 남기는 건 쉬웠어요. 그렇게 남긴 쌀을 팔아 돈을 만들어 바치라는 거죠. 그래야 보직도 유지하고 용돈도 생기는 거였어요. 그런데 전 횡령해서 돈을 만들기 싫어서 제대를 했어요. 몇 년 만 참으면 연금을 받는데도 말이죠. 제대를 하고도 사기 치고 그런 게 싫었어요. 콩 심은데 콩 나는다는 속담처럼 나무장사를 한 거예요. 나무를 심어서 가꿔 파는 조경업이죠. 사실 사건이 나고 저를 배신한 후배들 중에는 제 신세를 졌던 사람들이 많아요. 저에게 돈을 꿔가고 갚지 못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되니까 모두 배신을 하네요.”

 

  의외로 그는 강직한 성격 같았다. 그가 좁은 창틈으로 보이는 안개비를 무심히 보다가 불쑥 한마디 내뱉었다.

 

  “그 여자가 꿈에도 한 번 나타나지 않아요. 그렇게 한번 보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부르는 데두요.”

 

  문득 기억 속에서 어떤 살인범의 얘기가 떠올랐다. 그는 살인범들만 모인 방에서 일 년을 지낸 경험을 내게 말해줬다. 살인범인가 아닌가를 알아보는 정확한 방법은 꿈속에 죽은 사람이 나타나는 지를 확인하면 단번에 안다는 것이다. 살인범들만 모여 있는 감방에서는 한밤중이면 제각각 가위가 들려 신음을 한다고 했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찾아와 목을 조르기도 하고 원망도 하면서 울부짖는 괴로움들을 모두 겪고 있다는 것이다. 꿈에 죽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절대 살인범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었다.

 

  “꿈에 나타나기를 기다리는데도 한 번도 오지 않았어요.”

 

  강철윤이 섭섭한 듯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그는 죽은 여자를 진짜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도 표정도 입도 모두 진실했다. 나는 그의 본질을 좀 더 알고 싶었다.

 

  “참 비닐하우스에서 신당을 봤는데 뭡니까?”

 

  내가 물었다. 그의 눈에서는 원인모를 귀신의 그림자가 비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초점 없어 보이는 얌전한 눈동자의 중심 안에 혼탁한 커튼이 쳐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따금씩 그 커튼 저쪽으로 움직이는 검은 실루엣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저희 집은 어렸을 때 전답이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것마저 공동묘지 옆에 있었어요. 비가 오거나 하는 날 논에 가서 일을 할 때면 묘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무섭더라구요. 열일곱 살 때 제가 방황을 한 적이 있어요. 묘지에 있던 귀신이 내게 붙은 것 같았어요. 이상한 증상들이 나타났죠. 혼자 집을 나가 떠돌다가 태백산 단군 성전까지 흘러가게 됐어요. 산 전체가 온통 굿판이더라구요. 그해 여름부터 겨울까지 굿판에서 나오는 떡이랑 돼지고기를 먹고 견뎠어요. 그리고 눈이 내린 다음부터는 조그만 암자에 들어가 물도 길어다 주고 고시생 불도 때주고 하면서 한 스님 밑에 있었지요. 거기서 어깨너머 귀동냥해서 불경도 주워듣고 그런 정도예요.”

 

  그는 스스로를 땡초라고 표현하기도 했었다.

 

  “점도 보고 그랬어요?”

 

  내가 물었다. 그는 무속인임을 내게 말하기 거북해 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가 잠시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었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어떤 일을 미리 말하면 대충 맞아요. 그걸 들은 사람들이 꺼뻑 가는 경우도 있어요.”

 

  순간 그의 얼굴에 묘한 자부심이 스쳐 지나갔다.

 

  “죽은 여자의 언니는 무당입니까?”

 

  그들 사이에는 무속적인 어떤 연결이 있는 것 같았다.

 

  “신이 내렸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여자의 신 엄마는 화보살 이라는 여자였어요. 그 화보살 말이 내가 그 여자보다 한 차원 높은 신을 모시고 있다는 거예요.”

 

  “한 차원 높은 신이라는 게 뭐죠?”

 

  “예를 들면 그 여자가 다른 젊은 남자와 만나 동침하거나 할 때 머리 속에서 그걸 비난하는 내 목소리가 들리더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를 보면 질 겁을 했어요.”

 

  나는 갑자기 호기심이 일었다.

 

  “신이 들리신 건 사실인 것 같은데 얘기 좀 해봐요. 그게 어떤 건지?”

 

  “에이 뭘요-----”

 

  그가 쑥스러운 듯 대답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진짜 궁금하다니까요. 어떤 증상이 일어납니까?”

 

  내가 다시 재촉했다.

 

  “솔직히 제 경험을 하나 말씀드리면 길을 가는데 꼬마 계집아이가 있었어요. 그 아이가 나를 따라오는 거예요. 그래서 손을 잡고 데리고 가는데 떡 장사 아주머니가 보였어요. 아이가 떡을 사달라고 보채더라구요. 그래서 떡을 하나 사줬더니 손에 들고 먹는 거예요. 그렇게 아이를 데리고 한참을 걷다보니 갑자기 아이는 없어지고 내가 그 떡을 쪽쪽 빨면서 맛있게 먹고 있더라구요.”

 

  “그 순간은 내가 아니고 그 꼬마 계집아이의 혼이군요. 정말 내속에 전혀 다른 귀신이 들어와 그렇게 엉뚱한 행동을 할 수도 있나요?”

 

  내가 강한 호기심으로 그렇게 물었다. 그가 빙긋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참 내가 살인범으로 되어 있으니까 여기 교도소에서 험한 사람들은 다 내방으로 보내요.”

 

  “어떤 사람들인데요?”

 

  내가 되물었다.

 

  “청평 호수에 놀러온 여자들을 물에 빠뜨려 죽인 살인범도 있구요 또 한 사람은 갑자기 도끼를 가지고 주차해 있던 차 여섯 대를 부수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도 죽이려고 했다가 잡혀 들어온 사람도 있어요. 그 도끼를 가지고 차를 부수고 살인을 하려던 사람이 감방 안에서 내게 말해주는데 자긴 도저히 기억할 수 없다고 그래요. 정말 자신도 모르겠다고 하소연해요. 귀신이 씌워 그랬던 것 같다는 거예요.”

 

  살해하는 순간 살인범은 악령의 지배를 받는 지도 모른다. 살인범 중에는 순간의 기억을 스스로 뇌리에서 지우는 경우도 있었다. 내 앞에 있던 강철윤은 뭔가 생각하고 있다가 내게 불쑥 또 한마디 던졌다.

 

  “죽은 그 여자 좋은 사람은 아니었어요.”

 

  “무슨 말이죠?”

 

  그의 눈동자와 표정이 던지는 메시지를 살피면서 물었다.

 

  “처음에 그 가족들이 제 비닐하우스에 쳐들어 와서 그 여자를 데려 갔을 때 말이죠. 그 여자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면 모든 게 끝이 난 거예요. 저도 마음을 정리했을 거구요. 그런데 한 달 만에 돌아와서 흙바닥 위에 무릎을 꿇더라구요. 다시 살자고. 그 여자가 정말 내가 싫었다면 그냥 거기서 안 왔으면 끝났을 텐데.”

 

  그의 잠재의식은 여자의 저의를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갈께요”

 

  내가 가방에 수첩을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어느새 비도 그치고 앞뒤로 변호사들이 담당 피고인을 만나 열심히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교도소 마당의 푸른 나뭇잎들이 물기를 가득 머금고 싱싱하게 윤기를 내뿜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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