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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은 검은 숲 한켠에 낮게 솟은 언덕에 걸터 앉아 숲 전체를 조망했다. 크리스토프를 비롯한 사미족 얼음 장수들이 급한대로 수레에 싣고 온 조립식 간이 숙소가 숲 여기저기에 펼쳐져 있었다. 중간중간에 독특하게 생긴 둥그런 바윗덩어리들이 눈에 띄었는데 저것이 말로만 듣던 북쪽 지방에 산다는 트롤인가보다, 하고 필립은 생각했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쇼?"
뒤에서 들려온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 안나와 늘 함께 다니던 금발의 얼음 장수, 크리스토프의 목소리였다. 그는 대범하게도 왕자의 옆에 턱 하고 앉더니 그의 앞에 뭔가가 한 입 베어 문 듯 한 정체불명의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당근 한 뿌리를 내밀었다.
"아, 왕자들은 이런 건 안 먹으려나."
난처한 빛을 드러낸 필립의 얼굴을 본 크리스토프는 당근을 도로 가져가 한번 우적 하고 씹었다. 그 모습을 본 필립은 허탈한 듯 너털웃음을 보이며 크리스토프에게 물었다.
"아렌델의 총 인구가 얼마나 됩니까?"
"음, 사실 난 잘 모르지만.. 일전에 안나 얘기로는 2천이 안 된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필립이 숙소 갯수를 바탕으로 눈대중으로 파악한 현재 검은 숲 내의 아렌델 인구는 대략 천오백 가량. 마을 밖의 숲 속에 흩어져 사는 소수를 모조리 규합해도 2천을 넘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적의 병력은 적게 잡아도 3천은 족히 되어 보이는 상황. 아렌델은 지금 인구 수의 두 배가 넘는 병력의 침공을 당한 것이었다.
"최대한 좋게 생각해야죠. 여왕님이 겨울을 불러왔고, 우리 얼음 장수들이 마을 안에서 먹을 만한 것들은 싹 긁어왔어요. 놈들은 오래 못 갈걸요."
"그렇다면 그들이 바로 산을 타고 올라올텐데요?"
"그러니까 그것들만 한탕에 잡으면 된다는 소리 아뇨."
현실성 없어 보이는 얘기를 너무나도 태평하게 하는 크리스토프의 모습에 필립은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엘사가 만약 마법을 쓰면 승산이 아예 없는 싸움은 아니었다. 하지만 필립은 알고 있었다. 엘사는 그럴 만한 위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화살에 맞고 희미해진 의식이었지만 필립은 그 때 분명히 두 명의 병사를 처치한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하던 엘사를 기억했다. 필립은 아렌델 사절단으로 파견되기 전에 엘사는 분명히 무자비하고 냉혹한 얼음 마녀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자신이 우스워졌다.
*
"여기 봐! 그때 없어진 놈들이다!"
여덟 명 남짓 되는 서던 제도 추격조가 얼마 전에 엘사와 석궁병들의 교전이 있었던 곳에 도달했다. 병사 하나가 등짐에서 서류 한 더미를 꺼내더니 얼음송곳에 처참히 짓이겨진 시체와 대조하기 시작한다. 온통 새하얀 세상에 그가 무참하게 꿰뚫린 자리와 그 반경 수 미터까지 선혈이 낭자해 있어 더욱 기괴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자가 뢰메르고... 저기, 그쪽도 신원이 일치하나?"
서류를 들고 있는 병사가 입을 크게 벌린 채 고통스러운 표정을 띄고 있는 얼굴을 펜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틀림없습니다. 여기 얼어 죽은 병사가 요르겐이 맞습니다!"
저편에서 얼음 동상이 되어버린 석궁병을 들여다보던 다른 병사가 소리쳤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라. 단독 행동하다가 엘사 여왕한테 걸리면 이렇게 되는 거니까."
서류를 들여다보던 병사가 자신의 부하인 듯한 병사들에게 겁을 주는 듯한 어조로 으름장을 놓았다.
"넷! 명심하겠슴다!"
바짝 쫄았는지 절도 있게 대답하는 졸개들. 서류를 들고 있는 병사는 붉은 잉크를 꺼내 사병 명단에서 뢰메르와 요르겐의 이름을 찾은 뒤 빨간 줄을 죽 그은 뒤 산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움직이자! 놈들이 어디로 이동했는지 반드시 알아 오라는 한스 대왕의 명이시다!"
*
아렌델 마을에 남겨진 물자 상황을 확인하는 점령군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그런데 서던 제도 장교들과 한스의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의외로 시민들이 도주하면서 남기고 간 물자가 많지 않았던 것.
"한겨울에 물자 보급이 될 리가 없고... 이럴 줄 알았으면 본국에서 다음 보급을 보낼 날짜를 조금 더 당겨둘 걸 그랬습니다."
물자 장부를 뒤지던 장교가 힘없이 말했다. 한스 역시 잠깐 당황한 기색을 비쳤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계속 언급되었듯이 서던 제도 병사들의 수는 아렌델 총 인구수보다도 많았다. 전쟁을 끝내자면 얼마든지 끝장내버릴 수 있는 상황.
한스가 바라고 있는 것은 단순히 아렌델을 점령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만약 그게 목표였다면 진작에 총 공세를 펼쳐 협곡과 아렌델 전역을 쑥밭으로 만들어버리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2년 전의 일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렌델의 공주에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얻어맞아 바다에 떨어져 비맞은 개 꼴이 되었고, 일개 말단 관리한테 내던져져 차가운 선실 감옥에 갇혔다. 본국으로 돌아와 치가 떨리도록 미운 열두 형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미 답이 정해져 있던 허울뿐인 재판을 받았고 끝내는 종신형을 선고받아 외딴 섬에 갇혔다.
서던 제도에서 성공시킨 반란이 끝났을 때 그러했듯, 아렌델에게도 그 때 당한 수모와 그 동안 겪은 모멸을 반드시 수십 배로 되갚아주리라. 한스는 이를 갈았다. 여왕과 공주를 반드시 산 채로 붙잡아 오라는 명령 역시 그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전장에서 그들이 죽게 허락하는 것으로 그의 성이 다 찰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전에 급할 것 없다고 말했던가."
"네, 넵 그렇습니다만."
"아무래도 번복해야 할 것 같군. 조금은 급해져도 괜찮을 것 같다. 추격조가 돌아오는대로 놈들의 본거지를 칠 준비를 하도록."
*
한참을 가만히 누워서 쉬던 안나는 굳은 몸을 풀 겸 숲 외곽쪽을 산책하고 있었다. 엘사에게 모든 이야기는 전해들은 상태였다. 이 모든 게 한스가 벌여 놓은 일이라는 것을. 안나는 심란했다. 내가 만약 2년 전 그 때 한스와 부딪히지 않았더라면... 물론 한스와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어쩌다 보니 마음의 문을 닫은 언니와 다시 친해질 수 있었지만 그건 소 뒷걸음질치다가 쥐가 잡힌 격이었다. 어쩌면 더 평화적인 방법으로 엘사와의 자매애를 회복했을지도 모르잖아?
쓸데없는 생각들이야. 안나는 생각했다. 천오백 가량의 아렌델 시민 중에서 군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원은 100명가량...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을 죄다 징집해도 수백 명에 그쳤다. 열 배가 넘는 수적 열세였다. 엘사의 마법이 전황을 뒤집기에는 충분했지만 안나는 얼마 전에 자신의 품에 안겨 서럽게 절규하던 엘사의 얼굴을 생각하니 차마 엘사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엘사와 함께 검은 숲에 도착했을 때 환호하던 군중들로부터 떨어져서 이쪽을 기분 나쁘게 쳐다보던 사내 무리들이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안나였다. 안나는 엘사에게 이 얘기를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몇 시간 전부터 엘사가 보이지 않았다.
*
"무, 무엄하다..! 너희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건지는 알고 있는게냐?"
검은 숲에서 조금 떨어진 숲길의 공터. 검은 숲의 마력과 화산 기운의 영향이 미치는 곳이라 엘사의 마법에도 눈으로 덮이지 않은 곳이다. 그곳에 몇몇 덩치 큰 사내들이 엘사를 벽 쪽으로 몰아놓은 채 포위하고 있었다. 엘사가 알 턱이 없었지만, 그들은 바로 이전에 검은 숲으로 엘사와 안나 일행이 귀환했을 때, 한쪽 구석에서 수근거리던 사내들이었다.
"알다마다, 여왕 폐하."
엘사는 기가 막혔다. 아니 그보다 혼란스러웠다. 아직 그녀는, 두 명의 서던 제도, 아니 한때는 위즐턴 소속이었던 석궁병 둘을 죽인 이후의 충격에서도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뒤집힐 것 같은 머릿속을 조금 정리하기 위해 사람이 없는 한적한 숲길을 걷는데 이 자들을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아니, 마주쳤다기보다는 저들이 내가 혼자 있는 상황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보이나?"
사내 중 하나가 피떡이 되어 축 늘어진 서던 제도 병사의 시체를 엘사의 앞에 들이밀며 말했다. 엘사는 거기서 하마터면 크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눈앞이 어질해졌다. 사내는 곧 들고 있던 병사의 시체를 뒤쪽으로 휙 집어 던지더니 말을 이었다.
"이놈을 붙잡아서 좀 패다 보니 알아낸 정보인데 말야. 이번에 쳐들어온 서던 제도 침략군의 수장이 한스라더군."
주변에 있던 사내들이 뒤이어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스가 아렌델의 여왕과 공주를 붙잡아 오는 자에게 막대한 현상금을 준다고 하던데."
"듣기로는 현상금을 타내는 데는 국적이 불문이라고 하더라고."
엘사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가뜩이나 복잡하던 머릿속이었는데, 이제는 제정신을 추스리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엘사의 심리 상태를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그녀의 발밑 주변으로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수분이 콰드득 하고 얼어붙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 그래서 나를 어쩌겠다는 거냐. 너희는 아렌델 시민이 아니더냐?"
"허, 아렌델 시민?"
그 말을 듣자 코웃음을 치는 사내들. 엘사는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이 되어 있었다.
"싸움 한 번 안 해보고 도망부터 치는 나라의 백성이 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만, 잘나신 여왕 폐하."
말을 마친 사내는 쥐고 있던 밧줄을 양 옆으로 길게 늘린다. 옆의 사내도 거들며 질긴 천을 준비한다. 그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엘사는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 끝에 냉기를 모은 후 가장 앞에 다가오는 사내의 머리를 향해 겨누었다.
"더, 더 이상 다가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이것 봐. 우리를 죽이려나 봐. 낄낄낄"
"저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서던 제도 놈들이 쳐들어올때는 쓰지 않았다는 거지?"
시퍼렇게 달아오른 냉기 폭풍을 보고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사내들. 반면에 엘사의 손끝은 이미 멀리서 봐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떨리고 있었다. 또 엘사가 서 있는 곳 주변에만 끼어 있던 서리 역시 서서히 영역을 넓혀 가기 시작했고, 공터에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 이런, 여왕이시여. 그런 걸로 겁줘도 소용 없어요. 왠지 알아요?"
사내들 중 하나가 비꼬는 듯한 어조로 엘사에게 말했다.
"우리 인생은 이제 잃을 게 없는 인생이거든. 당신께서 2년 전에 위즐턴과의 교역을 멈추었을 때, 우린 그 때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고."
위즐턴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자 주춤하는 엘사.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러는거지. 엘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지? 하긴,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관심도 없을텐데 알 턱이 없지. 우리는 말야, 위즐턴을 상대로 장사를 해서 먹고 살던 놈들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일감이 들어오지 않더라고. 알고 보니 아렌델 측에서 일방적으로 위즐턴에게 단교를 선언했고, 게다가 그게 여왕 당신 독단으로 결정한 일이라더군."
뒤쪽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사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한 말이었다. 그는 곧 그 쓴웃음마저 싹 지우며 험악학 표정으로 정색을 한 뒤 목청을 높여서 엘사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거기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지. 경기는 곤두박질치고 상인들 사이에서 여론이 험악해지는 것을 여왕인 당신이 몰랐을 리가 없잖아, 응?"
그 말을 끝까지 들은 엘사는 곧 앞으로 쭉 뻗고 있던 오른손을 거두었다. 곧 그쪽에 모인 냉기 역시 서서히 사그라들어 결국 사라졌다. 눈물이 엘사의 양쪽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게 다 내가 뿌린 씨였구나. 때아닌 한스의 침략부터 이런 어처구니없는 반란 행위까지 전부 다 내가 부족한 탓에 생긴 일이었구나. 엘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놈의 기분 나쁜 숨소리가 들리는 곳 까지 가까워졌지만, 더 이상 저항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심정 뿐이었다.
*
그런데 갑자기, 바로 앞에서 누군가 쿵 하고 쓰러지는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엘사는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시선을 밑으로 내려 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앞에서 밧줄을 들고 나를 묶으려던 사내가 내 발 밑에 쓰러져 있었다. 목에 화살 한 발이 꽂힌 채로. 엘사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뭐야! 어떤 자식이 대체..."
엘사 쪽에서 조금 떨어져 서 있던 사내 하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외쳤다. 이윽고, 그에게도 화살 한 발이 날아들었다. 화살이 급소를 명중시켰는지, 가슴팍에 화살 한 대가 꽂힌 채로 거꾸러진 그 사내 역시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뒤이어 땅 하는 폭죽 소리가 한 차례 들리더니 사방에서 화살들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비로소 사태를 파악한 엘사는 허둥지둥 엄폐물에 몸을 숨겼고, 탁 트인 곳에 있던 나머지 사내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졌지만 결국 모조리 화살이 박힌 채로 죽고 말았다.
빗발치던 화살들이 그치자 바위 뒤에서 웅크리고 있던 엘사는 황급히 자신 쪽으로 날아왔던 화살 한 대를 주워 깃털쪽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했다. 청록빛의 타원형 문양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웨스터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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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터가드는 서던 제도 왕가의 성이야, 즉 한스의 성씨지. 이 내용은 삭제된 비디오 클립에서 확인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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