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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되는 법

운영자 2010.08.26 15:04:29
조회 397 추천 0 댓글 0

  얼마 전 텔레비전 뉴스에서 동기동창인 교수가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잠깐 나왔다. 나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갑자기 그의 모습에서 노인을 보았기 때문이다. 건강도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항상 에너지가 왕성하던 친구였다. 그의 모습은 곧 나의 거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주 보는 친구가 아니면 오랜만에 만나도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 갑자기 상대방의 얼굴이 어릴 적 친구가 아니라 이상한 할아버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알아채기도 전에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다. 어느 날 오후의 지하철 안에서였다. 책을 읽다가 무심코 앞에 선 할머니를 발견했다. 미안해서 얼른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그 할머니는 손을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에요, 저보다 나이가 더 위인 것 같으신 데요.”

  나는 깜짝 놀라면서 그 할머니를 다시 보았다. 입술가에 깊이 패인 고랑이 깊었고 윤기를 잃은 피부에 분이 허옇게 말라붙어 있었다.


 “무슨 말씀을요? 그 쪽이 훨씬 더 드신 것 같은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실례의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부인했지만 남이 보는 나는 그렇게 늙어버린 게 맞는 것 같았다. 어느새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청바지에 통기타음악을 즐기면서 생맥주를 마시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 느낌이다. 그 시절 청춘의 우상인 가수 김세환씨가 텔레비전 프로인 ‘체험 삶의 현장’에서 일을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일을 시키는 사람에게 “여보슈, 내가 이제는 환갑이 넘은 노인이오, 아이구 힘들어.”라고 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은 사이에 인생의 겨울이 다가오는 느낌이다. 경기중고등학교를 나오고 일류대학졸업장에 좋은 직업 그리고 사회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아름다운 날들을 다 놓친 것 같다.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를 보고 부드러운 살결을 만지는 행복을 잃었다. 그 시절은 다른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가까이 있는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파란 하늘에 떠가는 하얀 구름을 보지 못했다. 인생은 경주가 아니라 한걸음 한 걸음 음미하는 여행이라는 걸 전혀 몰랐었다.


  얼마 전 선배들과 점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였다. 그중 변호사사무실을 그만두고 은거를 하던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선배 한분을 만났는데 나이가 구십 오세야. 칠십대에 인생을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자식들에게 재산도 분배하고 사회활동도 모두 정리했는데 그 후에도 지금까지 이십 오년이나 더 살아왔다는 거야, 자기도 이렇게 오래 살지는 정말 몰랐다는 거야. 암에만 걸리지 않는다면 당장 우리도 오래 살 위험성이 있어. 우리시대에 장수하는 건 축복이 아니라 어쩌면 저주일지도 몰라.”

  옆에 있던 선배들이 모두 동감하는 눈빛이었다. 다른 분이 그 말을 받았다. 그 분 역시 법조계의 명사였다.


 “요즈음 신문을 보면 신영철 대법관 문제가 나오는데 나이가 오십 육세로 나오데, 예전에는 그 정도면 늙어보였는데 나이 먹어 보니까 지금은 그런 새파란 젊은 친구가 무슨 재판을 하나 싶어.”

  늙음이라는 것은 상대적이었다.


 “그러면 늙으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내가 선배들에게 물었다.


 “구십 오세가 된 그 분은 나이 구십부터 새로 독일어공부를 시작했다는 거야. 그게 벌써 오년 째가 되는데  상당히 진도가 나갔다고 그러더라구.”

  은거를 하던 그 선배도 생각이 달라진 표정이었다. 그가 계속했다.


 “나도 이제 집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활동을 하기로 했어,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미술 강좌에 나가서 배우니까 참 좋더라구. 변호사 자격이 있으니까 앞으로는 무료변호라도 하면서 일을 하고 사는 게 좋겠지?”

  자기 능력에 맞는 일은 노년의 삶을 활기차게 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스코트 니어링은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은 사람이 늙는 것을 막는데 도움을 준다. 일이 곧 내 삶이다. 나는 일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다. 일하는 사람은 결코 권태롭지 않고 늙지 않는다. 희망과 계획의 자리에 후회가 들어설 때 사람은 늙는다. 일과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늙음을 막는 가장 훌륭한 처방이다’


  일자리가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 나는 떠올리는 얘기가 있다. 몸이 불편한 노파가 매일 밤 도로로 난 창가에 등불을 놓고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그것은 그곳을 지나가는 여행자를 위한 것이었다. 먼 길을 암흑 속을 걸어오는 사람을 맞이하는 불빛이었다. 자연의 위압 속에서 조그마한 빛이 보일 때 여행자들은 인간의 온화한 정에 포근함을 느낀다.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는 노파였지만 타인에게 단지 등불을 비춰준다는 것으로 자신이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으로 행복감을 느꼈다고 한다. 나는 요즈음 인생의 세 번째 단계의 계획을 세우느라고 바쁘다. 첫 단계는 남들같이 공부하고 직업을 가지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작가의 삶이었다. 작가가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었다. 매일같이 조각시간을 이용해서 책을 보고 틈틈이 글을 쓰면서 끊임없이 나름대로 준비를 해 왔다. 나는 안경알을 갈아 생활비를 벌면서 철학을 하는 스피노자 같은 사람을 좋아했다. 진심으로 철학 자체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이름을 얻고 상을 받을 욕망이 없이 하는 글 작업은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만드는 아이의 놀이같이 재미있었다. 세상에서 삼류라고 하든 사류라고 하든 자기만의 삶을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이제 노년기에 접어든 지금은 인생의 마지막 단계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 나는 ‘노인이 되는 법’을 연구하고 있다. 일본작가 소노 아야코가 쓴 ‘계노록’이란 책을 여러 번 봤다. 그녀는 노년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노년이란 언젠가는 몸이 말을 안 듣게 되고 눈이 안보이고 귀가 안 들리고 몸의 한 부분을 쓸 수 없게 되는 걸 의미한다. 머리의 회전도 나빠지게 되는 그런 것들을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다음은 죽음이었다. 오십이 넘으면서 자잘한 병들이 어김없이 그렇게 나를 찾아왔다. 백내장이 와서 시력이 극도로 나빠졌었다. 수정체를 바꾸어 버렸다. 망막이 부어올라 물체가 안보이기도 했었다. 맹인이 된다면 차라리 죽어버릴까 하고 생각을 해 본적도 있었다. 통풍으로 걸을 때마다 다리가 바늘로 찌르듯 아픈 적도 있었다. 보고 걸을 수 있다는 자체만 해도 행복인 걸 뒤늦게야 알았다. 몸에 돌이 생겨 요관을 꽉 막았을 때는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진땀을 흘리면서 그 고통의 의미를 하나님께 물어보았다. 조그만 돌 하나에도 어쩌지 못하는 나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았다. 암의 의심이 있는 혹이 뱃속에 있어 긴 시간 수술을 한 적도 있었다. 늙음과 죽음이 다가온 걸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들을 뛰어넘으려거나 도망쳐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해결이란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미리미리 늙는 것과 죽음에 대해 친숙해 지는 편이 현명할 것 같았다. 나는 요즈음 화장실에 가서 문을 꼭 닫고 일을 보는 습관부터 다시 가진다. 그게 노인의 첫 번째 징조중의 하나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마지막을 기계들이 가득한 병원 중환자실에서 생명을 연장하면서 죽고 싶지 않다. 음식대신 약물을 투입해서 세포가 수포가 되는 현상이 싫다. 그래서 가족에게 목에 구멍을 뚫고 산소와 음식을 넣을 정도가 되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여행을 할 때는 꼭 화장동의서를 써서 지갑에 넣고 다닌다. 시신이 관에 실려 비행기를 타고 오려면 법적으로 복잡하기 때문이다. 동의서 한 장만 있으면 현지에서 재가 되서 간단히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죽으나 상관없을 것 같다. 요즈음은 평생 가장 자유롭고 즐거운 시간 같다. 아무것에도 더 이상 매일 것이 없다. 어떤 의무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나머지 인생을 하루하루 금싸라기 같이 귀하게 살고 싶다. 세상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야망이 아닌 보람으로 하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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