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가 되고 싶다’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표리일체
시이나: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오시미 씨의 만화를 읽어보고 3일 정도 오시미 씨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까 ‘독자와 주인공을 일체화한다라고 했는데, 만화 속에서도 ‘하나가 된다’는 게 오시미 씨의 테마라고 생각했습니다.
오시미: 맞아요. 하나가 되고 싶죠.
시이나: 하나가 되고 싶다,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어야만 이런 만화를 그릴 수 있을거에요. 마리의 자위 장면을 봤을 때는 '주인공이 뮤즈와 하나가 돼서 뮤즈와 섹스했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ㅡㅡ아까 말씀대로 주인공이 독자와 하나되는 것과 동시에 ‘주인공과 뮤즈가 하나 되는 순간’이기도 한거죠.
오시미: 다만, 뮤즈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기쁨도 있지만 결국 ’전부 자신’ 이라는 말이 되기도 하죠. 타인이 없어요. 주인공의 세계를 독자에게 주입하지만 말고, 타인을 그리고 싶었는데 타인을 찾을 수 없는 만화만 그렸어요. ‘해피니스’에서는 타인을 그려보려고 시도했는데 결국 못 그렸습니다.
시이나: 저는 오시미 씨가 철저하게 하나가 되는 것을 그리고 계신 게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오시미: 그거면 되는 걸까요.
시이나: 그대로 기관차처럼 달려가 주셨으면 합니다. 분명 오시미 씨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시미: 용기가 생겼습니다. (웃음)
시이나: 저에게는 ‘하나가 될 수 없다’라는 게 계속 있어요. 아마… ‘하나가 되고 싶다’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신경회로의 차이일 뿐 같다고 생각하지만요.
오시미: 표리일체이기도 하죠.
시이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시미: 아오노군과 유리양은 하나가 되고 싶어하잖아요. 엄청나게. 하지만 하나가 되는 것의 잔혹함을 시이나 씨는 반복해서 반복해서 그리죠.
시이나: 네. 오시미 씨도 하나가 되고 싶다는 것을 그리면서도 하나가 되는 것의 폭력성을 계속 그리고 있지요.
오시미: 그걸 자각하게 된 건 최근입니다. ‘피의 흔적’에서 어머니를 그리게 되고 자해행위로 하나가 되고 싶어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 너무 본질적인 이야기만 하나요? 그래도 재밌으니까 괜찮아요. (웃음) 제가 ‘아오노군’을 읽고 대단하다고 느낀 점은 만화 자체가 ‘하나의 인격’처럼 되어 있다는 점이에요. 이야기가 전부 유리 정신세계의 투영이라는 식으로도 읽을 수 있죠. 머릿 속이 이상하게 작용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 그게 무섭기도 하고 대단해요. 물론 유리 혹은 아오노 군에게 감정이입해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만 메타구조라고 할까요. 좀 더 큰 틀로 그려져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오늘 만나 뵙고 나니 아마 천재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웃음)
시이나: 천만의 말씀이세요!
오시미: ‘네 머리님’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유리 이외에도 유령이 보이는 인물이 나왔잖아요.
오시미: 유리의 세계뿐 아니라 더 넓고 본질적인 부분을 그리려 한다고 느껴졌습니다. 타인의, 여러가지 인간의 주관이 교차되는 식으로 그려져 있어요. 그건 제가 하려고 해 본 적이 없는 일이기 때문에…
시이나: 메타구조가 되거나 다른 사람을 그려 버리는 것은 역시 제가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오시미: 그렇군요….
시이나: 전 오시미 씨가 그리는 뮤즈를 너무 좋아해요. 엔터테인먼트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작품에서는 주로 뮤즈가 주인공에게 좋은 존재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지요. 하지만 오시미 씨의 경우는 주인공도 뮤즈로 그려져 있다고 생각해요.
오시미: 그러네요.
시이나: 처음에는 동경하는 뮤즈가 있고 모두가 편하게 소비하는 존재죠. 하지만 점점 주인공은 뮤즈들의 뮤즈로… 편하게 소비되어 버리는 존재로 그려져 가요. ‘악의 꽃’을 읽고 이런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거든요. 그 후에 그려진 게 ‘나는 마리 안에’의, 아까도 언급했던, 주인공이 뮤즈가 되어버린 자위 신이죠.
오시미: 엄청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시이나: 그 뮤즈의 정체에 더 다가간 것이 ‘해피니스’라고 생각하고… ‘해피니스’의 뮤즈는 노라겠죠.
ㅡㅡ ‘해피니스’는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수수께끼의 소녀 노라에게 습격당한 주인공 마코토가, 노라와 ‘똑같이’ 되고 괴로워하면서도 둘이서 살고자 합니다
시이나: 노라가 피를 빨아먹는 컷이 너무 좋아요. 최고입니다.
노라는 주인공을 ‘소비’했어요. 지금까지는 간접적으로 그려지다가 판타지 장르 만화가 되면서 직접적으로 그려지게 됐어요. 주인공은 노라에게 범해지고, 살해당하고… 그 뒤에 웃는 노라가 아름다워요. 이거 주인공 눈높이잖아요.
오시미: 네. 주인공의 시야입니다.
시이나: 이 만화보다 뮤즈의 정체가 더 드러난 것이 ‘피의 흔적’ 엄마인가 싶어요.
오시미: 전혀 자각하지 못했는데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해피니스’는 저도 왜 그리는지 모른 채로 그린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나머지 만화는 비교적 자각하고 주체적으로 그렸는데 ‘해피니스’는 그리면서 더듬어 간 것 같은 만화였습니다. 무의식의 산물이라고 할까요. 지금 듣고 보니 과연 그렇다고 생각되네요.
시이나: 주인공이 꾼 꿈 같아요.
오시미: 아, 그런 거 같아요.
시이나: ‘해피니스’는 폭력을 용서하고 싶은 이야기고, ‘피의 흔적’은 폭력을 용서하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오시미: 아직 용서할지 어떨지는 모르겠네요. 지금 제 감정은 ‘용서할 수 없다’라서 ‘용서 할 수 없다’는 내역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처음부터 쭉 설명하고 있는 단계죠. 다 설명하고 나서 용서 여부는 따로 결정된다는 느낌일까요.
시이나: 엄청 기대됩니다.
감동시킨다는 것은 마음 속에 온갖 기술을 동원하여 파고드는 것이다.
오시미: ‘아오노 군’은 어디까지 그릴 생각인가요 … 자신의 ‘본심’ 같은 마음 속 깊은 곳까지 그릴 생각인가 하고 읽고 있었습니다만.
시이나: 본심을 엔터테인먼트로 만들어 보여주고 싶어요.
오시미: 벌써 그렇게 됐어요. 어떻게 하면 시이나 씨처럼 본심을 엔터테인먼트로 그릴 수 있을까요.
시이나: 제가 왜 엔터테인먼트로 그리냐면 오시미 씨처럼 그리는 게 두렵기 때문이에요. 제가 그리는 방법은 음악이 가득 울리고, 컬러풀한 스포트라이트가 있는 무대 위에서, 옷을 벗으면서 본심을 말하는 것이에요 관객들은 왁자지껄 떠들고요. 그런 상태라면 제 마음은 상처받지 않아요. 하지만 오시미 씨가 그리는 방법은 학교의 전교 집회에서 모두가 교복을 입고 정렬하고 있는데 단상 위에서 옷을 벗고 본심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상처받지 않으세요? 무섭지 않나요?
오시미: …후후. 음악은 방해죠. 신나는 음악이 울리고 있다면 꺼줬으면 하겠네요.
시이나: 음악을 멈춰! 지금부터 본심을 이야기할 거야! 이런 느낌이죠. 그때 아찔한 공기가 흐르잖아요.
오시미: 저는 그 편이 더 기분 좋아요. 조용한 게 더 짜릿하지 않나요? 왜냐면 하면 안되는 장소에서 하면 안되는 일을 하는 거니까요.
시이나: 저는 무서워요. 그건 아마 타인과 하나 될 수 있는 사람의 발상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3일 동안 오시미 씨의 작품을 읽어서 큰일 났습니다.
오시미: 3일 동안 폭력을 휘두르는 셈이니까요.
시이나: 너덜너덜해졌어요. (웃음)
오시미: 그래도 ‘아오노 군’도 본심을 드러내고 있고 폭력의 일종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아오노 군’을 읽으면 너덜너덜해지니까요.
시이나: 만화가란 독자를 감동시키기 위해서 만화를 그리잖아요. 거기에는 폭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감동시킨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온갖 기술을 다 써서 파고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아무리 성실하게 해도 반드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될 거에요.
오시미: 엄청 상처를 주죠.
시이나: 상처 주는 걸 정당화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폭력을 휘두르고 있어요.
오시미: 휘두르고 싶네요….
시이나: 그래서 계속 그 방법을 생각해야 하는 것 같아요.
오시미: 성실하군요. 시이나 씨는 만화에서도 ‘남에게 상처 주고 있음을 직시하라’라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이나: 오시미 씨도 그렇지 않나요?
오시미: 저는 그렇게까지 상냥하지는 않아요. (웃음) 우선 자신을 알면 그걸로 됐다. 정도의 느낌이에요. 비교적 자신을 그대로 그려버려서 특히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일은 조심하고 있지만요.
시이나: 하지만 오시미 씨가 하는 일은 오시미 씨 자신도 상처받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오시미: 상처받고 있네요… 어떡해야 할까요?
시이나: 그래도 할 수 있는 정신력이 오시미 씨의 대단함이잖아요! 강한 분이라고 읽으면서 늘 생각하고 있었어요… 자신을 능욕하고 계신가요?
오시미: 최근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게 쾌감이구나. 같이.
시이나: 만화 안에서도 능욕당하고 있고… 능욕이 되게 큰 포인트군요,.
오시미: 네. 그렇습니다. (웃음)
시이나: ‘악의 꽃’에서 사에키에게 주인공이 능욕당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ㅡㅡ마음이 떠난 주인공 카스가를 되찾기 위해 사에키가 저항하는 카스가와 억지로 섹스하려는 장면입니다.
시이나: 남자가 여자에게 능욕당하는 게 이렇게 정확하게 그려져 있는 만화는 흔치 않아요. 저는 오시미 씨의 만화에서만 봤어요. 여자가 남자한테 능욕당한다고 하면 바로 알아주지만, 남자가 여자에게라고 하면 ‘아니, 아니. 그럴리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죠. 하지만 누구나 누군가에게 능욕당하거나 능욕하고 말아요. 이 능욕 장면은 괴롭기도 하지만 기분 좋은 거죠. 감각은 알고 있지만 아직 형태가 없는 것에 형태를 만들어주면 짜릿해져요. 이야기를 읽다가 ‘아! 그거 뭔지 알겠어!’ 같은 부분이 나오면 이해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 처럼요.
오시미: 감사합니다.
시이나: ‘악의 꽃’은 ‘능욕 삼각관계’라고 봐요. 주인공이 먼저 체육복을 훔쳐서 사에키를 능욕했죠. 다음으로 주인공을 나카무라가 능욕하고, 마지막으로 사에키가 주인공을 능욕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ㅡㅡ 나카무라가 주인공을 ‘능욕’했다는 건 주인공이 체육복을 훔친 걸 알고 어떤 ‘계약’을 맺은 뒤 도서실에서 교복을 벗기고 훔친 체육복을 입히는 걸 말하시는군요.
시이나: 여기서 나카무라가 하는 건 능욕이에요. 그러나 나카무라가 주인공을 능욕함으로써 주인공이 사에키한테 했던 능욕이 용서받는다고 할까요. 주인공이 나쁜 짓을 해서 ‘내가 이런 인간이었구나! 어떡하지!’라는 상태인데 ‘나도 마찬가지야. 자 봐.’라고 나카무라가 말해주는 상황이죠.
오시미: 상냥하네요. 나카무라는.
시이나: 그래서 나카무라는 ‘구원’이고 주인공에게의 ‘용서’. 반대로 사에키는 주인공에게 ‘내가 너를 용서할거니까 너도 나를 용서해’라고 하죠. 그러나 그건 주인공을 소비하는 게 되어버려요. 그렇게 셋이 하나가 되어간다고 할까… 모두 똑같고 모두 능욕하고 있어요. 어처구니없는 삼각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오시미: 자신을 위해서 상대방을 사용하는 건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이니까요. 그래도 나카무라가 제일 맞다고 할까, 제일 상냥하다고 할까요.
시이나: 그렇게 생각해요. 사에키는 무서워요.
오시미: 사에키는… 저는 싫어합니다. (웃음) 좋아해 주시는 독자분들도 많고 자신이 만든 캐릭터에 이런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싫다고 생각하고 그렸어요. 도중에 ‘아, 사에키에게 모친을 투영하고 있구나’하고 눈치 챘고 그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피의 흔적’을 그린 것 같아요.
시이나: ‘악의 꽃’을 읽은 건 제가 ‘어린 시절의 뒷정리’를 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상당히 ‘으윽’하는 느낌을 받았아요.
오시미: 어린 시절의 뒷정리는 무슨 얘기죠?
시이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마음 속으로 정리하고 소화한다고 할까요. 아이와 어른의 과도기에 읽었거든요. 나카무라는 저에게도 뮤즈였어요. 나카무라와 주인공이 강변 풀숲에서 대화하잖아요.
그 장면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을 추체험했습니다. 저 더위와 습도를 기억하고 있어요.
오시미: 제가 지금 다시 읽으면 저 때의 그림은 부끄럽지만… 습도를 느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4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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