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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 실가진진室家溱溱: 마하키탄 남경성 이야기
(실가진진은 집안이 번창해지다 라는 의미입니다.)
지난번에는 세 편(006-008)에 걸쳐 중도의 1400년 전후 모습을 이야기했고, 또 네 편의 대극장(009-012)으로 명나라 사람들을 데리고 이 대성의 디테일을 만졌습니다. 이번에는 중도성보다 훨씬 더 기기묘묘한 1560년의 요 남경성을 다루는데, 그렇게 크게 다뤘다간 시간과 힘이 부족해지겠네요. 이 편에선 도시의 모습을 최대한 많이 전하고, 다음 편은 황궁 부분에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요 남경은 앞으로도 계속 출연 기회를 갖게 될 겁니다. 만약 서술이 미흡하여 세부 전개를 보고 싶다면 그 부분을 지적해 주십시오. 향후 다시 기회가 된다면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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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중도처럼 이야기는 마하키탄의 초기부터 시작되야 합니다. 1160년, 요나라 세조 안상 5년으로 돌아가보죠.
첫 번째 인더스 정벌에서 야율대석은 인더스 강 우안[1]을 따라 남하했습니다. 10월 말 어느 날, 탐마(순찰 기병)는 지친 주력군에게 마지막 민둥산을 넘으면 끝없는 바다가 있고, 산과 바다 사이는 남쪽 삼각주로 뻗은 맹그로브 숲이라고 말했습니다.
[1] 북방에서 내려오므로 우안=서쪽
인더스 강의 최북쪽 지류가 바다로 흘러드는 곳 숲 사이에 외딴 항구와 숲 속 나무마냥 삼각 돛이 돋아있습니다.
당시로선 바다는 요나라 젊은 세대에겐 신기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카툰성[2](현 친 톨고이 발가스)의 눈보라 속에서 태어나 승마술과 글, 춤을 배웠고, 뜨거운 바다(이식쿨 호)와 탈라스 강변에서 연애를 했으며, 자신이 남벌에서 본 대설산과 계곡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고요하게 끝없이 이어지는 푸른빛을 보고는 쩔쩔맸습니다.
[2] 원역사에서 거란이 초원에 세운 성이며, 야율대석이 원역사에서 요 멸망 직후 서쪽으로 갈때도 잠시 집결지로 쓰임. 약사 문서에서 '몽골초원 서부 통합'이 있으니 여기선 그대로 유지한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세조가 전군을 모아 "(우리는) 동해에서 태어나 지금은 서해를 향하고 있다. 말발굽이 닿는 땅은 거란인의 땅이 될 것이며 두 바다 사이는 모두 너희들의 봉읍이 될 것이다" 고 했겠습니까? 거란의 후손들은 만세를 외치며 사기가 크게 진작되어선 성 맞은편에 진영을 설치하고 참호를 파며 다음날 성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구에 있는 덕포德布(데부)라는 작은 도시는 다음날 날이 밝기도 전에 선물을 바치며 항복했습니다. 이리하여 성 안의 상인들은 재난을 면했고, 물론 각종 명목의 위로는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사진 속 데부 고도시는 오늘날 카라치 동쪽 근교의 밤보레 유적지로 아랍 제국이 남아시아에 처음 상륙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해 겨울 세조는 큰 병을 앓았고, 덕포 현지 아랍인 의사의 보살핌 덕분에 서서히 회복되었습니다.
데부 부근에서 강제로 머무르는 동안 이 작은 도시의 풍부한 세입는 야율대석을 놀라게 했으며, 이 지역의 풍부한 수확량은 수만 명의 대군을 무사히 겨울을 날 수 있게 했습니다. 그 해 겨울에 설립된 천막의 장성은 구르 칸에게 믿을 수 있는 기지가 되었으며, 한족과 위구르 관리들의 행정력을 바탕으로 신드 남부의 곡물과 여물에 항구에서 거둔 세금은 요군이 계속 싸우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2세기 말 거란의 황제들이 인도 남정을 시행할때 세조의 첫 남정을 참고하면서, 이 데부성은 마하 거란의 실질적인 남경이 되었고 요나라의 남천 이후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14세기 초에 이르면 7세기부터 끊임없이 사용되었던 남경 덕포부의 구 도심인 이 항구는 이미 가득 붐볐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인더스 강의 지류인 차라 강(遮羅河, 현재의 Gharo 강)이 가져온 토사가 완만한 물줄기에 쌓이면서 항구 맞은편 수면은 막혔습니다.
그래서 숙종 영태 연간(14세기 초)에 중도성 건설을 마친 요나라 공부는 남경 신도시 계획을 제시했습니다. 여러번의 탐사 후, 새 남경 성터는 구시가지 하류의 인더스강 삼각주와 모리천摩利川(현 Malir river) 사이로 채택되었습니다. 동서 양쪽 우수한 항구들 사이가 바로 신도시의 중심입니다. 도시의 구조는 중도와 비슷하되 약간 작으며, 한 변이 10리(당나라 기준)에 달하는 만달라 모양(원형) 성의 한가운데가 훗날의 황궁이 될 것입니다.
중도 건설 와중에 너무 많은 비용을 소모하기도 했거니와 중도 건설 중에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어 안달이었던 때와 달리, 새 남경은 일부 중요 지점에만 표식을 세우고, 구도시 주민들을 수용할 공간을 설정하며 기초적 도로와 수로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조정이 손을 떼면 모든게 자연스럽게 이뤄 질 것입니다.
그렇게 요 남경의 마구잡이식 성장은 그녀의 생애 첫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동서항 사이의 남대로는 곧 팔리에 걸친 상점과 시장이 되었습니다. 원래 남성 쌍궐로 예정되어있던 구주각九洲閣은 시선사市舶司가 오가는 선박을 감시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사무소가 되었습니다.이 긴 바자르를 둘러싸고 남북으로 무수한 갈림길이 뻗어나가 다양한 상품의 가게와 소음에 이상한 냄새까지 나는 작업장 등이 되었습니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상인들의 창고, 그리고 폭등하는 상선에 맞춰 해안에 끝이 보이지 않도록 가득찬 부두과 선대도 있습니다.
이 건물들은 2대도 채 되지 않아 남경성 남부를 가득 채웠고, 그 후 100년 동안 성벽을 넘어 해안을 따라 뻗어 나갔습니다. 북성은 바다와 너무 멀어서 아직도 농지와 황무지입니다. 100년 정도는 황제가 남순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원래 계획대로 황궁은 자연스럽게 건설되지 않았고, 여전히 진입이 금지된 초지였습니다.
남경 시선사는 황실의 부를 책임지는 기관으로서 상인들이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해안에 175척의 등대 3개를 세웠습니다. 등대는 거란인들에게는 금시초문이지만, 천방(아라비아)과 미수아(모술)의 장인들이 가져온 오래된 디자인은 앞으로 수백 년 동안 이 항구를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남경 공사사工事司는 이 광대한 대도시의 기반시설을 책임지는 기관으로서 성 북쪽의 모리천에서 물을 끌어오는 간선수로도 여러 번 확장해야 했습니다. 가뭄에 대처하기 위해 황폐한 북성과 궁궐 지역에 거대한 저수지가 많이 건설되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마구잡이식 성장의 결과는 계획상 만다라 모양의 성은 사라지고 해안에 동서로 거의 20리 가량의 거대한 항구 시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린 16세기에 이르렀고, 이는 남경부의 가장 번화한 시대 중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1560년 남경부는 사방팔방[3]에서 온 사람들의 도시였지만 한족의 후손이 대다수를 차지했습니다. 남경부의 90만 명의 호적 상 주민 중 약 60만 명이 한족의 후손입니다.
[3] 원문은 '오방출신 뒤섞인 도시' = '五方雜處的城市'
조정은 사람들이 거란인, 한족, 위구르족, 신드인[4]의 각 종족을 구별하는 걸 장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어를 할 수 있는 모든 신하들은 모두 '요나라 사람'으로 칭했습니다.
[4] 원문은 丹漢回竺단한회축. 각 민족 한글자씩 따왔고 위구르는 회족의 회回에서 따와 표현함.
한족의 후예들 역시 문화와 언어가 확연히 다른 몇 개의 큰 무리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인(漢人)'이라는 호칭은 우선 협소한 의미로는 야율대석을 따라서 서정한 군인과 문관의 후손에 속합니다. 그들의 조상은 모두 요동, 화북, 산서 등 요나라의 고토 출신이며 발해와 고려의 후손도 많습니다. 그들은 천축도(신드) 인더스 강 하류의 땅에 봉해졌고 많은 천축-한인 가문이 발전했습니다. 이 가문들은 종종 조정의 관직과 넓은 장원을 가지고 있으며 수백 년 동안 무성하게 번성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전에 대극장의 숨은 주인공인 사존경[사존경史敬敬, 자는 아주나, 1377-1445, 최종 관직은 금자영록대부金紫榮祿大夫, 예부상서, 첨요현백瞻諦縣伯-현 신드 자티)]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는 천축도(신드) 상덕군 공작의 방계 출신이며 그의 선조는 천조제天祚帝[5] 시기 옛 서경(지금의 산서 다퉁)의 요군 군교였으며 세조 야율대석을 따라 카툰성으로 가서 키르기즈(轄戛斯人)를 공격하는 전투에서 야율대석의 인정을 받아 상온詳穩직[6]에 올랐습니다. 이 가문은 16세기 중반까진 정치적으론 쇠퇴했지만 500년 동안 축적된 부와 국제적 배경을 바탕으로 금주(진저우)와 명나라와의 무역에 빠르게 뛰어들었습니다.
[5]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 정확힌 서요 이전 중원 시절 요나라
[6] 일종의 장군직
세조를 따라 남하한 고창 위구르인은 수백년 동안 거란인, 한인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중원 서북쪽 한인들의 혈통이 있건없건 상관없이 회인(回人)이라 불렸지만 한인이나 거란인과 다름없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현귀한(또는 파락호스러운) 요인들의 남경 저택은 보통 황궁 근처 서쪽 '인지방麟趾坊'에 집중적으로 거주합니다. 이곳은 남경부에서 유일하게 원래 계획대로 반듯한 거리입니다.
인지방麟趾坊 칙건원조사敕建圓照寺 금강옥좌탑. 1495년에 설립된 인지방麟趾坊은 전형적인 '여제식'입니다.
이후 백여 년이 지나 '송인'이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남송 때 해외로 무역을 나갔던 저장성과 푸젠성의 해상 상인들과 몽골에 의해 멸망당한 남송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의 언어는 '연운' 한족과 매우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생활 습관은 여전히 비슷하고 필담에도 지장이 없어 많은 송나라 사람들이 빠르게 재력이 부유하고 권력있는 세후에 들어왔습니다. 원나라 말기에 동토에서 대란이 일어나 복건, 저장, 장쑤성의 많은 한인들이 남경 송인들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연인燕人'[7]과 '송인'의 차이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 대도시의 25만~30만 명의 '송인'은 지위와 명망에 따라 일족끼리 모여 살고 있으며, 대시장(바자르), 서항西港, 삼보령(三寶嶺) 등의 블록에 모여 살거나 도시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7] 위에서 언급된 '연운', 즉 화북 출신; 송인은 당연히 강남 출신
(삼보령 지역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해안가이며 지금의 영정위성永定衛城[7]과 함께 15세기 초 명나라에서 정화 사절단이 닻을 내릴 때마다 머물렀던 곳입니다. 나중에 정화(鄭和)는 근처에 묻혔습니다. 울창한 정림과 영험하다는 정공사묘 주위에 명나라에서 온 상인과 선원들이 정착했습니다.)
이 송나라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은 가기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불각에 올라 쭉 바라보면 짙은 청색과 적색 기와와 작은 뜰이 있으면 송나라 사람의 집일 겁니다.
서항천후궁西港天后宫, 1421년 건립
이라크 상인들은 종종 서항 북쪽의 언덕부터 바자르 바로 옆에 모여 삽니다. 이라크(칼리프국)과 요나라 조정의 300년 간 동맹은 이라크 상인들에게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요나라의 바다 상인들과 함께 동쪽으론 말라카, 서쪽으론 페르시아만 또는 수에즈로 가는 항로를 장악하고 있었고, 단녕(1471-1509) 말기에 천방(아라비아)를 이긴 후 이 무역 동맹의 독점은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대조적으로, 그들의 무역 경쟁자인 천방인(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은 동쪽 도시의 혼잡한 블록에만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14세기부터 이 인도양 제1의 항구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불행히도 요나라와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마다 종종 요 시선사가 창고를 폐쇄하기도 전에 사업 상대에게 고용된 폭도들이 곧 몰려와 "이적을 물리치고 역적을 토벌하자攘夷討逆"고 외치며 그들의 화물을 약탈했습니다. 곧 천방과 페르시아 상인들은 마을에 흙 울타리를 치고 발루치족 '오랑캐' 무리를 고용하여 정원을 보호했습니다. 남경윤[8]에게 거금을 뇌물로 줘야만 간신히 낮고 두꺼운 흙벽은 남경부의 공인들이 허물지 않았습니다.
[8] 한성판윤처럼 남경부 최고 책임자 명칭이 윤尹이라 불리는 듯 합니다.
매주 금요일 바자르 북쪽의 북관 모스크에서 열리는 주무'아[9]만이 이 두 무리가 온전히 평화를 누리는 시기입니다.
바자 북부의 북관대사에 있을 때만 이 두 무리는 잠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9] 종종 언급된 금요일 예배, 이슬람교의 중요한 예배입니다.
금요일의 모스크星期五清真寺, 바자르 북2조巴扎北二条, 1381년 건립
푸린🔟의 상인들은 동서항 사이, 바자 남쪽의 좁고 긴 땅에 모였습니다. 만을 내려다보는 풍경이 그들의 고향인 콘스탄티노플의 금각만을 떠올리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남경 덕포부 신도시가 세워질 때부터 황실이 특별히 허가한 토지를 얻었고, 그들의 정착촌도 2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 拂菻, 동로마를 의미함
복림리福林里[11]의 중심에는 마제당摩濟堂이 있습니다.(메갈레 에클레시아Μεγάλη Ἐκκλησία의 음차일겁니다.) 60척의 황금돔 아래서 '푸린승'들이 향을 피우고 경을 부르는 법회는 항상 여러 민족의 아이들이 몰려와 뒤를 따라다닙니다. 이곳에 거주하는 5,000명의 그리스인들에게 이 세인트 토마스 성당座聖多馬堂은 에큐메니칼Ecumenical 총대주교청 산하 인도 정교회의 본당으로서, 그리스 공동체가 점차 지역 풍습에 동화되었던 16세기 중엽에 고향과 가장 강한 연결고리가 되었습니다.
[11] 로마를 뜻하는 한자어 拂菻과 병음이 같고 성조만 다름. 둘다 Fulin
세인트 토마스 바실리카使徒多馬 巴西利卡, 세계총대주교청 휘하 거란정교회 본당, 복림리, 1452년 건립
청모회라 불리는 유대인들은 바자르 근처의 복림리 동쪽 거리에 모여 살았습니다. 그들은 인도 하구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양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모회 전설에 따르면 그들의 조상은 솔로몬 왕 시대의 상인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그리스인들은 남경의 청모회는 수백 년 전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상인의 후손일 뿐이며 현지의 그리스인들의 역사보다 오래되지 않았다고 폭로합니다.
어쨌든 황제가 성을 옮길 때 그들을 그리스인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데부 구도시에 살묘 신드어를 사용했던 유대 공동체도 땅을 하사받았는데, 요인들은 이 마을을 죽학리竹鶴理(술홀術忽, Yahud에서 비롯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마네리 회당以馬内利會堂, 죽학리竹鶴理, 1430년 건립
삼보령 서쪽에는 십자가를 진 또 다른 무리가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온 이 불랑기인佛郎機人들은 남경 재건설 시기를 놓쳐서 성 밖에서 살 수밖에 없었고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많은 나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제국의 중추 행정 기구는 최근에야 그들을 구별했으며, 무슨 영길리인, 불란서인, 이대리인, 안대로서아인(안달루시아), 잡사제리아인(카스티야), 그리고 화란인(네덜란드), 이런 혀를 내두르게 하는 이름들은 정말 골치 아픕니다. 몇 년 전 영국 왕과 안달루시아 왕의 사절이 거란 궁정에 외교 대표를 상주시켜 달라고 각각 요청했습니다. 홍려시鸿胪寺[12]에는 전례가 없어 조정은 아직 토론 중 입니다.
[12] 중국의 외국 사신 접대 기구
남경 선박사는 정확히 파악한 후, 공문에서 중복되지 않으려 아예 '육부 불랑기'라고 불렀습니다. 이 불랑기 국가들이 서로 싸우고 때로는 걸걸하고 순종적이지 않기 때문에, 관청에서 그들에게 할당한 작은 항구는 바로 남경부 영정위永定衛와 수사영水師營의 포구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나 남경 시민들의 눈에 그들의 집단 거주 지는 각 나라와 가문의 다채로운 깃발이 계절풍을 맞으며 펄럭이기 때문에 '금번리錦幡里'로 불립니다.
금번리의 가장 큰 경치는 거대한 범선을 제외하면 '대십자사'입니다.이 르네상스식 바실리카는 가톨릭 인도 총대주교의 성당입니다. 요나라 사람들은 이 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별로 없지만 매년 섣달과 3월에 이 십자사에서 큰 대회가 있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으니 반드시 가서 구경하려고 합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대성당 聖巴尔多祿茂大教堂, 인도 가톨릭 대주교 대성당 天主教印度總主教座堂, 금번리錦幡里, 1551년.
종탑을 짓기 위한 모금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동쪽 항구 부근에는 수년간 진저우錦州 상로를 장악했던 주련국(촐라)의 타밀족 상인들이 모여 하늘을 찌를 듯한 신전을 건립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요나라와 주련의 관계 약화로 인해 그들은 점차 주위의 말라바르와 구자라트 상인들에게 양보했습니다.
브라흐마디슈바라 신전, 북백거리, 1319년에 지어졌지만 최근 파손되어 보수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번쩍번쩍한 상호와 저택, 관아에서 벗어나면 끝없이 펼쳐진 작은 동네들로 북적거립니다. 독특하고도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는 지역 외에도 남경에는 수만 명의 현지 마하키탄인들이 있습니다. 겹겹이 쌓인 흙벽돌집과 판자집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고, 그 안에는 제국 각지에서 온 서로 다른 계통의 언어들을 구사하며 남경에 기회를 잡으러 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멀리 온 벵골 노점상들은 남경부의 육류 이외의 식량 공급을 거의 통제하고 있으며, 신드와 펀자브에서 넘어와 일하던 마하키탄인들은 도시의 첫 번째 방직 공방의 주축이 되었며, 마라타 상인들은 새로운 세력으로 서해의 상로에서 일어서기 시작했고, 그들의 지위는 점차 상승하여 결국 완전히 새로운 사회 계층을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남경의 각종 대형 건축물
상단 지도의 원본
결론적으로 이 모든 떠들썩한 광경은 마침내 제국의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사람들을 1470년대에 끌어들일겁니다.
의종(야율운혜 耶律雲慧/Yelü Yunhui, 혹은 야율 마야날라데비Yelü Mayanalladevi, 1467-1509 간 재위)의 남경에 대한 애정과 그녀의 작은 남경 행재조정行在朝廷, 그녀의 사생활과 짧은 기간의 신정新政은 후대의 여러 역사학자들과 역사 발명가[14]들의 열렬한 화제였습니다.
[14] 영역자에 의하면 '역사발명가'는 현대 중국에서 말그대로 역사를 발명해버리는 사람들'이란 의미라고 합니다. 한국으로 따지면 "재야의 저명한" 사학자같은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물질문명사 시리즈로서 중요한 것은 그녀의 남경행재 황궁입니다.
도시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 건물은 너무 과하고 일탈적이라 여겨져 여제 이후 반세기동안 버려집니다. 그러나 1560년 이후부턴 동종 최초의 건물로 여겨져 관청건물과 부유한 상인들이 계속 모방했고, 동서양의 건축사학자들도 마하치단의 근세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건축양식으로 꼽았습니다.
(22장의 사진을 미리 가져왔습니다.)
다음 호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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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보면 알겠지만 이번장, 다음장이랑 다다음장(20~22)는 정말 원작자 카라의 장기가 제대로 발휘된 구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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