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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여자 살인 사건 18

운영자 2009.12.16 14:53:13
조회 2148 추천 1 댓글 0

18


  “도대체 이해를 못 하겠어요”

  김용국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내뱉었다. 그의 계산은 진실을 고백했는데 판사가 형을 더 올린 것이다.


  “이럴 거면 말이죠 차라리 회장부인이 부탁한 대로 말을 맞춰 줄 걸 그랬어요. 솔직히 자백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뭐가 있어요?”

  재판부는 그의 말을 계산된 정직으로 파악했다. 사실 그랬다. 그는 필요에 따라 어떤 것은 사실대로 또 어떤 점은 우물쭈물했다. 검사나 다른 변호사에게 공격받고 털어놓은 것도 있었다. 모두 그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그 자신만 보지 못했다. 그는 나에게 비난하면서 따지는 눈길을 보냈다.


  “모두가 변호사인 내 탓입니다.”

  남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그의 심정일 것이다.


  “왜 변호사님의 탓입니까?”

  그가 정곡을 찔린 듯 순간 움찔했다. 


  “일심에서 징역20년이 나왔으면 변호사는 항소심에서 확 깍아야 하는데 무기징역이 나왔으니 능력 없는 변호사의 실수가  아니겠어요? 안 그래요?”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게 이기적인 범죄자들의 심리였다.


  돈을 받았으니까 살인을 하고 돈을 줬으니까 형이 깍여야 했다. 법과 도덕보다는 돈이 우선인 생각이 범죄의 근원이다.

  판결이유를 그가 이해한다면 그는 참회하는 인간일 것이다. 나의 뒤틀린 대답에 그는 자기코드와 맞다고 느꼈는지 씩 웃으며 동조를 구하듯 털어놓았다.


  “하여튼 판사란 사람 이해하기 힘들어요. 내가 뭘 숨기고 있다고 날 보고 진실을 다 말하지 않았다는 건지 말이죠.”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아직 비밀이 남았다고 속삭였다.


  “저한테 말하지 않았던 다른 건 없어요?”

  나는 막이 내린 후의 진실을 기대하면서 물었다.


  “여태까지가 다지 더 이상 뭐가 있겠습니까?”

  그가 짜증스런 어조로 부인했다. 그가 침울한 표정으로 시멘트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만에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절망의 빛이 감돌았다.


  “변호사님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죠? 이제부터라도 제가 회장부인에게 맞추어 진술하면 저를 도와주실 수 있어요?”

  또 흔들리는 그는 궤도수정에 나를 이용하려고 했다. 이제 단호할 필요가 있었다.


  “그건 제 배역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진실하자는 전제하에  이 재판에 참여했었죠. 그렇게 시나리오를 바꾸려면 저는 이쯤 연극무대에서 사라져드리는 게 좋겠네요.”

  “하긴 그러시겠죠.”


  그가 심드렁한 어조로 내뱉었다. 그가 심경변화를 일으킨 뒤에는 아직 뭔가 원격조정의 손길이 있는 것 같았다.


  “회장부인 측에서 사람을 보내 왔었죠?”

  내가 정곡을 찔러 단정하듯 물었다. 

  “네 사실은 회장부인 담당변호사가 왔었어요.”

  “그가 뭐라고 했는지 내게 솔직히 말해줄 수 있어요?”

  나는 막연히 짐작을 하면서 물었다. 그들은 대법원에서 사건을 파기 환송시키고 다시 심리하려고 할 것이다. 
  “그 변호사가 하는 말이 엄 변호사님이 법원에 써낸 서류들을 봤느냐고 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모두 물을 먹었다는 겁니다.”

  난 취재한 진실을 그대로 써 냈었다. 김용국이 계속했다.

  “그 변호사가 하는 말이 전체적으로 작전을 잘못 짜서 그렇게 됐다는 거예요. 그 변호사는 선고 다음날 판사실에 갔었대요. 가서 살펴보니까 판사들이 회장 부인 측에서 낸 서류들을 하나도 보지 않았더래요. 그래서 자기네들은 다시 재판할 거래요. 그리고 나중에는 재심까지 할 거 랍니다. 이제부터는 회장부인에게 잘하라는 거예요. 엄마 같은 분이 아니냐는 거죠.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게 핏줄이고 집안 아니냐는 거예요. 만약 지금까지 돈을 대던 회장님이 이제 손을 들어버리면 모두 어떻게 되겠느냐는 거죠.”


  나는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 김용국이 전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 변호사는 아주 교묘하게 김용국의 위증을 유도하는 것이다.  잠시 말을 쉬던 김용국이 계속했다.

  “그 변호사님이 말하길 자기는 내가 혼자 죽여 놓고 고모에게 뒤집어씌우는 걸로 알고 있대요. 나를 공격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 말이 수시로 달라지고 거짓말을 해서 자기가 법정에서 그렇게 했었대요.”


  정말 그럴까. 속으로 진실을 알면서 그 변호사는 빠져나갈 길을 만든 건 아닐까. 회장부인을 맡은 로펌 측의 변호전략은 내가 보기에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불을 보고 달려드는 나방처럼 사형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로펌의 변호사들의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회장부인은 재판장에게까지 조금도 기가 죽는 여자가 아니었다. 회장의 부와 사위가 판사라는 의식이 그녀의 머리에 꽉 차 있었다.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돈만 있으면 뭉갤 수 있었다는 경험을 그녀는 등뼈같이 주체성 같이 맹신하는 것 같았다. 회장이나 그녀의 의식 속에 로펌의 변호사들 역시 돈 주고 산 용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전문가들의 조언이 귀에 들어갈 여지가 없다.
 
  김용국의 입에서 마침내 그걸 뒷받침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회장부인 고모가 변호사들을 가만 놔둘 사람이 아니예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까. 민 변호사 그 사람도 고모가 하도 난리를 쳐서 몇 번 손을 들라고 그랬대요. 너무 힘이 든답니다.”

  내 짐작이 맞았다. 결국은 스스로들 자초한 결과였다. 


  “이 사건 말이죠. 차라리 처음부터 진실을 말하고 피해자와 합의를 했으면 정상참작을 받아서 모두 좋은 결과를 맞이했을 텐데 그런 방향으로 변호사가 제안을 하지 않았어요?”

  기록을 읽어본 변호사라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며 물었다.


  “고모를 처음 맡았던 변호사가 그렇게 제의했다가 단칼에 잘렸어요. 고모는 무죄가 나와야지 그렇게는 안 된다는 거죠.”

  장부인 그녀는 세상을 너무 깔보는 것 같았다.


  “참 그 변호사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간다고 합디까?”

  내가 그들의 전략을 궁금해 하며 물었다.


  “죽은 여대생의 팔뼈가 부러진 걸로 봐서 이 사건은 고의적인 살인이 아니라 우발적이라는 심증이 간대요. 그런 사건인데 검찰이나 경찰의 회유로 내가 고모 쪽을 걸고넘어진 거라는 얘기죠. 자기는 그렇게 믿고 싶고 실추된 회장님 집안의 명예를 바로 잡아 드리고 싶다고 했어요.”

  그것도 회장부인의 희망사항일 것이다. 부자들에게 세상은 한판의 연극인지도 모른다. 김용국은 이제부터 꾸며지는  무대에서 또 다른 삐에로가 될 것이다. 나의 역할은 끝이 났다. 그 며칠 후 아침신문에 조그만 보도가 나왔다. 민사법원은 회장측이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 정의택에게 위자료로 6억5천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선고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 이 나라의 마지막 양심의 보루는 판사들이었다.


  유난히 폭설이 내리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창 밖으로 보이는 법원의 계수나무 가지에 난 작은 이파리가 연두색물감을 풀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김용국의 처로부터 핸드폰이 왔다.


  “변호사님 남편이 급히 접견을 와 달라는데요.”

  김용국의 처가 숨넘어가는 어조로 말했다. 사실 그 전에도 몇 번 그런 일이 있었다. 가보면 아무 일도 아니었다.


  “또 ‘늑대와 소년’에서 나오는 거짓말을 들을라구요? 이제는 더 이상 안 속겠습니다.”

  내가 솔직하게 대답하며 거절했다.


  “이번에는 아닌 것 같아요. 제가 면회 가서 또 변호사님을 보기위해 별 일 없으면서 가벼운 거짓말 하면 안 된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정말 아니랬어요.”

  이틀 후 나는 구치소로 가서 김용국을 만났다.


  “제 나름대로 풀건 풀고 가기로 했어요. 내가 여태까지와는 다른 말을 해도 변호사님 도와주실 거죠?”

  그가 먼저 다짐하면서 물었다. 그는 폭탄선언이라도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들어보고 진실이면 돕겠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가 내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실은 회장부인이 여대생을 죽이라고 한 적이 없었어요. 마기룡과 둘이서 미행을 하는데 하루는 기룡이가 이렇게 힘들게 미행하지 말고 아예 잡아서 발가벗기고 비디오를 찍어 인터넷에 올리면 어떻겠느냐는 거예요. 그게 먹히지 않으면 그때 가서 약물을 쓰자는 거예요. 사채꾼들은 겁을 주는 방법으로 사람을 납치한 후에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독이 든 주사를 고양이한테 놔요. 고양이가 바로 뒤집어 지면서 즉사하는 걸 보게 하면서 그 사람에게 주사를 놓으려고 하면 기겁을 해서 대개 시키는 대로 다 한다는 거죠. 여대생에게도 그렇게 하려고 했어요. 사실은 기룡이가 청산가리를 항상 가지고 다녔거든요.”

  나는 불쾌감이 치솟고 있었다. 그 내용이 그동안 회장 측에서 구상한 시나리오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이제 나까지 연극에 몰래 동원하려는 것 같았다. 난 그냥 속아주면서 더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면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여대생을 죽이기 전 마지막 장면을 한번 얘기해 봐요. 법정에서 말한 거 엉터리죠?”

  내가 따지듯 물었다. 그는 사실과 거짓을 적당히 조합해서 말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사실의 편린만을 추출해 재조립하면 숨겨졌던 진실을 엿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말이 내게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활기차게 또 다른 사실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가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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