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스타트 라인에 서서
3. 그들을 위해 살겠다 - 노동자로서의 삶, 나에게 묻는다
1985년 6월 어느 날, 밤새 뒤척였다. 내일이면 인천 '경동 키친 아트' 공장에 출근을 해야 했다. 이 선택이 과연 최선일까. 나는 불면의 밤을 보내며 고민했다.
그리고 이튿날, 공장 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더 이상 4학년의 서울대생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스물 네 살의 공장 말단 생산직 젊은이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결심한 일이었지만 정작 결행을 앞두고 두려움과 기대로 가슴이 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평범한 대학생에서 야학과 투신으로 이어진 내 삶의 변화가 믿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위장취업'은 당시 학생운동을 했던 대학생이면 누구나 선택을 고민했던 길이었다. 당시 운동 진영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하던 학생운동만으로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19세기말 러시아의 청년들이 '브나로드(민중 속으로)'를 외치며 농촌으로 갔듯 80년대 한국의 대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또는 학교를 중간에 그만 두고 속속 공장으로 향했다.
학계의 추산으로는 그 숫자가 무려 1만 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도시산업선교회를 주도하면서 노동자 선교에 앞장섰던 인명진 목사님은 이러한 지식인들의 공장 진출은 세계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사건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당시의 시대 상황이 그러했다 하더라도 개개인에게 있어서 위장취업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고단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위장 취업은 새로운 세계에서의 인생을 의미했다.
공장으로 가는 것을 우리는 '투신'이라고 불렀다. 그때 우리들에게 투신은 삶의 목표였다. 캠퍼스 안에 갇혀 있었던 학생운동의 한계를 넘어서 진짜 세상에 뛰어드는 것이었고, 지식인의 나약하고 관념적인 운동의 한계를 넘어서 땀냄새 나는 민중의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투신의 과정은 곧 '존재 이전'의 과정이었다.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가졌던 특권과 우월의식을 포기하는 것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본격적으로 ‘운동’의 대열에 뛰어드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위장취업자가 되는 것에 대해 '혁명가'가 되고 싶은 일종의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냐며 비판적으로 보기도 했다. 과연 내가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이 도전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혹시 나에게 오만함이나 거짓 공명심이 있지는 않은가? 다시 나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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