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경(經)을 읽는 노년의 삶

운영자 2013.08.01 18:39:38
조회 814 추천 1 댓글 0

  며칠 전 머리를 깎으러 아파트 지하에 있는 미용실로 갔었다. 지난 겨울 쌍꺼풀 진 둥그런 눈을 가진 오십대 남자미용사가 새로 개업한 미용실이었다. 그는 불란서까지 가서 미용기술을 연마했다고 자랑했다. 조수 두 명이 긴장한 자세로 서서 그가 머리를 깎는 광경은 의젓한 교수님보다 더 권위가 있어 보였다.그런데 뭔가 주위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아파트 지하는 난방이 안 되어 썰렁했다. 가격도 비쌌다. 명품미용사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았다. 두 달 만에 그곳을 다시 찾아간 것이다.

 

  “어서 오세요”

 

  오십대 초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혼자 앉아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맞았다. 종업원도 없고 그 멋쟁이 남자미용사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 미용사 분 어디 갔어요? 머리를 잘 깎던데----”

 

  내가 두리번거리면서 그를 찾았다.

 

  “그분 떠났어요. 제가 실제로는 주인이에요. 싸게 잘 깎아 들릴 게 앉으세요.”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가운을 입고 미용의자에 앉았다.

 

  “손님 머리를 깎는 동안 제 하소연 좀 들어주실래요?”

 

  그녀가 사각사각 가위질을 하면서 말했다.

 

  “그러세요.”

 

  어차피 변호사란 어디서나 말을 들어주는 직업이기도 했다.

 

  “떠난 그 남자미용사하고 저는 오래전 변두리에서 같은 미용사였어요. 내 조수였죠. 이십년 만에 우연히 만나 동업을 하기로 했어요. 제가 그동안 번 돈을 이 미용실 차리라고 다 줬어요. 그런데 한 달도 채우지 않고 손님이 없다고 가 버린 겁니다. 원래 그런 불성실한 인간이었어요. 또 속은 겁니다.”

 

  여자 미용사는 여러 가지 그와 얽힌 인간사를 얘기했다. 마지막에 그녀가 이렇게 한탄을 했다.

 

  “저 열심히 살고 교회에도 나갔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은 저한테 왜 이러시는지 몰라요. 이제는 편하게 살 게 해 주실 만도 한데 돈마저 다 털리게 하셨어요.”

 

  하나님은 곤경에 처했을 때 우선 동네북인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말하는데 난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다.

 

  “왜 인간의 스케줄에 하나님이 맞춰야 하는 거죠? 반대로 하나님의 스케줄에 우리가 맞춰가야 하지 않나요?”

 

  내남없이 사람들은 자기 편의에 따라 하나님이 슈퍼맨처럼 짠하고 나타나 기적을 베풀기를 원했다.

 

  “그래도 제가 밖에 나가 광고를 해야 관리비도 낼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밖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지하실에 혼자 앉아서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그녀가 탄식같이 내뱉었다.

 

  “성경을 보면요 하나님이 필요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광야로 내쫓기도 하고 울며불며 아우성치는 걸 나뒀다가 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들이기도 하고 하나님 맘대로 하더라구요. 어쨌든 결과는 해피엔딩이더라구. 우리 여사장님도 하나님이 애굽에서 내쫓듯 여기서 장사가 안 되게 해서 내쫓을 수도 있고 더 좋은 장소를 이미 마련해 놓았을 수도 있고 안 그래요? 그런데 왜 혼자 다 북치고 장구 치고 그래요?”

 

  “맞다. 아멘.”

 

  그녀의 표정이 확 밝아지고 있었다. 내가 일부러 한 말이 아니라 갑자기 성경에서 읽었던 게 떠올라 한마디 전했을 뿐이다.

 

  신기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엑소더스가 지하실의 여자 미용사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 연관성을 나도 몰랐다. 하여튼 그 한마디에 나는 헤어크림까지 선물로 받았다. 성경 읽은 덕을 톡톡히 봤다. 나이 육십이 되면서 나는 몸속에 남아있는 얼마 안 될 것 같은 에너지를 어디에 쓸까 고민한다.
 
  천상 앞서간 선배들을 벤치마킹 할 수밖에 없다. 의대 학장을 하다 정년퇴직을 한 처삼촌은 현명한 노인이었다. 교수생활을 하면서 보너스가 나올 때 마다 마석의 산골짜기에 땅을 조금씩 저축하듯 사 모았다. 예순 다섯 살 퇴직할 때 몇 만평 그의 땅은 어느새 푸른 잣나무 숲을 이루었다. 그는 그 안에 이층의 빨간 벽돌집을 지어 들어갔다. 농장을 만들어 밭농사를 지으면서 그는 마을 노인들과 어울렸다.

  어느 날 일이 있어 나의 사무실에 들렀던 그는 노년의 시간을 공부로 즐겁게 보낸다고 했다. 의과대학 시절 보았던 손때 묻은 약리학 교과서를 다시 본다는 것이다. 노년이야 말로 정말 즐겁게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칠십 년대 중반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하얗게 눈이 덮인 가야산 골짜기의 한 암자에서 겨울을 난 적이 있었다.

  고시공부를 하느라고 두툼한 법서에 젊음을 제물로 바쳤던 시절이다. 법대교수가 산 아래 여관에 와서 나를 부른 적이 있었다. 교수가 묵는 방에 인사하러 들어갔을 때였다. 기름칠한 노란 장판지의 온돌방 구석에 손때 묻은 민법교과서가 놓여 있었다. 노교수는 젊어서부터 공부해온 민법교과서를 언제나 가지고 다니면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나이가 먹으면 그래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서고에 깊이 박혀있던 대학시절 보던 민법 책을 틈틈이 보았다. 그러나 법서는 삶의 근원적인 갈증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한국의 사상가인 류영모 선생의 전기를 통해 그를 만났다. 다석 류영모 선생은 나이 사십부터 북한산 자락에 집을 짓고 경을 읽는 삶을 살았다. 그가 매일같이 쓴 ‘다석 일지’는 세계적인 묵상록으로 인정받고 있다. 멋진 노년의 삶 같았다.

  죽음이 몇 달 안남은 강태기시인의 병문안을 간 적이 있었다. 미성년인 십대에 자동차공장 수리공이던 그는 신춘문예에 시와 소설이 당선된 몇 안 되는 문학의 천재였다. 그는 젊은 시절 엄청난 독서를 하고 인도를 흐르면서 내공을 다졌다. 나이 육십부터는 최고의 글을 남기겠다는 야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나이 육십이 되자 죽음의 사자가 엉뚱하게 찾아왔다.

  폐암말기인 걸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달동네 임대아파트에 사는 그를 찾아갔었다. 시인은 어린애 같이 천진난만했다. 그는 내게 좋은 선물을 주겠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평생 수많은 책을 사서 모았는데 죽는다는 선고를 받고 또 집이 좁으니까 책들을 다 처분해야 했어요. 그래서 죽기 직전까지 옆에 놔둘 책은 뭘까 하고 고민해 봤어요. 그랬더니 딱 두 권이 선정되더라구요.”

 

  “그게 뭔데요?”

 

  귀가 번쩍 띄었다. 그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성경하고 논어예요.”

 

  나는 귀한 보석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다시 성경에 빠졌다. 어제도 경찰서 조사에 입회하고 있을 때 성경을 꺼내놓고 제일 재미없고 난해한 레위기를 중얼거렸다. 재판을 기다리면서도 주문같이 읽고 지하철 안에서도 읽는다. 성경은 엄청난 지혜를 공급해 주고 동시에 신비로운 힘을 발휘한다. 삼십대 중반에 나는 묘한 체험을 했었다.

  어느 날 오전 열 시경 직장에서였다. 뜬금없이 성경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때 서점에 들러 예쁘게 장정이 된 성경 한권 사가지고 들어가기로 했다. 잠시 후 내면 깊은 곳의 누군가 나보고 당장 나가라고 명령을 하는 것 같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참고 버텼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원인모를 강한 힘이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나는 급히 차를 몰고 직장을 빠져나가 광화문네거리 쪽으로 갔다. 길가에 엉거주춤 차를 세운 채 지하서점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성경코너에 노란성경책 한권이 나를 약속이나 한 듯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탐식하는 짐승처럼 성경을 읽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따지지 않고 그냥 읽었다. 서른 두 번 쯤 읽었을 때였다. 사표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은 세상적인 출세나 돈, 명예에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고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수천 년 전의 신화 같은 얘기들이 왕성한 생명력가지고 나를 움직이고 있었다. 성경에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신비한 기운이 들어 있었다. 인간에게 기적이 하나님에게는 보통의 흔한 일이었다.

 

  성경은 나에게 조그만 법률사무소를 차리고 그 안에서 감사하고 기도하며 사는 삶을 만들어주었다. 의뢰인이 없어도 고맙고 돈을 못 벌어도 가지고 있는 건강만으로도 감사하게 만들어 주었다. 의대학장을 지낸 처삼촌은 약리학교과서를 보다가 돌아가셨다. 법대학장은 자신이 쓴 민법 책을 노년에 까지 사랑했다.

  평생 몇 트럭분의 독서를 했던 시인은 지금 남한강을 내려다보는 나무아래 잠들어있다. 나는 삼십대 중반부터 친구가 된 성경 한권을 항상 옆에 두고 있다. 일생을 함께 한 좋은 친구다.

추천 비추천

1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SNS로 싸우면 절대 안 질 것 같은 고집 있는 스타는? 운영자 24/05/06 - -
777 세상을 농락하는 종교괴물 운영자 14.06.16 985 0
776 체념의 십자가 운영자 14.06.16 1015 0
775 맨발의 성자 운영자 14.06.12 949 0
774 예배당 걸레질 운영자 14.06.12 819 2
773 김흥호 목사(1) 운영자 14.06.06 1486 1
772 일용할 양식의 일당 12만원 운영자 14.06.06 913 1
771 평생 행복한 예수쟁이 의사의 고백 [1] 운영자 14.05.23 1035 8
770 134센티 못난이가 공주로 변한 예배당 운영자 14.05.15 805 1
769 소경 바디매오가 바로 나다 운영자 14.05.12 663 1
768 가시나무 십자가 운영자 14.05.05 514 0
767 하얀 종이위에 검은 글자로 만든 교회 운영자 14.05.05 740 1
766 초임판사와 고위직 판사의 다른 보람 [1] 운영자 14.04.28 2272 7
765 진실을 외면한 법비(法匪) [1] 운영자 14.04.24 843 2
764 법정소설 나부랭이나 쓰는 놈 [2] 운영자 14.04.22 1195 7
763 독 아닌 약 되려면 권력 견제하고, 사생활 보호해야 -국정원 휴대전화 감청 [1] 운영자 14.04.16 504 2
762 광야에서 독충에 물렸다 운영자 14.04.14 716 0
761 어느 귀공자의 추락, 이혼 그리고 자살 (19) [4] 운영자 14.02.03 1466 3
760 어느 귀공자의 추락, 이혼 그리고 자살 (18) 운영자 14.02.03 928 0
759 어느 귀공자의 추락, 이혼 그리고 자살 (17) 운영자 14.01.29 858 1
758 어느 귀공자의 추락, 이혼 그리고 자살 (16) 운영자 14.01.29 792 1
757 어느 귀공자의 추락, 이혼 그리고 자살 (15) 운영자 14.01.27 881 1
756 어느 귀공자의 추락, 이혼 그리고 자살 (14) 운영자 14.01.27 858 1
755 어느 귀공자의 추락, 이혼 그리고 자살 (13) 운영자 14.01.24 814 1
754 어느 귀공자의 추락, 이혼 그리고 자살 (12) 운영자 14.01.24 716 0
753 어느 귀공자의 추락, 이혼 그리고 자살 (11) 운영자 14.01.21 773 0
752 어느 귀공자의 추락, 이혼 그리고 자살 (10) 운영자 14.01.21 685 1
751 어느 귀공자의 추락, 이혼 그리고 자살 (9) 운영자 14.01.21 946 0
750 어느 귀공자의 추락, 이혼 그리고 자살 (8) [1] 운영자 14.01.15 1215 1
749 어느 귀공자의 추락, 이혼 그리고 자살 (7) 운영자 14.01.15 778 0
748 어느 귀공자의 추락, 이혼 그리고 자살 (6) 운영자 14.01.15 755 0
747 어느 귀공자의 추락, 이혼 그리고 자살 (5) 운영자 14.01.06 843 0
746 어느 귀공자의 추락, 이혼 그리고 자살 (4) [1] 운영자 14.01.06 1010 3
745 어느 귀공자의 추락, 이혼 그리고 자살 (3) 운영자 14.01.06 1086 0
744 어느 귀공자의 추락, 이혼 그리고 자살 (2) 운영자 14.01.06 1042 0
743 어느 귀공자의 추락, 이혼 그리고 자살 (1) 운영자 14.01.06 1139 0
742 바둑과 시 [2] 운영자 14.01.02 484 0
741 인권변호사 [1] 운영자 13.12.31 559 0
737 변호사 소설가의 수난 [4] 운영자 13.09.18 1175 3
736 광야 블레싱- 5. 유대광야 운영자 13.08.01 597 0
735 광야 블레싱- 4. 느보산의 밤 운영자 13.08.01 393 0
734 광야 블레싱- 3. 도피성 운영자 13.08.01 437 0
733 광야 블레싱- 2. 미디언 광야 운영자 13.08.01 526 0
732 광야 블레싱- 1. 시리아 난민촌 운영자 13.08.01 1290 0
경(經)을 읽는 노년의 삶 운영자 13.08.01 814 1
730 고교동기 K의 불행 [1] 운영자 13.08.01 1733 3
729 검은 허수아비 50. 괘씸죄 [3] 운영자 13.08.01 793 1
728 검은 허수아비 49. 증인 조을제 운영자 13.08.01 544 1
727 검은 허수아비 48. 문학적 성취 욕구 운영자 13.08.01 476 1
726 검은 허수아비 47. 바뀐 재판장 운영자 13.07.31 516 1
725 검은 허수아비 46. 남은 멍에 운영자 13.07.31 430 1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