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아암..."
늦은 오후의 샬레 사무실. 당번 학생도 돌려보낸 이후라, 선생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요즘따라 왜 이리 기운이 없지... 더위 때문인가..."
선생은 기지개를 켜며 에어컨의 온도를 낮췄다. 최근 D.U 시내에 폭염경보가 뜨는 날이 빈번했기에, 에어컨이 없으면 그대로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이럴 때 시원~하게 바다라도 가면 좋겠는데..."
선생은 의자에 눕다시피 기대어 바다의 모습을 상상했다. 파도가 철썩이는 모래사장, 빙수나 메론소다를 파는 바다의 집, 그리고...
"... 읏! 빠, 빨리 업무 끝내야지! 집중해야..."
지난번에 하나코가 보냈던 반쯤 벗겨진 수영복 사진이 생각나, 선생은 자기 뺨을 때린 후 모니터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후우... 이 정도면 얼추 끝났고..."
업무를 마친 선생은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번 학생들과 졸업생들의 적극적인 도움 덕분에, 선생에겐 예전과 달리 저녁이 있는 삶이 보장되었다.
"가방 다 쌌고, 다 먹은 도시락도 챙겼고... 완벽해!"
"그렇다면 죄송하게 됐군요, 완벽한 퇴근을 방해해서."
"으엑! 뭐야, 린 쨩?"
물론, 돌발상황이 없을 때의 이야기였다.
"뭡니까, 귀신이라도 본 것마냥. 그리고 린 쨩이라고 부르지 마십쇼, 결혼도 하셨으면서."
"그거랑은 상관없잖아? 그나저나 이 시간에 무슨 일이라도..."
"아, 별건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서류가 올라와서요."
총학생회 담당 고문, 나나가미 린은 들고온 서류를 선생에게 넘겨주었다.
"'아비도스 고등학교 체육부 하계 합숙훈련'? 이게 왜?"
아비도스의 문양이 큼직하게 찍혀있는 표지와, 한쪽 구석에 있는 대책위원회 담당 고문 타카나시 호시노의 서명. 위조 문서일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먼저 읽어봤습니다만, 아무래도 아비도스는 합숙 훈련의 감독으로서 선생님을 고용하고 싶은 모양이더군요."
"나더러? 내가 운동부족인 걸 호시노가 모를 리 없는데?"
"그렇긴 합니다만..."
거기선 부정해주면 안될까. 선생은 잠시 야속함을 느꼈지만, 린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선생님은 직접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하기보단, 해당 동아리의 고문들을 제어하달라는 뜻 아닐까... 라고, 저는 판단했습니다."
"체육부 고문? 그거라면... 아."
선생은 잠깐 생각하다, 린의 말에 납득했다. 분명 '그 아이들'이라면 말썽을 일으킬지도 모르니까.
"뭐, 대충 알겠어. 서류 내용도 찬찬히 읽어보면서 판단을... 음?"
"왜 그러십니까, 선생님?"
혹시 서류에 문제가 있나 긴장한 린이었지만, 선생은 흐뭇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호시노... 욘석, 이렇게까지 배려해줄 줄은 몰랐는데?"
"부릉! 부르릉!"
울퉁불퉁한 비탈길을 따라 주행 중인 검은색 밴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전력으로 달렸다. 그리고 그 운전석에는 하나로 묶은 익숙한 분홍빛 머리칼이 나부끼고 있었다.
"이야~, 선생님이 부탁을 들어줘서 살았어! 이 아저씨, 꽤나 걱정했다고?"
"이 정도 가지고 뭘, 어려운 일도 아닌데.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선생은 고개를 돌려 뒷좌석을 보았다. 하나코와 딸은, 서로 어깨를 기대고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가족들도 데려올 수 있게 배려해줘서 고마워. 분명,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을거야."
"뭐, 아저씨가 부탁하는 입장이니까 그 정도는 해줘야지~. 사이드킥을 무시할 순 없잖아?"
호시노는 조수석을 슬쩍 바라보며 윙크하였고, 선생은 엄지를 들어올려 거기에 화답하였다.
"거의 다 왔으니까, 슬슬 깨우는 게 어때? 멋진 해안이 펼쳐 있는데 안 보면 실례잖아?"
"하긴 그런가? 다들, 일어나봐! 도착했다고?"
"으음, 어라...? 어머, 죄송해요 호시노 씨. 깜빡 잠들었네요."
"으응...? 어, 우와아~! 바다다!"
선생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난 소녀는,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에 감탄을 내뱉었다. 하얗게 빛나는 모래사장과 그 너머로 반짝이는 너른 대양, 그야말로 여름의 정수였다.
"굉장하다~, TV에서 보던 것보다 더 예뻐! 있지있지, 저기서 물놀이도 하고 모래성도 만들자! 그리고..."
"네네, 우리 딸. 그래도 아직 차 안이니까 너무 움직이면 안돼요?"
잔뜩 흥분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하나코의 모습을, 선생과 호시노는 백미러로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럼, 짐은 저희가 방까지 옮겨드리겠습니다."
"어~, 그래. 수고해~."
리조트의 벨보이 안드로이드에게 선생 가족의 짐을 맡긴 후, 호시노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그럼 선생님, 이틀 뒤에 보자고? 아저씨는 귀여운 후배들과 해결할 업무가 남아서 말이야~."
"고마워, 호시노. 중간중간 연락할게."
"조심히 들어가세요, 호시노 씨."
"감사합니다~, 빠빠이!"
호시노의 밴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세 사람은 손을 흔들었다. 이후 선생 가족은 카운터의 안내에 따라 객실로 향했다.
"우와... 이건 솔직하게 감탄밖에 안 나오는데요?"
"바다, 바다! 바다가 엄청 잘 보여!"
그들이 투숙하게 된 객실은 테라스로 오션 뷰가 펼쳐진 스위트룸. 깔끔히 정돈된 고급 침구류와, 테이블의 웰컴 드링크를 비롯한 각종 음료와 주류는 척 보기에도 귀한 손님을 위한 곳임을 알 수 있었다.
"호시노 씨, 이 정도로까지 신경을 쓰셨을 줄은 몰랐네요..."
"예전에 이 리조트와 관련해서 일이 좀 있었거든. 나름 정이 많이 든 곳이라, 아비도스의 재정이 회복되고 나서 직접 매입했다더라고."
대답하는 선생은 테이블의 웰컴 드링크를 하나 집어올렸다. 산뜻한 민트 향이 감도는 레몬에이드는, 선생의 메마른 목을 축여주었다.
"나중에 트리니티산 홍차 잎이라도 좀 보내드려야겠네요, 그나저나..."
하나코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이 향한 곳은...
"어? 어딨지?"
옷가방을 마구 뒤지는 소녀의 뒤통수였다.
"우리 딸, 뭐해요?"
"수영복을 못 찾겠어! 분명 여기 있을텐데?"
"자, 잠깐만요! 그렇게 막 어지르면 안돼요!"
소녀는 가방에서 옷가지들을 꺼내 아무렇게나 던지고 있었다. 그중에는 하나코 본인의 속옷 등도 있어, 그녀는 황급히 소녀를 말렸다.
"자자, 엄마가 찾아줄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하, 하지만... 진짜 없는데..."
소녀의 손을 꼭 잡고, 하나코는 옷가방 앞에 앉아 침착하게 가방 안을 살펴보았다.
"여보, 지금은 옷이 뒤섞여서 찾기 힘들 수도 있으니까 천천히..."
"짠~, 이거 맞죠?"
"어? 응! 그때 산 수영복이다!"
"... 어라."
순식간에 수영복을 찾아낸 하나코를 보며, 선생은 어렸을 적 본인의 옷을 누구보다 잘 찾던 어머니의 모습을 겹쳐보았다.
"그럼 엄마아빠, 나 갈아입고 올게!"
"어어, 그래그래. 다치니까 뛰지 말고!"
옷을 갈아입으러 소녀가 방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선생은 핸드폰을 꺼내 모모톡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아직 읽지 않은 메시지가 몇 개 떠 있었다.
[응, 곧 훈련을 시작할거야.]
[선생도 준비되는대로 해변으로 나와줘.]
[기왕이면 아이도 데리고 와. 보고 싶어하는 후배들이 많아서.]
"우리도 슬슬 나가봐야겠네. 준비할까, 여보?"
"후훗, 네. 당신 옷도 꺼내놨어요."
모모톡으로 재촉 아닌 재촉을 본 선생은, 곧 바다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그래서, 일단 나오긴 했는데..."
수영용 팬츠와 하와이안 셔츠를 걸치고 모래사장에 나온 선생은,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더워 죽겠네... 역시 이런 날엔 에어컨 빵빵하게 틀고 숙소에서 쉬는 게..."
"어머, 벌써부터 그런 약한 소리하면 어떡해요? 여기까지 데려온 건 당신이잖아요?"
더위에 징징대는 선생을 다그친 것은 뒤따라온 하나코였다.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슥 고개를 돌린 선생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라? 왜 그런 눈으로... 후훗, 설마 아내한테 반해버린 건가요?"
"... 어.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잘 어울려."
"어, 엣? 아니, 그건..."
의외의 상황에 부끄러워하는 하나코였지만, 선생의 반응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왼쪽 가슴에 금빛 하트 무늬 자수가 새겨진 검은 비키니와 그 위에 걸친 얇은 하얀색 셔츠, 그리고 햇빛을 가리기 위해 눌러쓴 밀짚모자는 학생 시절에 입던 수영복과는 또 다른 미를 뽐내고 있었다.
"고, 고마워요... 여보."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선생의 눈을 피하는 하나코는, 처녀 시절만큼이나 수줍음을 느끼는 듯했다. 그리고...
"엄마! 아빠! 같이 가!"
"아, 어어! 어이구 욘석, 수영복 잘 어울리네?"
하나코의 뒤로 아장아장 뛰어오는 소녀를, 선생이 다가가 안아올렸다. 프릴이 잔뜩 달린 하얀 원피스 수영복과 하니와 씨 모양의 튜브는, 소녀의 귀여움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에헤헤, 다행이다. 빨리 아비도스 언니들도 보고 싶어!"
"아마 조금만 더 가면 있을거야. 분명 여기 어디쯤에... 아! 저긴가?"
선생이 가리킨 쪽에는, 열 명 남짓의 학생이 준비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학생들을 통솔하는 '두 명의' 늑대도 보였다.
"응, 마지막 구호를 말하면 두 배로 늘어날거야."
"응, 집중하도록... 어? 선생님!"
체조 동작을 지도하던 시로코들은, 멀리서 다가오는 선생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는 그쪽으로 돌아보았다. 아비도스 고교의 경영 수영복은, 두 사람의 은빛 머리칼과 육감적인 몸에 잘 어울렸다.
"다들 안녕~! 더운데도 열심이네?"
"와줬구나, 선생님. 오랜만이네."
"그리고 그쪽은, 분명 선생님의 아내... 였던가?"
두 명의 시로코는 선생님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하나코에게 흥미를 보였다. 질투나 시기보다는, 순수한 호기심에 가까웠다.
"저... 두 분? 뭔가 가까운데요?"
물론, 하나코에겐 그런 관심이 꽤나 부담스러웠다. 왠지 냄새를 맡아지는 느낌이 들어, 하나코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만나서 반가워, 아비도스 체육부의 담당 고문인 스나오오카미 시로코야."
"응, 마찬가지로 고문인 스나오오카미... 쿠로코야. 너희들, 체조 멈추고 와서 인사해."
"안녕하세요, 샬레의 선생님!!"
체육부 학생들이 동시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 마치 조폭 영화의 한 장면 같아, 선생은 난처함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안해도, 충분히 반가움이 전해지는데...
"자, 자자! 다들 고개 들고... 고문 선생님들한테 이야기는 들었지? 이번 합숙 훈련의 감독역을 맡게 된 샬레의 선생이야. 감독이라곤 해도 훈련에 깊게 개입하진 않을 거니까, 나보단 고문 선생님들 지시에 따라줬으면 해. 다들 할 수 있지?"
"네~!"
쾌활하게 대답한 학생들은 준비운동을 마저 하기 위해 자리로 돌아갔다. 두 명의 담당 고문은 학생들 앞에 서서 남은 체조 동작을 지도하였다.
그런 모습을 보니, 선생은 왠지 감격이 벅차올랐다.
"어라, 당신 울어요?"
"어? 아니, 그럴리가. 그냥... 꽤나 말썽꾸러기였던 아이였는데,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되어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게..."
선생은 괜히 하나코의 눈을 피하며 코를 쓱 비볐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응, 선생님이 우리의 나이스 바디를 보고 감동받았어."
"응, 아내분 긴장해야 해."
"... 너네 둘 다 나 좀 볼까?"
물론, 내용물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차이는 없는 모양이었다.
"응... 다들 늦어서 미안."
선생에게 설교를 듣고난 후, 늑대들은 다시 학생 앞에 섰다.
"일단 우리의 목표가 뭔지부터 말해볼까. 주장?"
"아, 넵! 곧 있을 오아시스배 철인 3종 경기에서 우승하기 위함입니다!"
각이 바로 잡힌 학생이 손을 들며 큰 시로코에게 대답했다. 이에 만족한 작은 시로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그거야. 그래서 첫날이라고 봐주기 없이, 오늘부터 바로 실전 훈련에 나설 거야."
학생들의 침묵에선 긴장감이 흘렀다. 침 삼키는 소리마저 요란하게 울릴 정도였다.
"우선..."
큰 시로코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학생들이 뒤돌아 그 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거기에는 오직 수평선이었다.
"어라? 선생님, 저게 왜..."
"아! 설마, 저 수평선 너머까지 갈 수 있을 정도로 빡세게 훈련하자, 그런거죠!"
"맞네맞네!"
학생들은 의욕이 넘쳤지만, 큰 시로코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런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작은 시로코가 귀띔해주었다.
"... 응, 잘못 가리켰어."
"어, 진짜네."
큰 시로코는 손가락을 살짝 왼쪽으로 가리켰다. 거기에는 저 멀리 섬 하나가 보였다.
"어? 섬? 에이, 설마..."
"응, 오늘 안에 저 섬까지 찍고 올거야. 저녁 전에 못 들어오면 밥은 없어."
"네에에에엣!?"
"잠깐, 뭐?"
담당 고문의 충격적인 발언에 학생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리고 그것은 선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멈춰, 시로코! 그게 정말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응, 그 정도도 못하면 이번 대회에서 우승할 수 없어."
"응, 나약한 녀석은 살아남지 못해."
고집센 그녀들을 설득하기 위해, 선생은 진땀을 빼야했다. 이 아이들의 브레이크를 위해 호시노가 부른 거구나, 하고 선생은 깨달았다.
"엄마, 나 아빠가 저렇게 힘들어하는 거 처음 봐."
"아, 사실 엄마는 꽤 자주 보긴 했지만..."
선생과 늑대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에서, 하나코가 자신의 '산책'을 말리던 선생의 모습을 겹쳐본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자, 그래서 오늘은 자유롭게 바다를 즐기며 수영 연습을 했으면 해. 불만 없지?"
두 늑대를 겨우 진정시킨 선생은, 결국 학생들에게 자유 시간을 주기로 하였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선 제대로 된 훈련이 이루어질 수 없으리란 판단이었다.
"네~! 그럼 나 먼저 들어가야지!"
"아앗! 치사하긴!"
경영 수영복을 입은 학생들은 서로 앞다투어 바다로 뛰어들었다. 역시 에너지가 넘치는구나, 선생은 감탄했다.
"있지, 아빠!"
"응? 왜 그래, 우리 딸?"
"우리도, 우리도 빨리 들어가자! 응?"
겨우 안심한 선생에게, 소녀가 다가와 선생의 손을 잡았다. 그 기대에 찬 눈빛은 어서 바다에 들어가고 싶다는 걸 어필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갈까? 당신도 들어오지 그래?"
"어머, 그럼 사양 않고..."
세 사람은 함께 바닷물에 살짝 발을 담갔다. 햇빛에 데워져 미지근한듯 시원한 감촉은, 더위에 지친 이들에게 퍽 유쾌한 감각이었다.
"엄마, 이거 봐! 발가락 사이로 물이 빠지고 있어!"
"후후... 네, 신기하네요."
파도치며 밀려오는 바닷물을 보며 신기해하는 아이와, 그걸 지켜보는 엄마의 모습. 선생은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좀 더 깊은 물까지 들어가볼까? 튜브도 있으니까."
"응! 가보자!"
선생의 손을 잡고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가는 소녀. 튜브 때문에 뜬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건 조금 무서웠지만, 아빠의 커다란 손 덕분에 긴장이 풀렸다.
"아빠, 손... 놓으면 안돼?"
"글쎄, 어떠려나? 슈웅~!"
"우, 우와앗! 아빠, 진짜 하지 마!"
소녀의 튜브를 잡고 이리저리 끌고가는 선생. 어린아이에겐 제법 빠른 속도라서 소녀는 깜짝 놀랐지만, 곧 적응했는지 롤러코스터를 즐기듯 웃고 있었다.
"아하핫! 이거 엄청 빨라!"
"그래? 그럼 한 번 더~!"
"정말, 저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한 손을 뺨에 갖다대며, 하나코는 염려스럽게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즐거운 건 보기 좋지만, 위험한 장난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하나코의 소망이었다.
"사이가 좋아보이네, 다행이야."
"어라? 시로... 쿠로코 씨."
"편한대로 불러. 어차피 구면이잖아? 그 배에도 있었고..."
그런 하나코의 뒤에서, 어느샌가 큰 시로코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하나코가 본 그녀의 눈빛에는, 그리움인지 쓸쓸함인지 모를 감정이 담겨있었다.
"당신, 설마..."
"아, 오해는 하지 마.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으니까. 그 사람도 아마... 당신 가족이 슬퍼하는 걸 바라지 않을 거고."
지금은 아득한 기억이 된 그날, 하나코는 방주에 있었고 모든 진실을 들었다. 그렇기에 큰 시로코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아프게 와 닿았다.
아픔을 이겨냈지만 추억은 간직한 늑대의 눈동자는, 눈이 시리게 아름다웠다.
"저, 당신에겐 어떤 말을 해야될지 모르겠지만..."
"응, 그래서 말인데."
간단한 위로라도 전하려던 하나코의 말을 끊고, 큰 시로코는 제안했다.
"저 아이, 역시 아비도스로 보내주면 안될까? 나라면 저 아이의 또다른 엄마가 되어줄 수 있어."
"... 네?"
어이가 없는 제안에, 하나코는 표정을 감추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하나코는 그녀를 쳐다봤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요?"
"응, 엄마는 많을수록 좋아. 아비도스의 모두가 책임지고 기를게."
"무슨 강아지를 허락받으려는 아이도 아니고... 마음은 고맙지만 절대 안돼요."
최대한 점잖게 쏘아붙인 하나코는, 큰 시로코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 엄마, 뭐 해? 엄마도 아빠랑 같이 놀자!"
"비치볼 챙겨왔는데, 공놀이라도 할래? 재밌을 거라구?"
"아, 네! 금방 갈게요!"
그러나 아이와 남편이 부르는 목소리에, 하나코는 곧 화색을 띄며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큰 시로코는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 응, 역시 당신은 가족과 함께 있으면 돼.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젖은 몸을 이끌고 모래사장으로 나온 선생은, 소녀에게 비치볼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에잇! 어라, 또 이상한 데로 튀어버렸어..."
"아니아니, 그렇게 힘을 주면 날아가버린다니까."
선생은 소녀에게 나름대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려 했지만, 운동엔 영 소질이 없던 선생에겐 무리였다.
"하아, 이걸 어쩌면 좋담..."
"응, 내가 가르쳐줄게."
"어? 시로코?"
그런 선생을 도와주러 온 건 작은 시로코였다. 간단히 스트레칭을 한 후, 시로코는 소녀의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어라? 시로코 쌤?"
"응, 공을 머리 위에서 받을 땐 손을 삼각형 모양으로 만들어 봐. 이렇게..."
"아, 연금술 가면 드라이버처럼?"
"연금술...? 뭐, 좋을대로 이해하면 돼. 그리고..."
시로코는 소녀의 자세를 교정해주며, 공을 튀기고 받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러자...
"우와! 된다! 신기해!"
소녀는 거의 완벽한 자세로 공을 튕기고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선생을 만난 덕분이었다.
"응, 훌륭해. 이대로 열 번 정도 공을 튕기고 받아보자. 할 수 있지?"
"응!"
시로코는 흐뭇한 표정으로 소녀가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런 시로코를 자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더 있었다.
"아까도 느꼈지만... 좋은 선생님이 됐구나, 시로코."
"아, 선생님. 으응, 그 정도는 아냐. 아직 선생님에 비하면 부족한걸."
"겸손 떨지 않아도 돼. 내가 못하는 걸, 시로코는 해낼 수 있잖아?"
선생의 순수한 칭찬을 듣는 시로코는, 뺨이 꽤 붉어져 있었다. 모래사장이 반사하는 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 찰싹!
"어? 시로코, 왜 그래?"
"... 응, 나쁜 생각을 할 뻔했어."
정신을 다잡기 위해 자기 뺨을 때리는 시로코가, 선생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으읏, 차갑고 아파... 꼭 샤워해야 돼?"
"당연하지, 몸에 소금기가 잔뜩이니까."
바다에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 후, 해변의 샤워부스에서 작은 시로코는 소녀를 씻기고 있었다. 샤워기의 수압이 세서 소녀는 괴로웠지만, 시로코의 부드러운 손길로 씻겨준 덕에 금방 끝낼 수 있었다.
"응, 이제 잘 닦으면 돼. 수건 챙겨왔지?"
"응! 엄마가 챙겨줬어."
목욕바구니에서 수건을 꺼낸 소녀는, 머리에 수건을 대고 빠르게 흔들어댔다. 혹시 아빠를 따라하는건가, 시로코가 생각하고 있을 때.
"오~ 하늘이여~! 흔들리는~ 고동~!"
"푸흡!"
틀림없었다. 소녀는 선생의 습관을 따라하는 모양이었다.
"스타 칠드런~ 스카이... 어라? 시로코 쌤, 왜 그래?"
"아, 아냐 아무것도. 다른 사람들도 써야하니까, 어서 나가자."
"응!"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샤워 부스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얇은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와 아비도스 교복을 입은 시로코가 해변가를 걷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있지! 우리 매점 가서 바나나 우유 마시자! 아빠가 카드 줬어!"
"진짜? 그거 좋네, 나는 이온 음료... 근데 잠깐."
소녀의 말에서 위화감을 느낀 시로코는, 샤워 부스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보니 선생님은 어디 계시지? 분명 먼저 샤워 부스에 들어갔던 것 같은데..."
"시로코 쌤, 빨리! 놓고 가버릴거야!"
"아, 응. 같이 가자."
시로코는 의문을 명쾌히 해결하지 못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후우..."
수영 연습을 좀 더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샤워 부스에 도착한 큰 시로코. 그녀는 적당히 옷을 벗어 부스 한쪽에 걸어둔 후, 샤워기를 켜려고 했다.
그런데...
"킁, 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
시로코는 늑대 수인의 특성상 감각이 꽤 발달되어 있었다. 특히 후각과 청각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그런 그녀가 느낀 것은 샴푸 냄새와는 다른 달콤한 냄새, 그리고...
"읍! 읏! 흐으..."
뭔가로 입을 틀어막힌 듯한 신음소리. 이 모든 것이 바로 옆 칸에서 느껴졌다.
시로코는 뭔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옆 칸을 보았다. 그러고보니 부스의 벽을 따라 묘한 진동이 느껴지는듯도 했다.
"... 좋은 분위기를 망치기는 싫지만."
똑, 똑똑. 시로코는 부스의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어, 어? 누구세요?]
"선생님이지? 미안하지만, 샤워 부스는 여러 사람이 쓰는 곳이니까... 빠르게 끝내고 뒷처리도 깔끔하게 하는 편이 좋아."
[아... 어, 미안.]
[어, 흐에...? 아, 죄, 죄송해요, 시로코 씨!]
옆 칸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 역시 같이 있었구나, 시로코는 생각했다.
"정말이지, 민폐 커플이네... 그래도 뭐, 상관없나."
샤워를 마치고 나온 큰 시로코는, 탈의실에 앉아 두 사람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선생 부부는, 얼굴이 좀 붉어져 있었다.
"아, 나왔구나."
"그...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요?"
"글쎄, 샤워실에 들어간 순간부터?"
"어... 면목이 없네."
"괜찮아. 부부잖아? 아직 뜨거울 시기니까."
시로코는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을 해야 선생님이 마음을 놓겠지, 라는 마음으로 시로코는 최선을 다했다.
"그나저나 어서 가자, 곧 선생님 방으로 저녁 식사가 올거야. 다 식은 밥을 먹으면 손해잖아?"
"뭐, 그렇지. 어서 갈까?"
"아, 네..."
여전히 얼굴이 붉은 하나코는, 시로코와 눈도 못 마주치고 자기 락커로 뛰었다. 선생은 그런 하나코와 시로코를 번갈아가며 머리만 긁적일 뿐이었다.
"... 응, 진짜로 민폐니까 공공장소에서는 안 그러는 게 좋아, 선생님."
"죄송합니다..."
결국 선생은 시로코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행선지는 여긴가..."
한편, 밖에서는 누군가가 자신의 바이크를 세우고 해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오로라가 감도는 듯한 신비한 빛깔의 눈동자와 머리칼, 그리고 꽃이 장식된 날개는 그녀가 트리니티 출신임을 쉬이 짐작하게 해주었다.
"이곳에선 어떤 일이 있을까... 기대되는데."
해안을 따라 여행 중이던 시라스 아즈사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아비도스 리조트를 올려다보았다.
*****
꽤나 오랜만에 소설을 썼습니다.
쓰다보니 쓰고싶은 내용이 많아져서, 아마 2~3편으로 나누어 진행되지 않을까 싶네요.
댓글은 언제나 읽고 있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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