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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동기 K의 불행

운영자 2013.08.01 18:34:17
조회 1732 추천 3 댓글 1

  8년 전 쯤 꽃샘추위가 기승을 떨던 어느 날 오후였다. 고등학교 동기 K가 나의 조그만 법률사무소를 찾았다. 고교시절 그와는 대화를 해 볼 기획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찍힌 붉은 얼룩 때문에 확실히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별로 말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는 기죽은 얼굴로 내가 권한 소파에 궁둥이만 살짝 걸치고 앉았다. 그의 표정에서 어떤 용기를 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느껴졌다.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IMF때 직장에서 나왔습니다. 자식하고 먹고 살아야 해서 이렇게 돌아다닙니다. 양복 한 벌 맞추어 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걸 넘어서 존댓말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그의 처절한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2년쯤 흐른 어느 날 저녁 우리 집에서 열린 동창들 신우회에 그가 참석했다. 믿음을 가진 친구들이 찬송을 하고 아픔을 나누는 간증을 하고 함께 기도하는 모임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슬픈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신우회는 고교친구끼리 살아온 아픔을 솔직히 털어놓는 그런 모임이기도 했다. 그곳에 처음 온 다른 친구 한 사람은 기도가 끝난 후 책상에 엎어져 울음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꺽꺽 거리며 절규했다. 그 아픔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고등학교 일학년 시절 그의 활기찬 모습이 떠올랐다. 공부도 잘하고 클럽활동도 열심이었다.

   그런 그가 사업에 실패하고 택시운전을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그가 말하기 전에 아는 체는 하지 않았지만 어디서 그 아픔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경기고등학교에서 똑같은 교복을 입고 함께 공부할 때 우리는 모두 같은 콩깍지 안에 서 세상을 꿈꾸는 날 비린내가 풍기는 풋콩들이었다. 희망에 부풀어 어서 빨리 우리를 얽매고 있는 사슬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불공평과 인생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걸 몰랐다.

 

  내가 그걸 처음 느낀 건 대학입시를 치르고 같은 반 친구들이 모일 때였다. 나는 동기생 대부분이 지망한 서울대를 지원조차 하지 못했다. 실력이 없어서였다. 모임에 갈 때 교복을 입을 수는 없었다. 동네 친구 집에 갔더니 친구 형의 낡은 재킷이 후줄근하게 벽에 걸려있었다. 그걸 빌려 입고 모임에 나갔다.

  눈에 확 들어오는 모습이 있었다. 최고급 양복으로 조끼까지 받쳐 입은 동창이 보였다. 그제야 그가 세상에서 재벌이라고 부르던 집의 아들인 걸 자각했다. 그와 나는 환경이 달랐던 것이다. 직업장교 생활을 했었다. 최전방으로 쫓겨 가 밤하늘의 얼어붙은 별들을 보면서 철책선 순찰을 하곤 했다. 바로 앞 북한군초소에 있는 적군 병사들 역시 춥고 배고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장교나 병사나 하층계급이면 전방에 온다고 자조했다. 집안이 좋은 친구들이 부러웠다. 아버지 덕으로 병역면제를 받은 친구들도 보였다. 군대를 가도 서울지역 부대에 적만 달아놓고 집에서 편하게 지내는 경우도 많았다. 옛날에도 전쟁에는 가난한 집 아들이나 상놈들이 나가서 대신 죽었다. 원래 세상은 그렇게 불공평한 것이라고 체념했다. 불공평을 인정하지 않으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세일즈를 하는 고교동창이 장교사무실까지 찾아와 월부물건을 앞에 내놓았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부잣집 아들과 어울려 잘 놀던 친구였다. 그를 부대 근처의 냉면집에 데리고 갔었다. 그가 불평했다.

 

  “세상이 이상해. 똑같이 놀았는데 부자친구들은 아무 지장 없이 상승하고 나는 진창에 쳐 박혀 뒹구는 거야.”

 

  “그게 세상시스템이라는 거야. 원래 그랬어. 어떻게 목성하고 천왕성, 수성이 다 똑같아? 원래부터 크기도 돌아가는 궤도도 다른 거야. 다만 몰랐을 뿐이겠지.”

 

  빨리 현실을 인정해야 행복해 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안주하면 그냥 세상물결에 휩쓸려 쓰레기통으로 간다.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은 해야 했다. 군 생활을 하면서 공부해 간신히 변호사자격증을 따고 제대 후 조그만 개인법률사무소를 차렸다. 내 팔자를 곰곰이 생각해 봤었다. 출세할 운명이 아닌 것 같았다. 불쾌한 일이 있으면 바로 덤비는 스타일이다. 조직생활에서 행동도 제멋대로 했다. 그런 인물은 올라갈 수가 없다.

  못마땅한 일이 있으면 바로 말로 다 내뱉는 성격이었다. 그런 성격은 변두리 벼슬은 해도 중요한 직책에는 선택될 수 없었다. 그냥 작은 사무실에서 혼자 물처럼 낮은 데로 흐르며 사는 방법을 택했다. 이웃에서 변호사를 하는 다른 고교동기한테 배운 인생철학이기도 했다. 덕분에 부자는 못 되도 아이들 공부시키고 가난을 면할 정도는 됐다.

  일시 나락에 빠졌어도 역시 똑똑한 친구들은 달랐다. 닥쳐온 운명을 받아들이고 우뚝 서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기도모임에 와서 그렇게 처절하게 울던 택시를 몰던 친구가 변했다. 동창회에서 뷔페의 줄을 섰다가 다시 만난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얼마 전에 택시운전을 하다가 아들자랑을 하는 할머니를 만났지. 자기 아들이 경기고등학교를 나왔다는 거야. 맞장구를 치면서 한참 얘기를 들어드리다 바로 네 어머니인걸 알았지. 훌륭한 어머니시더구만. 앞으로 잘 모셔. 물어보지도 않고 자네 집까지 모셔다 드리니까 어떻게 우리 집을 잘 아냐고 이상해 하시더라구. 그래서 훌륭한 아들이라 잘 안다고 올려드렸지.”

 

  그의 얼굴은 천사같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기회를 놓치는 경우도 있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맞춤양복을 권하러 왔던 K의 경우는 성경속의 욥보다 더 힘들게 됐다. 경기 69회 신우회모임에 나갔다가 그의 소식을 들었다.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져 온 몸이 마비되고 사람까지 몰라본다는 것이다. 그가 지금 시립요양원에 있는데 그의 아내도 폐암 4기라는 것이다.

  아들이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아버지의 똥오줌도 치우고 기저귀도 갈아 채운다고 했다. 그 뿐이 아니라고 했다. 아들이 벌어야 생존을 할 수 있는데 영장이 나와 곧 입영을 해야 할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의 아들을 만나 얘기를 들어봤다.

 

  “IMF때 회사에서 나온 후 아버지 나름대로 살려고 노력했어요. 외판사원이나 빌딩경비원등 닥치는 대로 하셨죠. 나이가 육십이 되면서 그나마 그런 자리도 없어서 거의 수입이 없었어요. 식구들한테 미안하니까 혼자 나가 지하방을 얻어 살았어요.

  밥을 아버지 혼자 해 먹다 보니까 굶는 날도 많았고 또 밥 사 먹을 돈도 없었죠. 혈압약도 끊어버렸어요. 그래도 자존심 강한 아버지는 친구들한테 가서 손을 벌리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러다 쓰러진 거죠. 폐암4기인 엄마가 뼈까지 암이 전이 되서 시골로 내려갔어요. 엄마가 가기 전에 시립요양소로 가서 아버지를 봤는데 두 분이 끌어안고 막 울더라구요.”

 

  인생은 사랑하는 가족하고도 언젠가 다 이별을 하는 것 같다.

 

  “그러면 너는 지금 어떤 상황이니?”

 

  “저는 지금 닥치는 대로 노동일을 하면서 아버지 어머니 생활비를 벌려고 애쓰고 있어요. 공사장이나 물류센터에서 노동도 하고 식당에서 서빙도 하고 노래방웨이터도 했는데 그나마 계속 일이 없어요. 엄마를 돌볼 때면 시골에서 일을 얻어 밭에 거름을 뿌리고 농산물을 나르기도 하는데 그나마 봄가을 밖에는 일이 없어요.

  원래 하루에 열네시간 일해야 칠만원을 받는데 어머니 간호를 하면 그 시간을 다 할 수 없으니까 여덟 시간 일하고 사 만원을 품값으로 받죠. 그런데 영장이 나와서 내가 군대 가면 우리 아버지 엄마는 어떻게 될지 몰라요.”

 

  무거운 짐을 가득 지고 막연해 하는 그의 아들이 딱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병무청장에게 제출할 진술서를 쓰기 시작했다. 성경속의 이스라엘 군대는 전쟁터에서도 집에 사정이 있으면 돌려보냈다. 그 정도의 생계곤란사유가 있으면 병역을 면제받아야 마땅했다. 나는 그 아이가 처한 상황을 진솔하게 쓰고 그 끝에 서명을 한 후 다른 동기들이 이어서 서명운동을 해 주기를 요청했다.

  학자, 의사, 박사, 교수 등 쟁쟁한 인물들을 배출한 경기고등학교다. 그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연명한 진술서를 국가에서 믿어주기를 원하는 희망에서였다. 동시에 그 아이가 그 서류를 들고 동창을 찾아가 서명을 부탁할 때 친구들은 분명 인정을 베풀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참 후 그의 아들과 통화를 했다. 생기가 담긴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왔다.

 

  “아저씨, 정말 고마워요. 아버지 동창 서른여덟명이 우선 서명을 해줬어요. 병무청 담당자가 알았다며 꼭 올리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경기 69회 장헌기, 황규호라는 분이 백만원을 보내주시고 우리 집에 천만원이나 생겼어요. 정말 큰 도움이예요. 아버지 경기고 친구들한테 감사해요. 잊지 않을 게요.”

 

  그 말을 들으면서 산다는 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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