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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판사의 문학 판결문

운영자 2010.09.16 16:51:24
조회 1034 추천 0 댓글 4


    원로 소설가 정을병씨는 5.16혁명정부가 만든‘국토건설단’의 강제노역 체험을 소설로 썼었다. 그 댓가로 문인간첩이 되어 징역을 살았고 그 생활이 또 소설이 됐었다. 그는 작품을 위해 몸을 던졌던 예술지상주의자다. 

    칠십 노인인 그는 얼마 전 법정경험을 소설로 만들다가 내게 물었다. 판사들이 내면을 문학적으로 표현할 능력이 있느냐고. 예전에는 법문학부라고 해서 대학에서 법학과 문학을 함께 공부시켰는데 지금은 왜 법만 외우게 해서 수학답안지 같은 판결문을 쓰게 하느냐고 따졌다. 법조문의 숫자나열은 문제를 복잡한 공식에 따라 잘 풀어간 수험생들의 획일적인 답안 같다는 것이다. 법원도 판결문에 창작성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는 모순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무죄가 많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판사들의 문장력 부족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미국의 판결문 중에는 문학 작품 같은 것들이 많더라는 것이다. 판결문은 땀 냄새와 눈물, 고뇌하는 판사의 모습이 들어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견해였다. 문학의 거장다운 독특한 시각이었다. 한국행정학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법원에 대한 신뢰도가 2007년에는 48%로 떨어졌다. 그 주요이유가 판결문이 국민을 납득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증거법과 판례 등 전문지식을 모르니 납득이 갈 수가 없다. 이런 속에서 변화의 조짐을 알리는 고등법원 판결문 하나를 발견했다. 그 판결문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법은 미리 만들어두는 기성복 같은 것이어서 예상을 넘어 팔이 더 긴 사람도 있고 짧은 사람도 있다. 그럴 때 당신에게 줄 옷은 없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다소 번거롭더라도 옷의 길이를 조금 늘이거나 줄여서 수선해 줘야 할 것인가? 입법부가 만든 법률을 최종적으로 해석하고 집행하는 법원이 어느 정도의 그런 수선의무와 권한은 있다고 생각 한다’


    법의 철학이 강하게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사건내용은 간단했다. 아픈 아내를 간호하던 노인은 보증금을 딸에게 건네주면서 대신 가서 임대아파트를 신청하라고 시켰다. 전신이 마비된 아내의 옆을 잠시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딸은 자기이름으로 계약서를 썼다. 그 후 병든 아내가 먼저 죽고 홀로 남은 칠순노인에게 주택공사가 나가달라는 소송을 제기 했다. 일심법원은 계약서상 임차인이 딸이기 때문에 노인의 퇴거를 명령했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형식적인 계약서보다 본질을 봐야 한다면서 노인의 편을 들어줬다. 판결문의 마지막에는 사건을 바라보는 판사의 내면이 시처럼 곱게 담겼다.


    ‘가을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엔 빨간 감이 익어간다. 그러나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를 원한다.’


    문학보다 더 고운 법의 향기였다. 획일화된 관례의 틀을 깨는 쉽고 신선한 문장이었다. 국민들이 요구하는 판결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정의는 판사보다 당해본 사람이 사실 더 민감하다. 상처받은 마음에 대해 법에서 한마디 위로받고 싶은 심정들이 더 많다. 싸움 중에 길가는 사람에게 하소연하고 싶은 심리와 마찬가지다. 쏟아지는 사건 속에서 그럴 여유가 없다는 항변이 있을 수 있다. 정교한 사회과학에 사족을 달 필요가 없다는 메마른 반대논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법원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창은 판결문이다. 법 논리사이에 따뜻한 한 단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건 바위틈에 핀 작은 제비꽃 한 송이 같을지도 모른다. 그 제비꽃이야말로 검은 법복 속을 흐르는 판사의 개성이고 따뜻한 체온이고 향기로운 인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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