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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해 2

운영자 2010.08.20 10:09:02
조회 373 추천 0 댓글 2

    말을 전하는 그와는 허물없이 지내는 편이었다. 고교선배이기도 하고 함께 장교훈련을 받았었다. 그러니까 그런 말까지 전해 준 것이다. 나는 슬프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했다. 요정에 함께 따라가지 않았다고 해서 얻어맞기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따돌림을 받고 있었다. 마음속이 추웠다. 그 추위는 한순간의 술이나 여자로 따뜻해 질 게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꽁하게 선배 A에게 감정을 품었었다. 생각만큼 군대에 오래 잡혀있지는 않게 됐다. 

    나는 군대에서 다시 사법시험에 응시해 합격하고 제복생활에서도 탈출할 기회를 얻었다. 제대를 하고 법률사무소를 개설했다. 자유하기로 했다. 먼저 돈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카알라일은 속인의 속박을 면할 정도만 돈이 있으면 된다고 했다. 어떤 지위나 감투도 넘보지 않기로 했다. 하다못해 동창회 총무도 교회 집사 자리도 거절했다. 나는 굴 속의 가물치처럼 남과 높은 담을 쌓고 사무실 속에서 혼자 살았다. 주위와 담을 쌓고 뚜껑을 닫을수록 외부의 자극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서류를 접수하는 법원서기의 불손한 행동에도 마음을 다쳤다. 그 시절만 해도 접수대에서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부패한 공무원이 있었다. 

    법정에서 판사가 하는 막말을 듣곤 분노하기도 했다. 불경을 보면 나 같은 인간은 가장 옹졸한 타입이었다. 남에게 수모당하는 일이 있을 때 물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모두 다 흘려버리기 때문이다. 모래 같은 사람도 있다고 했다. 모래위에 쓴 글씨같이 우선 기분이 나쁘지만 조금만 지나면 다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같이 돌에 새긴 것 같이 잊지 않는 사람이 가장 나쁜 인간이라고 했다. 타고난 옹졸한 건 고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름대로 대처방안을 강구해 봤다. 어떤 모욕을 당하더라도 일단 백번정도까지는 참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생각해 보면 참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수모를 당했다. 

    변호사 간디도 기차에서 내동댕이쳐지고 마부에게 얻어맞았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도 성경을 보면 별 욕을 다 먹고 따귀도 맞았다. 남들이 그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다. 그걸 보면서 일단 백번정도 모욕은 참을 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공책을 한권 준비해서 수모를 당할 때마다 하나씩 써 나갔다. 일단 성급하게 화를 내는 걸 참는데는 조금 도움이 됐다. 간간히 변호사 모임에서 A선배를 보곤 했다. 그때마다 그가 나를 싫어하는 기색이 역연한 것 같았다. 상대방의 증오가 깃든 얼굴은 곧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생각이었다. 나도 선배인 A가 나를 때려주라고 했다는 말이 잊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났다. 또다시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자기는 곧 판사가 된다면서 재던 법무장교가 고등법원장을 마치고 대법관후보에 오른 걸 신문기사를 통해 봤다. 그 정도 지위에 오른걸 보면 그동안 인품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A선배역시 대통령 선거 때 텔레비전 뉴스에서 스폿 라이트를 비추고 있는 것도 봤다. 정계진출은 하지 않았지만 상당한 거물로 성장한 것 같았다. 다시 세월은 흘러가던 어느날이었다. 이메일을 열어봤더니 A선배의 글이 이렇게 와 있었다.


    ‘대한변협신문 1월4일자 쓴 글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경의를 표합니다. 항상 좋은 글을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저기에 엄변호사의 글을 대할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보면서도 이제야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우리 주위에 엄변호사님이 계신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새해에도 언제나 늘 푸르게 건강하시고 복많이 지으시고.’

    나는 순간 멍했다. 나를 때려주라고 한 사람의 글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워한다면 이런 메일을 보낼 리가 없었다. 순간 나의 잘못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이렇게 답장메일을 시작했다.


    ‘사과를 드려야 하는데 시기를 놓쳐서 30년이 흘러버렸습니다. 저는 이따금씩 선배님을 만나면 그 표정과 눈빛을 통해 제가 얼마나 버릇없고 건방진 나쁜 놈인가를 자각해 왔습니다. 그 원인은 저한테 전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30년 전 저의 경솔과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30년전 있었던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을 이렇게 정리했다.


    ‘옹졸했던 저는 선배님께 가서 사과 한마디면 끝날 걸 그렇게 하지 않고 속에 다른 마음을 품은 채 오랫동안 선배님을 뵐 때마다 그걸 떠올리곤 했습니다. 그러니 선배님께서는 제가 점점 더 건방지고 미운 놈으로 보셨을 게 당연합니다. 나 혼자 서러움에 그렇게 행동했었습니다. 그 후도 옹졸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늦었지만 제 잘못을 사과드립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후배 엄상익올림’

    다음날 다시 A선배로부터 답장이 왔다.


    ‘허허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군요. 결코 사과하실 일 없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엄변호사에게 섭섭한 감정이나 서운한 맘이 없습니다. 엄변호사가 당시 회식에 참석하지 않은 사실도 기억에 없습니다. 중간에서 김변호사가 전했다는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아마도 김변호사의 성격상 엄변호사에게 나를 빌어 짐짓 호기로 한 말일 것입니다. 그 김변호사가 이제는 세상에 없으니 대질(?)할 수도 없어서 안타깝군요. 언제 만나서 옛이야기 하며 한바탕 웃어봅시다. 그런데 앞으로 나의 눈빛과 표정관리를 잘 해야 할 것 같군요. (아마도 젊어서는 내 표정과 눈빛에 정나미 떨어진 사람이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정녕 쾌념치 마시라)’

    인간의 감정이라는 게 얼마나 부정확한지를 나는 깨달았다.


    수모를 당한 걸 쓴 공책을 더러 펴보면 그게 더 명확했다.

    당하고 와서 백지에 기록하는 순간 증오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걸 일년후에 다시 들쳐보면 어느새 나의 감정은 증발해 버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세월이 지난 후에 그걸 보면 나쁜 것은 바로 나였다. 상대방은 의식조차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인생 후반전에서 직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고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꾸고 자신의 삶을 정비하는 게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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