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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훈련소 시절

운영자 2010.09.09 15:06:51
조회 657 추천 0 댓글 4


    기억 저편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훈련소 생활이 서서히 푸른빛을 띤 새벽여명처럼 어슴푸레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던 31년 전 8월의 마지막 밤이었다. 나는 녹초가 되도록 기합을 받은 후 훈련소의 막사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병영의 첫날밤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나와 볼을 적셨다. 나의 청춘의 꿈은 이제 끝이 났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장기 직업장교가 된 나는 언제 군을 빠져 나갈지 모르는 길고긴 운명의 시작이었다. 평생 제복 속에 영혼이 갇혀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바라던 길이 아니었다. 빨리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출세하고 싶었다. 복수하듯 잘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속물을 행운의 여신이 싫어한다는 걸 그땐 몰랐었다. 실패하고 또 실패했다. 남은 것은 운동과 영양부족으로 개구리같이 튀어나온 배와 가는 다리를 가진 몸뚱이였다. 병까지 얻었다. 간염으로 눈 흰자위까지 노랗게 변해 있었다. 나는 항상 피곤했다. 암자의 뒷방에서 이상의 ‘날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자고 또 잤다. 죽음 같은 잠이었다. 앞날이 없었다. 취직자리가 없었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가느다란 구원의 밧줄 하나가 내려오듯이 직업 법무장교 시험공고가 났었다. 나는 그 밧줄에 허겁지겁 매달렸다. 백수신세와 기피하던 군복무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등산 기슭의 바람 부는 벌판위의 요새 같은 병영을 찾아갔다. 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머리부터 빡빡 깎기 위해 녹슨 콘센트 막사 앞에 줄지어 앉았다. 심술궂게 쏟아지는 늦여름의 독기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거기 모여든 30명은 좌절과 패배의식을 공유한 비슷한 처지였다. 그때 앞에 앉았던 친구가 갑자기 청승맞게 노래했다. 

    “울도 담도 없는 곳에서 시집살이 삼년 하니”
 
    민요인 ‘진주 낭군가’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한과 서글픔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윽고 나는 빡빡 머리통이 되고 헐렁한 군복을 받아 입었다. 다음날부터 먼지가 가득한 연병장에서 엎드려 기고 굴렀다. 땀이 말라 소금이 되어 얼굴에 하얗게 달라붙었다. 빨간 모자를 쓴 교관들이 눈알만 돌려도 혼을 냈다. 밤마다 철모에 무거운 총을 메고 연병장을 혼자 뛰었다. 내가 벌점이 가장 많았다. 몸이 아픈데 그걸 요령피우는 걸로 오해들을 했다. 지휘부로 가서 당당하게 나중에 훈련받겠다고 말하고 돌아가겠다고도 했었다. 시간이 가면서 함께 훈련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내무반의 정이라는 인물이 먼저 눈에 띄었다. 그는 연병장에서 십 분의 짧은 휴식시간만 되면 포켓에서 작은 책자를 꺼내 보았다. 밤이 되어 모두 녹초가 되어 잠에 빠질 때면 그는 막사의 샤워장에 가서 얼음같이 찬물로 몸을 닦았다. 그리고 돌아와서 머리맡에 있던 두툼한 책을 잠시라도 꺼내 보곤 했다. 그건 독서가 아니라 그만의 성스러운 의식 같았다. 어느 날 혼자 내무반에 있을 때 그의 책을 보게 됐다. 주석 성경이었다. 수도사 같은 그에게서 나는 잔잔한 감동을 받고 있었다. 어떤 환경에 처해도 그는 살 줄 알았다. 나도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다음날부터 나는 진중문고에서 포켓소설들을 꺼내 쉬는 시간이면 읽었다. 언젠가는 문학을 하고 싶었고 훈련소의 소중한 경험들을 형상화 하리라고 마음먹었다. 훈련소안의 행복을 찾기 시작했다.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작품이 떠올랐다. 수용소군도 안에서도 숨겨놓은 빵 한 조각으로 또 다른 행복을 만들 수 있는 게 인간이었다. 또 다른 박이라는 훈련동기생의 행동을 발견했다. 그는 틈만 나면 ‘목련’이란 가곡을 불렀다. 다른 사람이 신음할 때 그는 가곡으로 절규를 대신했다. 그는 속으로 피를 흘려도 겉은 항상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었다. 그 역시 계속 고시에 실패하다가 법원사무관시험에 합격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법무장교시험이 다시 공고되는 바람에 군의 직업 장교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렇게 모두 인생의 궤도가 수정되고 있었다. 하루 종일 군가를 부르면서 산을 오르고 해지는 들길을 행군하면서 나는 조금씩 깨달아 갔다. 막사로 돌아오는 길옆에 가난한 달동네가 있었다. 석양 무렵 이면 반쯤 열려진 판자 쪽문 안에서 콩나물국을 끓이는 구수한 냄새가 피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콩나물국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걸 처음 알았다. 병영의 식당에도 콩나물국은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따뜻한 사랑이 섞이지 않았다. 나의 욕망은 점점 단순해졌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한 후 자장면 한 그릇 먹으면 행복할 것 같았다. 제복과 명령에 꽁꽁 묶인 군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의 의미를 알았다. 살얼음이 얼기 시작할 무렵 동복 계곡의 유격훈련장에서였다. 화장실 아래쪽에 더러운 물이 괸 웅덩이가 있었다. 대위계급장이 빛나는 교관이 나보고 그 물위에 엎드리라고 명령했다. 나는 허리를 굽혀 엉거주춤 무릎을 꿇고 양팔을 뻗었다. 

    “배를 물위에 좍 깔란 말야! 새끼야.”
 
    공포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물위로 쭉 몸을 뻗었다. 얼음같이 찬 더러운 물이 얼굴과 배를 적셨다.

   
“이번에는 돌아누워.” 
    나는 명령대로 따랐다. 초겨울의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냥 그렇게 가만히 누워있고 싶었다. 
   
    “이제 일어서.” 
    교관이 명령했다. 나는 똥물에서 일어섰다. 그가 군화발로 나의 정강이를 까면서 말했다. 

    “앞으로 확실히 훈련에 임한다. 알았나?” 
    체력부족을 그는 요령을 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겁주는 교관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이상했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담담한 눈빛이었다. 그의 눈에서 가학적인 잔인한 쾌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단지 기계적으로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 같았다. 그를 미워하거나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감정을 유발시키려고 연출하는 장치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똥물 속에 그동안 내면에 가지고 있었던 지저분한 욕망들을 털어내 버리기로 했다. 그해 겨울은 몸도 마음도 추웠다. 우리들 30명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손수건만한 양지를 서로 탐했었다. 그리고 30년이 흐른 지난해 연말이었다. 이제 노인이 된 우리들은 임관 30년 자축기념회를 가졌다. 사회자로 나선 군대 훈련 동기생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시절 참담한 심정은 그 누구나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언제 군을 빠져 나가나 모두 그 생각부터 하고 있었죠. 그사이에 우리 30명은 참 발전을 많이도 했습니다. 투 스타인 장군을 세 명이나 배출했습니다. 여러 명의 부장판사와 검사장 외에 대법관과 국제형사재판관도 탄생했습니다. 헌법재판소에서도 차관급으로 아직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국 거대 로펌의 대표변호사들과 법과대학교수들도 여러 명 배출됐습니다. 한 명의 낙오도 없었습니다. 이제부터 각자의 소감을 한 번씩 들어보기로 하죠. 먼저 박시환 대법관부터 얘기해 봐요.” 

    대머리에 나이 지긋한 남자가 일어섰다. 그가 항상 미소를 지으면서 ‘목련’을 불렀던 훈련동기생이었다. 

    “아픔과 절망을 같이했던 우리사이에 무슨 긴 형식적인 말 이 필요하겠어요?  그때 부르던 목련이나 다시 한 번 부를게, 그런데 이젠 늙으니까 목소리가 아주 가버렸어.”
 
    그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빠진 머리와 굵게 패인 주름살 뒤쪽의 표정은 아직도 이십대의 미소 그대로였다. 

    “다음은 헌법재판소의 정해남씨가 한마디 하지.”
 
    밤이 되면 얼어붙은 물로 몸을 닦고 성경을 읽던 인물이었다. 그가 덕담을 한 다음은 법대학장을 하는 훈련동기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명문 고등학교와 대학교 다닐 때 모두들 나를 추켜 주었었죠, 그러다 군대 가서 몰골이 형편없어 지니까 나보고 ‘이디아민’이라는 별명까지 붙이면서 놀려대더군요, 그때까지 나는 선망의 눈초리만 받았지 그런 모멸적인 별명은 없었거든, 입장에 따라서 그렇게 대접이 달라지는 게 세상이더군요, 중위로 임관했을 때 월급이 9만원이었어요, 그 돈으로 애들도 낳아 기르면서 그 굴레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훈련소시절이나 가난했던 장교시절 자체도 아름다웠던 삶이었어.” 
    훈련소시절의 고통이 촉매가 되어 우리들은 서로서로 따뜻한 마음들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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