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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FF] 73°C - 01앱에서 작성

Go0om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4.16 01: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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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아, 눈 온다.


창 바깥을 내다보는 중단발의 여자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리 넓지 않은 가게 안에서, 여자는 하얀 김이 폴폴 올라오는 하얀 머그컵을 양 손에 감싸쥔 채로 창 밖 너머를 내다보고 있었다. 나도 때마침 내가 마실 음료를 머그컵에 담아 가져오고 있었던 터라, 무심코 고개를 들어서 창 바깥을 내다볼 수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느껴지는 낡은 나무 창틀에 끼워진 다소 더러운 유리창 너머로, 하얀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조용한 어촌 마을, 바닷가에 정박된 배 위로 소복하게 하얀 눈이 조금씩 쌓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창 밖을 내다보는 것을 그만두고, 의자를 뒤로 드르륵 끌어서 빼낸 나는 털썩 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내가 그 자리에 앉자, 내 건너편에 앉아 있던 그녀도 창밖을 보던 걸 그만두고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동그랗고 큰 두 눈이 깜빡이면서 나를 향했다. 처음 봤을 때에는 퍽 병약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양 볼에 뽀얗게 살이 차올라서 조금은 건강해 보이는 모습이 된 그녀였다. 본인도 그걸 알고 있는 것인지, 그녀는 조용히 반짝거리는 눈으로 흘금 창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눈싸움, 하고 싶다.
-아서라.

-그럼 눈사람은요?
-다 나은 몸 다시 아프고 싶어?


약간은 다그치듯이 엄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혀끝을 빼물고 웃었다. 마치 아이같이 순수한 웃음을 짓는 그 모습이 썩 보기가 좋았던 터라 나도 같이 빙글빙글 웃으며 머그컵을 들어올렸다. 달콤한 코코아 향기가 짙게 코끝을 찔렀다.

조용하게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코코아만 홀짝이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가만히 창가 자리에 앉아서 창틀 언저리에 팔을 얹고 가만히 창밖을 보고 있으면 느리게 흘러가는 바깥을 구경하는 재미가 썩 괜찮았다.

가만히 그렇게 바깥을 내다보면서, 혀끝에 남는 달달한 코코아의 잔향을 즐기고 있을 때 문득 들려오는 말소리가 있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그러게. 아침을 안 먹었더니.

-저, 뭔가 매운거 먹고 싶은데.
-아직 그런 음식 먹으면 안 된다면서.

-그래도. 하지 말라면 먹고 싶은 마음 있잖아요.


헤헤 순진하게 맑은 웃음을 지은 그녀가 양손에 쥔 머그컵을 뾰족하게 입술을 내밀어 물었다. 그리고 들리는 호로록, 하고 코코아를 홀짝이는 소리.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매운 음식이라. 뭐가 있을까.
-그 저번에, 닭으로 해주셨던 거 맛있었어요.

-아, 닭도리탕.


원래는 닭볶음탕으로 말하는 것이 맞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상대가 일본인이니까, 조금 맞추어 주겠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그렇게 얘기하기도 했다. 짤막하게나마 한국어를 배운 그녀는 굳이 닭과 새를 같이 붙여서 이야기하는 것이 재미있다며 웃곤 했다.


-안 돼. 속 상할라.
-치이. 저번에도 먹고 멀쩡했는데요.


내 단호한 말투에 실망한 것인지, 뾰족하게 내민 입술을 삐죽거리던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하얀 머그컵에는 검은 나뭇가지에 달린 연분홍빛 벚꽃이 몇 송이 매달려 있었다. 처음에 이 잔을 만들 때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때 허약한 몸으로도 무언가 자신이 꼭 해내야 겠다면서, 입술을 앙다물고 집중하던 그 모습. 그게 떠오른 탓에 절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 나의 웃음소리를 듣기라도 했는지, 그녀의 순하게 둥글둥글 했던 눈빛이 날카롭게 나를 째려보았다.


"먹고 싶은데에."


그래, 그녀도 자신의 강점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일본인 특유의 짧은 발음으로 한국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잘 알고 있다는 것. 나도 가끔은 저 서투른 한국어 발음으로 그녀가 부탁해올 때면 쉽사리 거절하기가 어렵기도 했다.


"알았어. 해 줄게."
"앗싸아."


결국 원하는 걸 받아내었다는 성취감 덕인 것일까, 그녀는 손을 번쩍 들어올리면서 작은 환호성을 질렀다. 하얀 손이 비죽 나온 두툼한 분홍색 니트. 그녀, 미야와키 사쿠라는 히히 웃으며 다시 머그잔을 들어올려선 홀짝이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 사이였는데도, 창밖에 눈이 꽤나 쌓인 모습이 보였다.





* * *





내가 일본까지 오게 된 이유라 한다면, 아는 선배가 일본에서 운영하고 있던 가게를 비우게 된 일이 컸다. 막상 비워놓는다면 나중에 다시 정비하고, 청소하고 할 일이 귀찮다면서 딱히 할 일이 없다면 일본에 관광 겸 와서 가게를 대신 몇 달만 운영해 달라는 것이었다. 영 내키지 않는다면 Closed를 걸어놓고 쉬어도 괜찮고.


요리. 이십년을 넘게 내 인생을 바친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배워서 어느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일을 배우고, 서른 언저리에 다다랐을 때는 이제 슬슬 내 가게를 해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나눴던 선배가 조금 쉬면서 생각도 해 보라고 그런 제안을 하기도 했고 말이다.


아마 그러고 나서 그 선배는 이탈리아였나, 스페인이었나. 어느 시골 마을에 가서 현지 스테이를 하겠다며 그대로 떠나버렸었지.

처음엔 일본이라는 곳이 막막하기도 했고, 하도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던 터라 일거리도 그닥 많이 있지 않았다. 나 혼자 조용히 이런저런 실험요리를 이것저것 만드는 것이 소일거리의 전부였고, 하루종일 이어지는 그 무료함에 몸부림을 치던 나는 가게와 시장 정도를 오가던 루틴에서 벗어나 마을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주친 것이, 미야와키 사쿠라, 그녀였다.

처음엔 바닷가 항구에 멍하니 앉아서 파도가 철썩이는 모습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길래, 무슨 사람인가 하고 나도 뒤에서 가만히 털썩 아무렇게나 앉아 지켜보곤 했다.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쳐다보기만 하면서 시간이 흐르다가, 처음 말을 붙이게 되었던 건 그녀가 쓰고 있던 모자가 바닷바람에 날려 내 발치에 떨어졌을 때였다. 봄에 도착했던 내가 그녀와 첫 마디를 나눈 것이, 여름이 시작되고 나서부터였다.


-……감사합니다.


얇고 작은 목소리. 모자를 건네줄 때 보인 그녀의 얼굴은 파리하고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었다. 내민 손이 잘게 떨리고, 입술이 파랗게 마른 듯한 모습. 나중에야 들은 사실이지만, 사쿠라는 지병으로 인해 요양을 하러 내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녀와 이야기하게 되었던 건, 여름비가 잘게 내리던 어느 날 이었다. 처마 밑에서 연초를 태우다가, 비를 맞으며 터벅터벅 걸어온 그녀가 공방 앞의 처마에 멈추어 비를 피하고 있을 때. 나는 사쿠라의 눈치를 보면서 태우고 있던 연초를 빗물 웅덩이에 던져 껐다.

빗소리가 처마를 때리고 있던 그 와중에도 그 불씨가 꺼지는 소리를 듣기라도 했는지, 사쿠라의 고개가 나를 향했다.


-저, 피셔도 괜찮은데.
-아니에요. 그냥.

-……저기, 혹시. 일본사람, 아니시죠?
-네? 아, 네. 한국에서 왔어요.

"우아. 진짜요오?"


갑자기 한국어를 하기 시작하는 사쿠라.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조금은 놀라서 한국말로 반문했다.


"한국말 할 줄 아세요?"


그 말을 시작으로, 나는 그녀와 친해질 수 있었다. 꽤나 흔한 이야기였다. 한국의 문화를 좋아하고 동경해서, 한국어를 취미로나마 짧게 배웠던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 자연히 한국 사람인 나에게 흥미를 느꼈던 것인지, 바닷가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대신 그녀는 차츰 가게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이 조용한 동네에서 또래 젋은이를 찾을 수 없었던 사쿠라가 나와 친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같이 보내는 시간이 잦아지기도 했고, 내가 한 한국요리를 때로는 즐거워하면서, 때로는 힘들어 하면서 먹기도 했다. 아무래도 간이 세고 맵기도 했던 것 같더라. 그런 날엔 결국 전공인 양식을 꺼내들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내가 일본에 온 연유라던가, 그녀의 지병에 대해서라던가. 호흡기가 날때부터 썩 좋지 않아 이따금 심해진다는 것이 그녀의 지병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냥 공기가 좋아서였는지, 아니면 받던 스트레스가 많이 줄었기 때문이었는지 날이 차가워지기 시작할 때 즈음부터는 먹던 약을 줄이더니 요즘에 들어서는 아예 약을 끊었다고 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인연. 이른 봄부터 눈이 내리는 이른 겨울이 이르기까지. 꽤나 긴 시간이었다.


-그러면 장 보러 가야겠는데. 닭이 없어서.
-같이 갈래요.

-밖에 추워.
-오랜만에 눈도 맞고 싶고 그래서요.


배시시 웃는 사쿠라. 이름의 한자는 벚꽃과는 뜻이 다르고 음만 같다고 했었다. 하지만 순수하게 웃어보이는 그 맑은 미소가, 봄을 맞이하는 벚꽃만큼이나 아름답다는 것은 이름을 부를 때 마다 떠오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나는 곧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 * * * *








"오하요-"
"안녕."


언제나 그렇듯, 우산을 접고 눈을 문가에서 탈탈 털어낸 사쿠라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며칠 전 부터 이어진 눈은 끊어졌다, 내렸다를 반복하면서 세상을 하얗게 덮어 물들이고 있었다. 몇 시간에 한번씩 가게 앞에 눈을 쓸어내는데도 몇 시간이 지나면 발등을 소복하게 덮을 정도로 내리는 눈은 가히 폭설이라고 해도 아까움이 없을 정도였다. 아니, 폭설이었다. 일기예보에서도 눈이 많이 내릴 예정이니까 산간지역은 조심하라고 했으니까.

그녀가 입은 검은 코트도, 털어냈음에도 불구하고 하얀 눈이 소복히 쌓여있었다. 어깨부터 앞자락까지 깔끔하게 털어내려 바둥거리는 그녀를 보니 절로 쿡쿡 웃음이 새어나왔고, 자신의 꼴이 썩 우스꽝스러웠던 걸 그녀도 알았던 것인지 샐쭉 흘기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웃겨요?
-아니, 귀여워서.

-아, 으.


내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훅 찌르고 들어가곤 하면 사쿠라도 당황하곤 했다. 직접적인 표현에 익숙하지 않아 부끄러워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가끔씩은 이렇게 놀리기도 하는 맛이 있었다. 마침내 눈을 터는 일을 끝마친 것인지 코트를 벗어 가지런하게 팔에 모아안은 사쿠라는 의자 등받이에 코트를 걸었고, 나는 아침에 내려놓았던 커피 포트에서 커피를 한 잔 따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활짝 웃으며 커피를 받아든 사쿠라는 동그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머그잔을 쥐고 커피를 홀짝였다. 조금 진하게 내린 커피라서 다소 씁쓸할 법도 한데, 물을 부리로 쪼아 마시는 새처럼 잘만 마시는 걸 보니 썩 입에 맞는가 싶었다.


-괜찮아?
-아뇨. 써요.


그래도 먹던 약보다는 안 쓴데요. 배실배실 웃으며 커피의 향을 음미하던 사쿠라는 생각났다는 듯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참, 몇달 전에 만들었던 요리 있잖아요. 며칠 전에 본가에서 어머니가 올라오셨는데, 어머니가 무척 좋아하셨어요. 정말 맛있다고.
-다행이네. 내가 가르쳐주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선생님이 훌륭해서인가요. 헤헤.


멋쩍게 웃으며 연한 흑색 머리칼을 긁적인 그녀는 콧잔등을 쓱 문질렀다. 그리고 잠시 조용히. 커피만 홀짝이는 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이제 올해 끝도, 얼마 안 남았네요.
-그러게. 벌써 또 한살 더 먹는 건가.

-에에. 그렇게 말하니까 벌써 슬퍼지는데요.
-나도. 벌써 이십대가 조금 더 지나가는건 별로 좋지 않은데.

-전 아직 코와이상보다 어려서 다행이네요. 예전엔 빨리 어른이 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어른이 되니까 다시 아이가 되고 싶어서.


무섭, 이라는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그녀였다. 일본인이 발음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발음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무솝이라는 다소 다른 나라, 동남아 쪽에서 들어보았을 법한 발음만 나왔던 탓에 그녀는 다른 호칭을 사용했다.

한자와는 전혀 다른 뜻이지만, 무섭이라는 단어를 듣고는 킥킥거리며 코와이- 라고 중얼거렸었다.

그렇게 내 이름을 말하는 그녀의 입술이 연분홍빛으로 반짝거렸다. 처음 보았을 때는 파리하게 창백한 그 입술에 병색이 완연해 보였는데, 지금은 파릇한 생기를 품은 그 입술이 사랑스럽게 반짝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적인 호감이었다던가, 그런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성적인 마음을 품기엔 나와 그녀의 나이 차이가 제법 있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그리는 분명한 이상형이 있었기에, 그 이상형에 사쿠라는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 인상이었다.


-이제 고등학교 졸업한 지 몇 년이나 지났다고. 대학도 다니고 있다고 했잖아.
-네에. 지금은 휴학하고 있지만. 내년 봄에는 다시 다닐 수 있을 거 같아요.


많이 건강해진 거 같아서. 보이지도 않는 알통을 만들어 보이기라도 하듯, 팔을 들어 접어보이며 흡, 하고 숨소리를 내는 사쿠라의 모습이 퍽 우스웠다.


-그러고 보니까, 어떤 대학에서 뭐 공부하고 있다고 들은 건 없었던 거 같네.
-그냥, 별 거 아니에요. 집에서는 저는 하고 싶은 거 뭐든 하라고 해서.

-요리는 많이 안 해 봤는데, 데코같은걸 하는 거 보니까, 그런 쪽일 거 같은데. 디자인?
-으응. 조금 달라요.

-예술…… 미술? 그림? 사진?
-힉. 어떻게 맞췄지.


처음 보는 사람이 요리를 늘어놓아 접시를 채우는 폼 치고는, 지나치게 익숙해 보였거든. 그 요리의 특성을 알아보고 가늠하는 모습이나, 그게 현실로 이루어졌을 때 대충 어떤 모양새가 될지 예측하는 폼이나.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느낌이나 모양새를 정확히 실제로 옮겨낼 줄 아는 모습이 그렇게 보였다.

아, 다 마셨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내내 커피를 홀짝이더니, 그녀의 머그잔이 어느새 비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슬슬 이른 점심시간까지 흘러있었다. 오늘은 조금 늦게 일어난 터라 아침도 먹지 않았는데, 그녀도 마찬가지일까 싶어 넌지시 말을 건네어 물었다.


-아침 먹었어?
-으음, 그냥 간단하게 먹었는데요. 밥에다가 계란이랑, 간장이랑 비벼서.


분명 사쿠라의 집에는 그녀를 돌보아주는 사용인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저렇게 간단한 식사를 했다니. 쉽사리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눈을 깜빡이면서 그녀를 응시하자, 사쿠라는 으음, 하고 작은 소리를 흘리며 니트 안에 입은 셔츠의 목깃을 매만졌다.

무언가 할 말을 망설이는 듯, 약간 머뭇거리는 듯한 모양새. 그녀는 큰 눈을 깜빡이면서 손가락 끝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내가 말하던 말에도 다른 말로 답했다.


-저, 코와이상은 언제까지 일본에 계실 거에요?
-……글쎄. 곧 돌아갈 때가 되기는 했지. 원래 이 가게 주인이 이제 슬슬 돌아와야 할 거 같다고 얘기를 해서.


말을 하고 나니,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망설이고 속에 품어 두었던 말이 문득 흘러나왔던 것이었다. 그녀에게 내가 돌아갈 날을 쉽게 말하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 사이에 정이 들기라도 했던 건가?

이 곳에서 만나고, 조금 정이 들 만큼 교류를 나눈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이 공방의 카페에 들르는 사람은 여행객이나, 가구가 필요해 찾아온 마을 주민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스쳐 지나가던 인연들 중에서 그나마 깊은 흔적을 남겨 놓은 건 그녀뿐이었다.

그래서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떠나게 된다면, 그녀가 혼자가 되어서 내가 더 이상 없는 빈자리를 보고 있을 생각을 하니 어쩐지 허전한 마음이 들 것만 같았던 생각에 먼저 말해주기를 꺼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아아. 어쩐지.
-뭐야, 말했던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아뇨. 얼마 전 부터는…… 가게 정리에 바쁘셨잖아요. 가구들 위치도 바꾸고. 그래서.


뭔가 정리하는 사람이면, 곧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라는 뜻이잖아요. 어쩐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느껴졌다.

여기 살 거라는 말도 아니었고, 그냥 여기서 지낸다고 말 하셨었으니까, 언젠가는 가겠지, 그래도 나보다 늦게 떠났으면 하고 생각하기는 했어요.

사쿠라의 목소리에 나는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턱 숨이 틀어막히는 듯한 느낌. 처음 내가 가게로 왔을 때 제일 먼저 했던 일은 내부를 손보는 것이었다. 이 곳이 내 가게였다면 어떻게 설계를 했을까 하는 생각에 했던 일. 물론 그 전에 사진을 찍어서 돌아갈 때 원래대로 두어야겠다는 계획 정도는 두고 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알고 있었다니. 어딘가 멍한 눈으로 공허하게 천장을 응시하던 그녀가 어딘가 위태로워 보여서, 나는 조금은 급하게 말을 걸었다.


-뭐, 당장 간다는 것도 아니니까. 이번 겨울이 끝나면 가지 않을까.
-그럼, 그나마 다행이네요.


어차피 만난 인연이라도, 언젠가 헤어질 걸 생각은 하고 있었으니까, 저도. 조금은 무거운 웃음을 지은 사쿠라가 빈 잔을 만지작거렸다. 안에 커피가 비어서 온기가 없이 냉랭할 것만 같은 머그잔. 나는 그런 사쿠라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찬장에서 간단한 재료들을 꺼냈다.


-수프 조금 먹을래?
-음, 네. 조금 출출해서.


정작 떠나야겠다, 떠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항상 했었더라도 막상 입 바깥으로 내니 기분이 묘했다. 사쿠라의 반응이 생각보다 그 헤어짐이라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약간은 서운하기도 했다. 항상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는 것을 속에 품고 생각해온 사람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반응이기도 해서 그랬던 걸까.

나도 먼저 준비하고, 생각해오긴 했지만 조금은 섭섭한 마음을 감출수는 없었다.


-뭐, 요즘 세상에 연락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잖아. 라인이나, 이메일이나. 인스타그램이나.
-그렇네요.


얼음이 녹아 연해진 아이스커피 같은 미소를 짓는 사쿠라에게, 나는 애써 쿨한 척 말을 건넸다. 하지만 어쩐지 직감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더 이상은 없다는 것 처럼, 나는 선을 그었고 사쿠라도 그걸 받아들였다는 것을.



그 날 이후, 사쿠라가 가게에 찾아오는 빈도가 뜸해졌다.

한 달 후 사쿠라는 짧은 인사와 함께 그 마을을 떠났고, 나도 며칠 지나지 않아 가게를 정리한 후 일본 생활을 정리한 다음 한국으로 떠났다.

첫 날의 바닷바람처럼 다가왔던 만남이, 겨울날 바다 위에 내린 눈송이처럼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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