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더운 여름날 밤, D.U의 한 아파트에서는 에어컨 실외기가 요란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후아, 시원해~!"
에어컨 앞에서는, 소녀가 양 팔을 벌린 채 냉기를 온몸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정말... 우리 딸, 씻고 나왔으면 머리부터 말려야 된댔죠? 엄마가 말려줄게요."
"네~."
하나코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온 소녀는, 엄마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따뜻한 바람이 머리를 간질여, 소녀는 조금씩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우, 우웅..."
"어머, 벌써 졸린가... 거의 다 끝났으니까 조금만 참아요, 우리 딸?"
"응, 알겠어... 후아암~!"
크게 기지개를 켠 후, 소녀는 다시금 하나코의 손길에 따라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머리를 말리고 난 후, 소녀는 바로 침실로 들어왔다.
"우리 딸, 벌써 자게요?"
"응, 씻고 났더니 졸려... 엄마도 잘 자..."
"네~."
하나코는 누워있는 소녀의 이마에 입맞춤한 뒤, 조용히 침실에서 나왔다. 헤일로가 꺼진 채 조용히 숨소리만을 내는 딸의 모습이, 하나코에겐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다만,
"으, 으음..."
소녀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덮고있는 이불이, 소녀에겐 꽤나 더웠다는 것이다.
"더워어어... 에잇!"
결국 이불을 발로 걷어찬 소녀는, 침대 한쪽에 있던 하니와 씨 인형을 안고 다시 잠들었다. 여기까진 그럴 수 있지만, 문제는... 소녀의 방 역시, 냉방이 켜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하나코는 딸을 깨우기 위해 소녀의 방으로 향했다.
"우리 딸~, 슬슬 일어나야죠? 아침 차려놨으니까... 딸?"
"콜록, 콜록... 어, 엄마..."
늦잠을 자는줄만 알았던 소녀는, 인형을 끌어안은 채 계속 기침을 하고 있었다. 얼굴도 조금 빨간 것이, 아무래도 감기인 모양이었다.
"어머! 우리 딸, 설마... 여보, 여보!"
아이의 상태가 심각한 걸 확인한 하나코는, 급히 거실로 달려나가 선생을 불렀다.
"어? 뭐야, 왜 그래? 애한테 뭔 일이라도 있어?"
"그게, 아무래도 감기에 걸린 모양이에요. 어제 에어컨을 켜고 자서 그런지..."
평소답지 않게 안절부절 못하는 하나코의 모습. 그런 하나코의 어깨를 토닥이며 안심시킨 후, 선생은 소녀에게 향했다.
"으으, 아빠... 나 어지러워... 콜록!"
"어디 보자... 어이구, 아주 불덩이네? 오늘은 집에서 쉬는 게 좋겠는데?"
소녀의 이마를 짚은 선생은, 그 작은 몸에서 나온다고 믿기 힘든 열기에 놀랐다. 아무래도 꾀병은 아닌 모양이었다.
"미안, 여보. 오전 동안만 애 좀 봐줄래? 나도 오늘은 반차 내고 일찍 올게."
"알겠어요, 잘 다녀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딸이 마음에 걸렸지만 스스로의 위치가 키보토스에서 어떤지를 알기에, 선생은 우선 샬레에 출근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나코 역시 그의 입장을 이해하기에 붙잡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금방 올 테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시구요, 잘 다녀와요!"
평소라면 딸을 등원시키기 위해 같이 손을 잡고 나갔을텐데... 선생은 텅 빈 손을 느끼며 현관을 나섰다.
"자, 아~ 해봐요."
"싫어~! 약 안 먹을... 콜록콜록!"
선생이 출근하고 난 후, 하나코와 소녀는 침대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소녀가 하나코의 해열제를 거부하는 탓이었다.
"해열제 안 먹으면, 몸이 계속 뜨거워서 잠도 못 잘걸요? 고집 부리지 말고 딱 한 입만 먹어요."
"알겠어... 냠. 으윽..."
스푼에 따른 딸기맛 해열제를 입에 머금은 소녀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시럽형이어도 약은 약인지, 소녀의 입맛엔 맞지 않았다.
"옳지~, 잘 했어요."
"으으, 맛없어..."
해열제가 잘 소화될 수 있게 하나코는 소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소녀는 그런 엄마의 가슴에 기대어 칭얼거렸다.
"그나저나 땀을 많이 흘렸네요... 엄마가 닦아줄까요?"
"응..."
여전히 의식이 몽롱한지, 소녀는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런 소녀를 잠시 눕힌 후, 하나코는 화장실에서 타올을 챙겨왔다.
"몸을 닦아야되니까, 옷을 벗어볼까요? 만세~ 해봐요."
"만세에..."
힘없이 팔을 올리는 소녀. 하나코는 그런 소녀의 머리 위로 티셔츠를 벗겨냈다.
"으으, 간지러..."
"조금만 참아요, 여기를 이렇게..."
작고 여린 몸에 마른 타올은 꽤나 거칠었다. 타올이 몸을 스칠 때마다 소녀는 움찔거렸지만, 그래도 축축함이 줄어드는 것은 기분좋았다.
"위쪽은 됐고... 바지, 벗어볼래요?"
"응..."
순순히 반바지를 벗어 침대 머리맡에 걸어둔 소녀는, 그 얇은 다리를 하나코를 향해 뻗었다. 하나코는 땀에 젖은 타올 대신 새 타올을 꺼내 다리를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이 정도면 얼추 끝났네요. 고생했어요, 우리 딸."
소녀의 옷을 입혀주며, 하나코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녀의 뻗친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보니, 컨디션이 조금 나아진 모양이었다.
다 쓴 타올을 내놓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하나코는, 곧 무언가가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는 감촉을 느꼈다.
"엄마..."
"어? 왜 그래요, 혹시 다른 데가 아프다던가?"
걱정하는 하나코에게,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안아줘."
"네? 뭐, 어렵지 않지만..."
양팔을 벌리며 다가오는 소녀를, 하나코는 품에 안았다. 열이 올라 평소보다 높은 소녀의 체온 때문에, 하나코는 가슴이 울렁이는듯도 했다.
"우, 우읍..."
"어? 딸,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가슴에 파묻힌 소녀가 신음소리를 내자, 놀란 하나코는 소녀의 얼굴을 확인했지만...
"엄마... 쭈쭈 때문에 숨 막혀..."
"아... 미안해요."
다행히도 별 일은 아니었기에, 하나코는 안심했다.
- 삑삑삑삑. 삐리릭!
"다녀왔습니다~. 여보, 나 왔어."
점심 때가 조금 지난 시각. 선생은 약속대로 반차를 내고 집에 들어왔다.
"여보, 여보? 이 시간에 어딜 갔지..."
집 안을 돌아다니던 중, 선생은 딸의 침실 문이 살짝 열려있는 것을 보았다. 혹시 하나코는 아직 소녀를 돌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기대를 품으며 침실로 들어온 선생은...
"여보, 나 왔... 어라?"
조그마한 침대에 서로 끌어안고 누워, 고른 숨소리와 함께 낮잠을 자는 모녀를 보았다.
"하핫, 이 사람도 참."
이불을 덮고 잠든 소녀와 달리, 하나코는 소녀의 머리에 손을 올린 채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 아이를 재우다 잠든 거겠지, 하고 선생은 추측했다.
"이러고 자면, 당신도 감기 걸릴텐데... 일단 아쉬운대로."
정장 외투를 벗어 하나코에게 덮어준 후, 선생은 부엌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 후, 먼저 눈을 뜬 것은 하나코였다.
"으음... 어머, 깜빡 잠들었네요. 시간이..."
"아, 당신 일어났어?"
하나코의 목소리를 들은 선생은, 부엌에서 아이 방 쪽을 보며 그녀를 불렀다. 앞치마를 두른 그는, 국자를 들고 무언가를 요리하고 있었다.
"어라? 당신 뭐해요?"
"보아하니 아직 식사를 안한 것 같아서, 집에 남는 재료들 가지고 계란국을 끓였거든. 애한테도 이게 좋을 것 같고."
그 말대로, 선생은 그릇에 계란국을 나눠담고 있었다. 그 황금빛 자태는, 자다깬 하나코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아, 그럼 사양 않고... 그 전에 잠시만요."
아이 방에 들어간 하나코는, 아직도 꿈나라인 소녀의 머리를 짚었다. 아침보다는 열이 내려간 소녀는, 편안한 표정으로 잠을 자는 중이었다.
"딸~, 아빠 왔어요. 인사는 하고 자야죠?"
"으, 으에...? 어, 아빠가!?"
아빠, 그 말을 들은 소녀는 눈을 번쩍 뜨며 무작정 방을 뛰쳐나왔다. 고개를 돌려 선생과 눈을 마주친 소녀는, 그대로 아빠의 품에 뛰어들었다.
"아빠~!"
"어, 어이구! 그러다 아빠 허리 빠진다! 욘석, 많이 보고 싶었구나?"
"응!"
선생을 보고 소녀가 밝게 웃어주었기에,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걱정하던 선생의 불안감도 눈녹듯 사라졌다.
"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 아빠 요리했어?"
"그럼! 우리 딸 아프지 말라고 계란국 끓여놨거든. 아직 점심 안 먹었지? 어서 먹자!"
"응!"
세 사람은, 그렇게 조금 늦은 점심을 먹었다.
[아직도 남아있다니, 이 녀석 제정신인가?]
[제정신으로 전쟁을 할 수 있을 거 같냐!]
식사에 뒷정리까지 마친 후, 선생과 소녀는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선생 취향의 고전 메카 애니였지만, 소녀도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여보? 애랑 놀아주는 건 좋지만, 계속 TV만 보면 안돼요? 환자에겐 휴식이 제일 중요하다구요?"
"기다려봐, 지금 중요한 장면이니까..."
하나코가 핀잔을 줬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선생과 소녀는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말, 못 말려..."
이마를 짚은 하나코는, '그것'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다시 들어갔다.
"콜록, 콜록!"
"어이구, 우리 딸 아직도 안 좋아?"
"응, 그래도 괜찮아. 기침이 조금... 콜록!"
"정말, 그니까 푹 쉬어야 된댔잖아요? 자, 여기요."
"어라? 엄마?"
아침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기침이 심한 소녀. 그런 소녀를 위해, 하나코가 부엌에서 잔 하나를 들고왔다.
"지난번에 담은 레몬청으로 차를 끓였어요. 우리 딸, 이거 좋아하죠?"
"어, 응! 고마워, 엄마."
"당신 것도 있으니까, 한 잔 마셔요. 의무라구요?"
"그래그래, 고마워 당신."
잔을 받아든 부녀는 레몬차를 한 모금 마셨다. 새콤한 레몬 향에서, 과일청 특유의 달콤함이 뿜어져나오는 느낌이었다.
"에헤헤, 맛있어! 목도 왠지 시원해졌고..."
"필요하면 얘기해요, 얼마든지 더 줄테니까. 물론 당신도요."
"고마워, 항상 사랑해."
"... 그런 이야기를 쉽게 하니까..."
잔을 들고 윙크하는 선생을 보며, 하나코는 조금 얼굴을 붉혔다. 그건 결코 감기가 옮아서는 아니었다.
애니메이션을 보며 레몬차를 비우고 난 이후, 소녀는 다시 잠에 들었다. 상비용 감기약을 먹은 탓이었다.
"코오오..."
"욘석, 잘도 자네."
이번엔 하나코 대신 선생이, 소녀의 손을 꼭 잡고 곁을 지켰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딸이, 선생에겐 너무나 소중했다.
"얼마나 크면 알까... 아빠가 이렇게나 사랑했구나, 라는 걸."
"후훗, 아마 지금도 알지 않을까요?"
혼잣말을 하던 선생 뒤로, 하나코가 다가왔다. 깜짝 놀란 선생의 동공은 마구 흔들렸다.
"뭐, 뭐야? 당신, 엿들으면 어떡해?"
"저도 딸이 걱정되는 걸 어떡해요? 그보다도..."
선생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하나코는, 아이의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러자 선생과 닮은 동글동글한 눈매가 드러났다.
"당신이 이 아이의 아빠라서 다행이에요... 저 혼자선, 힘들었을지도."
"그런 말 마. 당신이 있으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거야. 앞으로도 그럴거고."
"여보..."
고개를 돌려 선생을 마주본 하나코는, 그의 입술에 살짝 입맞춤했다. 아이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남편인, 그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 이건 한 방 먹었네?"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니까요?"
"그러면... 에잇."
이번에는 선생 쪽에서 먼저 다가갔다. 단순한 입맞춤과는 다른, 끈적한 교류가 찰나의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우, 우응...?"
그때, 헤일로가 살짝 빛나던 소녀가, 눈앞의 광경을 꿈이라 착각한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
이번 화는 좀더 일찍 써졌습니다. 만족스러운 내용이었을까요?
다음화에는 이전에 예고한 티파티 교류회 내용을 다룰까 생각중입니다. 기대해주시길.
댓글은 언제나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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