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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속의 밀과 가라지 - 6 아름다운 판결문

운영자 2010.09.02 12:12:21
조회 699 추천 0 댓글 1

 ‘가을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쫒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가져야 한다’


  2007년 1월경 인터넷에 잔잔히 퍼져나간 판결문이다. 아름다운 판결이라고 이름이 붙은 그 판결문을 쓴 판사 덕에 칠십 넘은 노인이 겨울을 훈훈하게 보내게 됐었다. 76살의 노인은 딸이 보내주는 이십 만원으로 한 달을 사는 고단한 삶이었다. 그는 동네아파트 공사장의 청소 등 허드렛일로 생계를 꾸려갔다. 늙었다는 이유로 그에게 막일이라도 주는 곳은 거의 없었다. 하루 세 끼 중 한 끼는 봉사단체가 주는 밥을 얻어먹었다. 난방은 한 군데, 밤에만 튼다. 그의 한 달 전기사용료는 1980원이었다. 그의 아내가 중병이 났다. 잠시도 옆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그는 딸을 심부름 보내 간신히 임대아파트를 얻어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주택공사로부터 나가라는 소송을 당했다. 딸이 주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법입주라는 것이었다. 아내 병수발 때문에 시간이 없어 딸이 대신 계약을 하라고 한 게 화근이었다. 재판장이 그에게 물었다.


 “추운 겨울인데 혼자 사는 노인이 무슨 돈이 있겠어요.”

  재판장은 가난한 노인을 대신해 직권으로 소송구조를 신청했다. 노인 대신 변호사를 선임해 준 것이다. 판결을 선고하면서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계약은 딸 명의로 맺었지만 병든 아내의 수발을 위해 자리를 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딸 명의의 계약은 법 지식의 부족으로 벌어진 실수로 판단됩니다. 노인은 실제로 임대아파트에 살고 또 보증금도 본인의 돈을 냈습니다. 사회통념상 실질적인 임차인으로 충분히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적으로도 임차인으로 보는 것이 공익적 목적에 맞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문서를 최고로 생각하는 다른 판사들과 달랐다. 본질을 보는 판관이었다. 그는 판결문에 또 다른 이런 아름다운 흔적을 남겨놓았다.


 ‘가을 들녘엔 황금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엔 빨간 감이 익어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한다. 법의 해석과 집행도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가지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국민들을 정서적으로도 설득하기 위해서는 수필 같은 판결문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맞는 얘기였다. 판사들의 문장실력이 짧아서 무죄판결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불만들도 있었다. 일제시대까지 법대가 아니라 법문학부였다. 그의 아름다운 판결문을 오랫동안 법관생활을 한 사람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봤다.


 “쓸데없는 사족을 그렇게 붙일 필요가 있을까?”

  그게 일반법관들의 고정관념이었다. 말의 사회에서는 말같이 말하고 말같이 행동해야 한다. 거기서 인간의 모습을 보이면 배척당하고 미움을 받는다. 그게 세상이다. 그러나 좋은 건 좋은 거다. 아름다운 판결을 쓴 그 판사를 법정에서 여러 시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다른 법정의 판사에게 들렸다가 그 판사에게로 갔었다. 똑같은 재판장이면서도 두 판사의 태도는 너무나 달랐다. 먼저 들린 다른 법정에서였다. 재판장은 당사자들마다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가 당사자 한 사람을 부르더니 손에 서류뭉치 하나를 들고 흔들어보였다.


 “당신이 이거 냈지?”

  재판장은 화가 난 어조였다.


 “그렇습니다.”

  당사자가 기어드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많은 걸 내가 다 읽으라고 낸 거야?”

  역시 반말이었다.


 “-------”

 “이제 그만 좀 써, 알았어?”


  그는 교만한 재판장이었다. 연이어 아름다운 판결문을 쓴 재판장이 진행을 하는 법정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는 온유한 태도로 당사자들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너무 초과되면 이렇게 양해를 구했다.


 “하실 말씀이 많을 겁니다. 그렇지만 법정에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을 글로 써서 재판부에 제출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무리 그 양이 많아도 꼭 읽을 겁니다.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판사도 명품이 있다. 해골 같은 법리에 따라 짧은 시간에 수십 건 수백 건을 처리하는 판사가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주느라고 밤늦게까지 법정에서 고생하는 판사를 무시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법적인 관점이 동시에 법의 맹점이라는 걸 봤다. 천정만 보면 바닥이 안보이기 때문이다. 인간다운 판사들을 무능으로 매도하는 건 또 다른 교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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