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의 품 속에서 한참을 울던 안나가 이제야 감정을 좀 추스렸는지 눈물을 닦아 냈다.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크리스토프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안나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하는 소리였다. 어떻게든 안나를 달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안해요, 안나. 요즘 우리 만남도 뜸해지고, 또 얼마 전에 스벤을 떠나보내서 제가 좀 예민해졌나봐요."
"아ㅡ, 아니에요.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생각해요."
안나가 말을 이었다.
"전 다만, 크리스토프가 내 얘기를 전혀 들어주지 않으려고 했다는 게 그저...."
안나가 다시 슬쩍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프는 어쩔줄 몰라하며 눈앞의 공주를 달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스벤도 잃었는데 사랑하는 이까지 잃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저, 안나? 그런데 방금 그 왕자라는 사람은 왜 여기 아렌델로 온 거죠?"
크리스토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안나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저 카이와 함께 산책을 하다가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필립을 데려온 것이었기 때문에.
"음...그게..."
안나가 설명을 하려던 찰나, 왕자를 숙소로 안내해 주고 돌아온 카이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 카이가 설명해 줄 수 있나요? 저 사람이 왜 여기로 왔는지...."
카이는 한쪽 손에 물에 푹 젖은 서신 한 조각을 들고 있었다. 잉크가 엄청나게 번졌지만 서신의 대략적인 뜻은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친애하는 아렌델의 여왕님께...'라고 편지의 서두는 전하고 있었다.
"왕자의 품 속에서 나왔습니다."
카이가 말했다.
"위즐턴 쪽에서 우리 아렌델로 5번씩이나 국교 재개를 요청하는 사절단을 파견했지만 성과가 없자, 왕자를 직접 보냈더군요. 어지간히 다급했던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해상에 비가 쏟아지지 않았습니까? 기한을 맞추려고 무리하게 그곳을 돌파하다가 사고를 당한 것 같더군요."
안나는 서신을 읽어내려갔다. 평소 위즐턴 문자 공부를 소홀히 해서 그런지 깔끔하게 번역되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는 한 가장 정중한 어조로 장문의 사과문과 요청글을 정성스럽게 쓰여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서신을 왜 우리에게 전한 거죠? 왕자분께서 언니한테 직접 드려야...."
"여, 여왕님 아까 모습 못 보셨습니까? 왕자를 거의 죽일 뻔했어요. 제가 중간에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왕자는 아마 지금쯤 이 방에 영원히 얼어 있겠죠."
카이가 말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여왕님께는 위즐턴에 대한 깊은 불신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왕자를 직접 대면하게 된다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르실지 모릅니다. 제가 내일 오전쯤 여왕님께 직접 전달할 생각입니다."
"안 돼죠!"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안나. 의외의 반응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 카이와 크리스토프.
"그런 중요한 얘기는 직접 전하는 게 옳은 거죠."
"하, 하지만 공주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여왕님께서 위즐턴 사람을 보셨을 때를..."
"제가 언니를 설득해 볼게요."
안나는 진지했다.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일이 얼마나 나쁜 일인데요!"
안나의 말에 찔려서인지 잠시 움찔하는 크리스토프. 카이는 더 이상 만류하는 일이 소용없음을 느낀 후 안나의 말을 따르기로 한다.
*
"지원 병과는?"
"보병이오."
"어느 소속으로?"
"석궁."
서던제도 항구에서 입대 절차를 밟는 두 남자.
"그...잠깐만, 두 분 이름이 뭐라고 했소?"
"뢰메르(Romer)."
"요르겐(Jorgen)."
수염이 없는 남자와 있는 남자가 차례로 대답했다. 서류에 서명을 한 병사는 손가락으로 다음 입영 절차를 밟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위즐턴 출신이구만. 자, 저쪽으로 가면 석궁을 지급하고 있을 거요. 위즐턴 것하고는 조금 다르겠지만 거의 비슷할 거요."
*
서던 제도의 지하 감옥. 한스의 반란으로 졸지에 죄수 신세가 된 왕족들과 국왕 부부가 수감되어 있는 곳이다. 열두 왕자와 국왕 부부는 모두 각자의 독방에 갇혀 있는 상황. 한스의 병사에게 뒷통수를 둔기로 얻어맞고 정신을 잃었던 다섯째 왕자 프레드릭이 정신이 들었는지 눈을 뜬다. 여전히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프다.
"여봐라!"
소리치는 왕자, 그의 목소리는 감옥 안에서 메아리치기만 할 뿐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절망적으로 외치며 창살을 신경질적으로 흔들어대는 프레드릭. 요란한 쇳소리만 울릴 뿐, 당연히 쇠창살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한참을 그러다가 다시 엄습해 오는 두통에 프레드릭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거꾸러진다.
"제, 젠장... 한스 이놈,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던 거지..."
프레드릭은 치가 떨렸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한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스를 투명 인간 취급했다던 몇몇 형제들을 주도하던 사람도 바로 다섯째 왕자 프레드릭이었다. 그토록 업신여겨왔던 한스놈에게 서던 제도의 수도가 떨어졌고, 자신은 놈의 말단 병사에게 얻어맞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수치심을 이길 수 없었던 프레드릭은 바닥을 주먹으로 쾅 하고 내리친다. 한동안 쓰이지 않았던 감옥이었는지, 두껍게 쌓인 먼지가 풀풀 날렸다. 그 때, 먼지가 걷어지면서 바닥에 있던 무언가가 슬쩍 드러났다.
"이, 이건..."
몇 년 전, 지하 2층 5-5번 독방에서 연쇄 살인범이 탈옥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살인범은 이내 다시 잡혀 즉결 처형을 당했지만, 그가 탈옥하는 과정에서 뚫었다고 한 땅굴의 구조와 위치는 며칠간의 수색에도 발견되지 않아, 5번 독방은 사용을 금지하고 영원히 폐쇄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졌다.
그 죄수의 특이한 점이라면, 배급받은 담배로 감옥 바닥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는 것. 프레드릭은 바닥의 먼지를 스윽 닦아 보았다. 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불에 의한 그을음이라는 것. 그는 알 수 있었다. 바로 이 방이 얘기로 전해져 내려오던 5번째 방이라는 것을.
"하, 하지만.. 여기는 분명히 폐쇄했다고 들었는데..."
왜 쓰이지 않는 독방에 자신이 들어오게 되었는지 프레드릭은 궁금했지만 지금 중요한 사실은, 이 방과 바깥으로 통하는,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땅굴이 있다는 것이었다. 서던 제도 수사국이 한참 동안 수색했음에도 찾지 못했다는 그 탈출구를, 그는 지금 반드시 찾아야만 했다.
*
아렌델 왕궁 인근 해안가. 위즐턴 선원들이 왕자의 흔적을 쫓고 있다.
"물에 빠져서 돌아가신 게 아니라면.. 이런 곳에 계실 거야...."
"돌아가셨다면요?"
"이 멍청아! 만약 필립 왕자님에 물에 빠져서 죽기라도 하셨으면, 우리는 영원히 위즐턴으로 못 돌아가지!"
마치 모래밭에서 겨자씨를 찾는 심정으로, 위즐턴 선원들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왕자를 목숨 걸고 수색하고 있었다.
"선장님, 혹시 왕자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혼자서라도 아렌델 왕궁으로 찾아가셨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항해사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선장은 잠시 멈칫하더니 선원들을 향해 외친다.
"나하고 항해사는 왕궁에 다녀올 테니 제군들은 이곳에서 왕자님의 행방을 계속 찾도록!"
*
왕자가 얼떨결에 아렌델 궁성으로 들어오게 된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안나의 강력한 주장으로 서신은 다시 필립의 손으로 돌아갔고, 그가 직접 그의 손으로 여왕에게 서신을 전해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필립도 카이처럼 자신은 결코 엘사 여왕의 눈앞에 갈 수 없다고 버텼지만, 안나와 크리스토프의 긴 설득 끝에 필립은 그들의 말을 따르기로 한다.
"잠시만요!"
의관을 정제하고 여왕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필립을, 안나가 잠시 가로막았다. 안나는 턱을 손으로 받친 후 필립의 외관을 쓱 훑은 후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그의 왼쪽 가슴쪽에 달린 위즐턴 문양이 새겨진 배지를 떼어낸다.
"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떼어 버리는 게 낫겠어요."
안나가 말을 잇는다.
"혹시 알아요? 언니가 또 위즐타운 문양을 보고 희안한 일을 벌일지... 헤헤."
"위즐턴이래두요!"
*
세 차례 노크 소리 이후, 엘사의 집무실 문이 천천히 열린다. 평온하게 앉아 있는 엘사는 먼저 문 안으로 들어온 안나를 반갑게 맞았다.
"고마워, 언니. 거기? 이제 들어오셔도 돼요."
뒤이어서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방 안쪽으로 들어오는 필립.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엘사는 반사적으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살짝 뒷걸음질친다. 그리고 바로 필립의 왼쪽 가슴쪽에 있는 위즐턴 문양을 확인한다... 그런데 다행히,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흠흠.. 어제의 무례는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위..........의 왕자라 그러셨죠?"
애써 태연한 척 하는 엘사. 그런데 한쪽 손으로 짚고 있는 책상이 천천히 얼어붙기 시작한다. 화들짝 놀라는 필립의 반응을 확인한 엘사는 황급히 장갑을 낀다.
"2년 전의 일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 진심으로 사과드리고자 찾아 왔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여는 필립. 젖고 구겨진 서신 대신 새 종이에 다시 깔끔하게 옮겨 쓴 서신이 엘사의 손에 전달된다. 엘사는 잠시 망설이더니, 처음으로 위즐턴에서 온 서신을 펼친다. '친애하는 아렌델의 여왕님께....' 서신은 꽤 장문이었다. 마지막 줄에는 위즐턴 국왕의 서명이 날인되어 있었다.
서신의 진심어린 사과문과 왕자의 정중한 태도에 엘사는 잠시 긴장이 풀린다. 손끝에서 느껴지던 냉기도 이제는 조절할 수 있는 수준까지 약해졌다. 다시 장갑을 벗은 후 엘사는 왕자에게 말했다.
"귀국의 입장은 잘 알겠습니다. 다만, 단절되었던 국교를 다시 재개해 달라는 요구 사항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의가 필요한 사항입니다."
분명 거절의 말이었지만, 의외로 따뜻하게 나오는 엘사의 모습에 왕자는 일단 한시름 놓은듯 길게 숨을 뽑았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이었다. 자신이 받아서 돌아가야 하는 대답은 NO가 아니라 YES였다. 안나 역시 엘사에게 눈빛과 손짓으로 뭐라뭐라 신호를 보냈지만, 엘사는 못 본체했다.
"현재 위즐턴과 아렌델 모두 경제 위기에 처해 있지 않습니까."
필립이 살짝 언성을 올려 엘사에게 말했다. 표정에도 약간의 자신감이 돌아온 듯 했다. 그렇지, 바로 그렇게 나가야 하는거야! 안나가 생각했다.
"계속된 단교는 두 나라에게 모두 손해를 입힐 것이고, 나중에는 모두 서던 제도같은 외세에게 당할 수도 있습니다."
"서던 제도는 결코 우리 아렌델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받아치는 엘사. 잘 나가던 필립의 기세가 다시 꺾인다.
"위........의 입장은 잘 알겠지만, 그것과 우리 아렌델이 다시 국교를 열고 말고는 따로 생각해야 할 문제인 것 같군요."
"언니!"
"됐어, 안나. 둘 다 이만 나가 주시겠어요? 곧 조회를 준비해야 하거든요."
단호하게 끊어서 말하는 엘사. 여왕 폐하, 이 사안은 감성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필립이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안나와 필립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께를 축 늘어뜨린 채 집무실 문을 다시 열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
"먼젓번에 서던 제도로 간 사절단 말인데, 왜 아직도 안 돌아오고 있는 걸까요?"
"글쎄, 서던 제도 국왕이 너무 융숭히 대접하는 바람에 정이라도 든 건가? 하하."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엘사가 파견한 아렌델 후속 사절단은 서던 제도로 향하는 항해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사이에, 길이 엇갈려서 그들이 먼저 아렌델에 도착했을수도 있지 않습니까?"
선원 하나가 물었다.
"그럴 리가 없지. 서던 제도-아렌델간 바닷길은 여기밖에 없는걸?"
그 때, 망루 위에 올라가 전방을 살피던 선원 하나가 외쳤다.
"전방에 배가 보입니다!"
"아, 전에 파견되었던 사절단 일행인가?"
"아닙니다, 한 척이 아니고 여러 척입니다!"
여러 척이라고? 일전에 파견되었던 아렌델 사절단은 한 척의 배에 모두 타서 갔다. 그렇다면 이쪽 바닷길을 이용하는 나라는 서던 제도밖에 없는데, 서던아일에서 아렌델로 다수의 배를 보낼 만한 일이 있었던가?
"그런데...심상치가 않은데요? 배 위에 병사들이.. 그리고 대포들이 잔뜩...."
선원이 배들을 확인하고 쌍안경을 쓰더니 한 말이다.
"선장님? 선장님! 당장 뱃머리를 돌리십시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놈들, 대포 격실에 포탄을 장전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발포하려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
"빨리요! 시간이 없습니다. 저놈들은 전부 서던 제도 군함들입니다. 아마도.... 아렌델을 치려는 모양입니다!"
우레같은 소리가 몇 차례 울리더니, 잠시 후 공중에서 시커먼 철환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포탄들은 배의 갑판과 선실에 수직으로 메다꽂히며 엄청난 굉음을 내면서 커다란 구멍을 뚫는다.
"젠장, 이게 무슨 일이야! .... 먼저 간 사절단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끝입니다, 배가 ... 배가 가라앉고 있습니다.."
최후를 직감한 선원들, 선장을 중심으로 스크럼을 짠다. 둥그렇게 둘러 선 그들은 한가운데에 크로커스 문양이 새겨진 아렌델 국기를 둔다. 모두들 초연하게 고개를 숙인 후, 선원과 사절단 일동은 한 목소리로 나즈막히 말한다.
"먼저 가서 죄송합니다, 여왕님."
다시 한 차례 포성이 들리더니, 선원들이 둘러 앉은 곳으로 포탄들이 날아든다. 선원들은 모두 두 눈을 질끈 감는다. 그리고 다시 한 목소리로 똑같은 구절을 읊는다.
"Árnadalr alltid."
https://gall.dcinside.com/frozen/1562030 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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Árnadalr alltid 아렌델이여 영원하라
노르웨이어 번역기 돌린거라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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