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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크리스토프가 안나를 부여잡으며 물었다. 안나는 눈을 퍼특 뜬 상태로 온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괜찮아. 고작 한 번 뿐이었는데, 이제 적응을 한 거 같기도 하고...”
“적응? 무슨 적응?”
“그런 게 있어. 그나저나 이제 슬슬 아렌델로 돌아갈래? 가을이 다 끝난 것 같잖아.”
크리스토프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안나를 살짝 일으켜 세워주었다. 크리스토프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눈사람을 갑자기 오늘 여기서 만들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나도 진즉에 그러자고 할 생각이었어. 그럼... 괜찮은 거지? 갈까?”
“그래, 가자. 가기 전에 여기 있는 친구들에게 인사 한 번만 하고, 돌아가자.”
안나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지난해부터의 첫눈 오는 날 안나는 조금 이상하단 느낌이 들었다. 그 사실을 지적하는 것조차 어색할 정도로 이상한 느낌이 분명히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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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한 해 동안 여왕에 관해서 딱히 뒷말이 나올 일은 없었다. 안나는 언제나 깔끔하게 일처리를 했고, 사소한 불만들까지도 자신의 힘이 닿는 선에서는 해결해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다만 딱 한 가지, 아이에 대한 문제가 가끔 구설수에 오른 적은 있었다. 그래도 여왕과 국서 사이에 금술이 얼마나 좋은지 아렌델에서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그 구설수가 무슨 스캔들로 이어지거나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구설수는 아이가 없을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식이 없는 데에 대한 시민들의 순수한 걱정에 가까웠다. 그래도 정작 안나 본인이 그 문제에 대해서 전전긍긍하거나 걱정하는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대다수의 시민들은 그들의 여왕을 믿고 그저 차분히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가끔 크리스토프에게 안나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었다.
“아직 때가 아닐 뿐이야, 크리스토프. 생명이 하나 더 태어났을 때, 그 과거를 건드리면 훨씬 더 골치 아파지겠지. 매년 겨울에 벌어지는 이 작은 소동이 끝나갈 때쯤엔, 소식이 올 거라고 생각해.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누군가의 배려야. 그 종착점이 어디로 갈지는 나 스스로도 몹시 궁금하지만, 당장은 가만히 기다려볼 수밖에 없어.”
“자기 말을 가만히 들어봤어. 몇 년 동안, 난 가만히 듣기만 했지.”
크리스토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나가 눈망울을 반짝이며 크리스토프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자기가 시간에 대해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아무리 둔한 나라도 이제 알아. 그리고 자기가 올라프를 다시 만들어낼 때마다 쓰러지는 것도...”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싶은데?”
“그런 이야기는 패비 할아버지도 잘 모른다고 했어.”
크리스토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없을 때, 집에 돌아가서 패비 할아버지께 여쭤본 적이 있어. 시간에 관련된 마법을 배워보신 적이 있냐고. 간단한 질문이었을 뿐인데, 할아버지의 대답은 길고 장황했어. 결론을 원했으니 결론만 말해줄게. 모든 마법은 법칙이 허용했기 때문에 주어진 거라고 했어. 그런데 시간은 그 근본과도 같은 거라서, 누군가가 마음대로 다루도록 허용되진 않는다고 했지. 딱 한 가지 경우...”
“딱 한 가지 경우?”
“신뢰에서 비롯된 베풂이라면 모를까. 정해진 길을 따라 종착점에 도착할 수 있도록 방법만 알려주는, 그런 친절이지. 주어진 친절을 악용하려 들지 않을 것이고, 느낀 바대로 행동하며 받은 선물에 감사해할 것이라는 절대적인 신뢰에 따른 베풂.”
안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대부분 다 알고 있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생각? 아니, 느낀 거지. 그렇게 느끼고 있다고 하는 게 좋겠네.”
“여보의 경우에는, 어떤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아?”
크리스토프의 물음에 안나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안나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두 눈을 감은 채 고민에 빠졌다. 어떤 길을 따라가고 있냐고? 지금 그녀에게 베풀어지는 친절이, 어떤 길로 그녀를 이끌고 있냐고? 고민해본 적 없었다. 지금 당장 지켜야 하는 선에 대해서만 고민했지, 그것이 결국 어떤 선물로 마무리를 짓게 될지는 일찍이 고민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안나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을 입에 담았다.
“마지막 인사.”
“응?”
“언니와의, 마지막 인사. 내가 시간을 거슬러서까지 갈구했던 것은 그것밖에 없어. 내게 선물이 주어진다면, 그 길을 따르는 것이겠지.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어?”
“...그래, 그 말이 맞는 거 같아. 떠난 사람이 돌아오는 건 허용되지 않을 거야. 자기에게 최대한의 자비가 베풀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마지막 인사겠지. 유언 한 줄 없이 떠나버린 사람을 다시 한 번 만나고,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겠지.”
“그리고 이번 겨울이 오고 있어. 내게 이런 기회는 몇 번이나 더 허용될까? 이 여행이 영원히 계속되진 않을 거야. 언제가 되면... 내가 올라프의 코를 꽂는 순간에도, 의식을 잃고 여보의 품 안에 안기지 않을 수 있는 날이 오는 걸까?”
“세 번.”
크리스토프가 대답했다.
“세 번이라도 들었어. 법칙 그대로, 무엇도 바뀌지 않고 제자리만을 찾아가도록 만드는 선물이 주어지는 기회. 그 횟수는 세 번이야. 세상은 늘 3으로 이루어져 있잖아. 램프를 문지르고 빌 수 있는 소원의 개수도 세 개인 것처럼.”
“하지만 정령의 수는 넷이지.”
“그 넷이 모이면 뭔가가 바뀌어. 근본적인 게 바뀌는 건 아니지만, 넷이 모이는 순간부터는 꽤 많은 게 바뀔 수 있어.”
“그리고 다섯 번째 정령에 관한 이야기도 들은 적 있어.”
“네 가지 꿈이 모여서 뭔가가 바뀐다면, 다섯 번째, 그 바뀐 이후의 이야기도 하나의 꿈과 같겠지. 그게 여보가 원하는 이야기의 결말이야?”
“어쩌면.”
안나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름의 파릇파릇한, 하지만 다소 견디기 어려운 싱그러운 색감이 그녀의 두 눈을 자극했다.
“하지만 여섯 번째는 없을 거야. 그건 나도 알아. 그건 정말 선을 넘는 것일 테고, 그런 건 허락되지 않겠지. 하지만 조금의 자비가 있다면, 난 다섯 번째까진 갈 수 있을 거라고 믿어. 그리고 그게 만일 그녀의 마지막 인사라는 종착지라면... 난 정말로 감사할거야. 내가 신뢰받았던 그대로, 감사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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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 부부는 그해 첫눈을 아렌델에서 맞았다. 첫눈이 내렸다는 것의 의미를 두 사람은 동시에 자연스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눈빛만 교환한 채 두 사람은 왕궁 마당으로 함께 걸어 나갔다. 처음 안나가 모험을 했던 그 날부터, 매년 첫눈은 아주 빠르게 쌓였다. 누군가가 일부로 미리 쌓아놓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이 내리는 속도보다도 눈이 쌓이는 속도가 더 빠른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 날도 정확히 그런 경우였다. 두 사람의 손에서 추억의 눈사람은 자연스럽고 견고하게 완성되었다. 팔, 머리카락, 단추를 모두 몸에 붙이고, 마지막으로 올라프의 코에 새로운 당근을 꽂기 전, 안나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또 어떤 곳으로 가게 될까? 세 번째. 오늘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안나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가 결정될 것이다. 안나는 숨을 크게 내뱉는 동시에 당근을 제자리에 밀어 넣었다. 스르륵 잠들 듯이, 안나가 천천히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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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델.”
눈을 뜬 안나가 가장 먼저 중얼거린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온 바로 다른 곳이 아닌 그녀의 고향, 그녀가 방금 있던 곳, 아렌델이었기 때문이었다. 광경은 이전 여행들과는 달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이 그녀의 집이니 당연하다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이것은 그것과는 또 달랐다. 그녀에게는 이 시간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확히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가리키는 아무런 단서도 없지만, 직감적으로 이 날이 무슨 날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겔다.”
안나가 새하얀 아렌델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 날이 무슨 날인지는 확실했다. 그리고 그 날엔 분명히 의미도 있었다. 올라프가 재탄생했던 날. 오랜 시간 코를 잃고 헤맸던 어린 안나의 오랜 친구가, 마침내 새 코를 끼워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던 날. 이렇게 새하얗고, 이렇게 투명하고 깨끗한 눈이 쌓였던 아렌델의 날에서, 겔다가 그녀에게 작지만 신선한 충격을 건네주었던 날. 안나는 이 날을 기억했다. 이 날, 이 장소, 부둣가에 있진 않았지만. 이날 그녀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날이 이 날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안나는 잠시 흘낏 항구를 바라보다가 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렌델의 성의 지붕은 새하얬다. 엘사가 살아있던 시절 깨끗한 얼음으로 덮어주었던 아렌델의 푸르른 지붕은 녹아 사라진지 오래였고, 먼 과거의 유산처럼만 느껴지는 시점이었지만, 이 시절 겨울날의 하얀 지붕은 역시 추억처럼 느껴지는 측면이 있었다.
“내가 있을 거야.”
안나가 중얼거렸다. 이 날, 이 시각, 안나는 마당에서 눈덩이를 굴리며 놀고 있었다. 혼자서, 쓸쓸하게. 일부로 엘사의 방 창문에서 잘 내다보이는 위치에서, 엘사의 창문을 적극적으로 의식하며 엘사가 자신을 봐줄지도 모른다는 묘하게 허튼 희망에 잔뜩 부풀어 자신의 부푼 심정만큼이나 커다랗고 동그란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어쩌면 엘사가 그날 그녀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지금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면 안나는 어째서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일까? 어쩌면 마지막 여행. 혹은 마지막 여행인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여행. 어느 쪽이든 큰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2년간, 안나는 어린 엘사를 만난 적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몸은 컸지만 실패와 불안에 떨고 있던, 첫 번째 여행에서 봤던 것만큼이나 어리디 어리던 엘사를 만난 적이 있었다. 오늘 안나는 누구를 보러 온 것일까? 마당에서 놀고 있는 어린 시절의 자신? 혹은 그것을 지켜보던 어린 엘사?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안나 자신이 이 순간을 기억하는데, 이렇게 특별한 날에 이렇게 또렷하게 기억나는 추억을 다시 들춰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성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안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문득 이날은 참 고요한 날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눈이 내리는 날, 아렌델. 그 누구도 거리에 나오지 않았고, 그 누구도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마치 시간을 건너온 안나가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도록 세상에 배려하는 것처럼. 혹은... 배려 받는 것이 그녀가 아닐 순 없을까? 안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사방의 고요에 귀를 기울였다.
고요를 깨는 목소리가 있었다. 소곤거리는 목소리. 그리고 짤랑.
“당근 하나가 얼마였지? 이 시절 물가가 지금이랑은 다를까?”
익숙한 목소리. 아주 미세하지만, 그 세세한 주파수와 톤까지 안나의 귀를 강하게 자극하는 부드러운 목소리. 안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거리, 이 위치. 아마도 그렇다면 채소가게. 그리고 들리는 이야기는 당근에 관한 이야기. 안나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채소가게에서 그녀를 바라볼 수 없도록, 안나는 기척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가게 쪽으로 걸어 다가갔다. 안나가 듣기에 그 목소리는 명백했다. 그리고 가게 건너편의 건물 모서리에 살짝 숨어 채소가게를 내다보는 순간, 안나는 그녀의 귀가 완전히 옳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20대의, 다 크고 성숙한 엘사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당근을 하나 집어든 채로, 주머니에 든 동전을 짤랑거리면서 고민에 빠져있었다. 안나는 숨을 헉 들이쉬며 엘사를 흘끔흘끔 훔쳐봤다. 엘사는 안나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 같지 않았다. 잠시 뒤 엘사는 주머니에서 좀 과하다 싶은 개수의 동전을 꺼내들고 가게에 대충 얹어놓았다. 대략 당근 한 뭉치 값의 돈을 지불한 엘사는 수북이 쌓여있는 당근 중에서 단 하나만을 집어 들었다. 엘사는 안나의 존재를 눈치 챈 것 같지가 않았다. 안나는 엘사가 주번을 두리번거리며 성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엘사가 적당히 멀어졌을 때쯤, 안나가 엘사의 뒤를 슬그머니 쫓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결국 아렌델 성까지 닿았다. 엘사는 성에 도착하는 순간 주저 없이 마당으로 뛰어 들어갔다. 안나는 발걸음소리를 완전히 죽인 채로 성문 앞에 멈춰 섰다. 엘사는 마당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성문을 닫지 않았다. 안나는 살짝 놀라움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열려있네. 이 문.”
원래 열려있었을 리는 없었다. 이 시기는 아렌델의 성문이 강철보다 단단하게 닫혀있던 시절이고, 이 날에 특별히 성문이 열려있었다는 기억은 안나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정황상 한 사람 뿐이었다. 엘사. 그녀가 이 문을 열고 나왔던 것이다. 안나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 먼저 이곳에 와 있던 엘사가 성문을 열고 이곳을 뛰쳐나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엘사가 처음 도착한 곳은 분명 이 마당 안일 수밖에 없었다. 안나는 그때서야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이해했다. 오늘 이 곳에서 무언가를 바꾸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엘사였다. 바꾸는 사람은 엘사였고, 안나는 지켜보는 사람, 방관자. 오래전 벌어진 이 과거의 변경을 지켜보기 위한 방관자.
세 번째 기회는 그렇게 써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나에겐 필시 네 번째 기회가 주어지리라. 오늘 이 장면을 보고나면, 그녀는 한 번 더,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받을 수 있으리라. 다섯 번째로 통하는 길을. 오늘 이 광경을 지켜보고 나면, 분명히...
안나는 제자리에 서서 열린 문틈 사이로 마당을 훔쳐보았다. 말소리가 들렸다.
“여기, 이걸 쓰렴.”
엘사의 목소리였다. 안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눈동자를 바르르 떨었다. 이 말은 기억했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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