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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사무실과 큰 책상의 해독 2

운영자 2010.09.07 16:57:49
조회 373 추천 0 댓글 1


    임관 30년을 기념하는 법무장교 동기생들의 모임이 있었다. 이십대 중반 싱싱하던 홍안의 얼굴들이 이제는 모두 노인이 되었다. 죽은 친구도 있고 백발에 눈썹까지 신선같이 희어진 친구들도 있었다. 훈련소에 입소 당시 우리 30명은 모두 똑같은 심정적인 패배자였다. 사법시험을 보고 또 보다가 마지막까지 낙방을 한 사람들이었다. 군복무를 기피하다가 어쩔 수 없이 법무장교시험을 통해 군에 입대했던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을 차지해도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피하고 싶은 길을 맞이한 건 분명 심정적인 패배자가 맞았다.


    당시 우리들의 앞에 놓인 운명은 십년이상의 군복무였다. 우리들은 모두 꿈꾸던 궤도를 이탈한 떠돌이 별이었다. 흑은 백과의 대비를 통해 더욱 검게 보인다. 당시 우리들 30명은 판검사 자리가 이미 보장된 사람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던 어색한 융합이었다. 공통된 좌절을 공유했던 우리들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끈끈한 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행복한 날의 추억보다 함께 한 고통이 인간들을 더욱 밀착시키는 것 같았다. 지금은 명문법대 원로교수가 된 한 친구가 입을 열었다.


    “그때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했지만 살고 싶지 않았어요. 청춘을 모두 저당 잡힌 군대를 언제야  빠져나가나 하는 생각뿐이었으니까요.”
 
    그가 계속했다.


    “대학시절 운동권에 있으면서 투쟁을 하다가 군에 끌려 간 거죠. 내가 그때부터 할 수 있는 건 계속적인 공부였어요, 군에서 박사논문을 따고 유학을 하면서 십 여 년을 보냈어요, 그리고 제대 후 교수로 임용이 됐죠.”
 
    살 줄 아는 사람에게 암흑기는 없었다. 다음은 변호사를 하다가 법대학장이 된 친구 차례였다. 

    “저는 경북고등학교와 서울법대를 다닐 때까지는 주위에서 모두 칭찬만 하면서 떠받들어주었어요. 지방에서는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내 인기가 대단했어요. 그러다가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군에 입대하니까 나보고 얼굴이 검고 못났다고 ‘이디아민’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면서 놀립디다. 아프리카 출신 이디아민 같이 못생겼다는 소리죠. 그 별명을 들을 때까지 나는 내가 못생겼다는 걸 한 번도 깨닫지 못했어요, 공부 잘하면 잘생긴 걸로 우리 고향에서는 통했으니까. 실패를 하고 군에 입대한 그때야 비로소 전혀 다른 입장이 된 제 현실을 알았었죠. 그게 세상이더라구요.”
 
    그 역시 30년 세월동안 훌륭한 학자가 되어 있었다. 겸손하게 다시 시작한 것이다. 동기생들은 한 명씩 30년 전 입대 당시 숨겼던 감정들을 솔직히 털어놓으면서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군에서 다시 공부를 해서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오랫동안 검사생활을 하던 동기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강원도 전방에 배치됐었는데 한 달 월급이 구 만원이었어요. 그 돈으로 생활을 하면서 애도 낳아 길렀는데 산부인과에 가면서 나는 참 가난 하구나 생각했었죠. 그러나 저러나 따져보니까 나는 한마디로 참 나쁜 놈입디다”
    그가 한마디로 자신의 삶을 압축했다. 모두가 허허하고 웃었다. 서로 잘난 척 많이 아는 척 하는 사회에서 자신을 나쁜놈이라고 진실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음은 대법관이 된 동기생 차례였다. 당시 그는 법원사무관시험에 합격했다가 법무장교로 온 사람이었다. 가장 뒤에 있던 것 같은 사람이 가장 빨리 대법관이 됐다. 그래서 인생은 살아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대법관이라고 점잖 떨면서 할 말이 뭐 있겠어? 그냥 훈련시절 하던 노래나 한 곡 뽑을게, 이젠 목소리도 늙어서 잘 안 돼”
 
    그는 행군할 때 부르던 가곡을 하나 늘어지게 뽑았다. 젊은 시절부터 법관생활만 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태도가 틀에 박힌 경우를 흔히 본다. 친구들이 욕을 하면서 친근감을 보여도 당황하고 어색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고생을 함께한 동기생 대법관은 달랐다. 거침이 없는 태도였다. 대법관 자리도 잠시 입었다 벗어놓는 옷에 불과할 뿐이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젊은 시절의 고난은 가장 큰 축복인지도 모른다. 낙타같이 한 걸음 한걸음 인생을 걸어간 동기생들은 모두가 진정한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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