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사만큼 동물에 진심인 사람이 있을까. 동물병원뿐 아니라 공항과 연구소, 심지어 일반 회사에서도 동물 건강과 복지 일선엔 늘 수의사가 있다. 그런데 잠깐, 병원이 아닌 공항과 일반 회사에도 있다고?
동물병원에만 수의사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우리 일상 곳곳의 여러 현장엔 우리가 잘 몰랐던 수의사가 있다. 이름하여 ‘비임상 수의사’. 그들은 어떤 일을 할까? 조민주(31) 수의사를 통해 비임상 수의사의 세계를 살펴봤다.
건국대 수의학과를 졸업한 조민주 수의사는 진로를 고민하면서 비임상 수의사를 택했다. 동물병원이 아닌 글로벌 펫푸드 기업 ‘로얄캐닌’에 입사하며 남들과는 조금 결이 다른 수의사 길을 걷기로 했다. 그는 동물을 직접 진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길 수 있는 질병을 예방해 동물 수명을 늘리고, 동물 삶의 질을 높이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반려묘 ‘호야’(5)의 묘주인 그는 반려생활의 희로애락에 공감하며, 보호자들에게 반려동물 양육·질병·식습관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수의사 꿈은 어떻게 키웠나요
“어릴 적부터 생명 분야에 관심이 많았어요. 생명과학과 생물학을 좋아했는데, 마침 수의과대학이 유망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도 빠르게 늘고 있었거든요. 건국대 수의과대학에 입학해 예과 2년, 본과 4년을 마치고 국가고시를 치르고 수의사 면허를 땄어요.
면허를 받은 뒤엔 수의사마다 진로가 달라져요. 크게 ‘임상 수의사’와 ‘비임상 수의사’가 있어요. 우리가 흔히 아는 수의사가 임상 수의사죠. 주로 동물병원에서 동물을 진료합니다. 비임상 수의사는 동물 영양학이나 바이러스, 줄기세포 등을 연구하거나 감염병을 차단하는 일을 해요. 동물 병원이 아닌 곳에서 일하는 수의사를 통틀어 비임상 수의사라고 합니다. 주로 수의직 공무원으로 일하거나 연구소, 기업 등으로 취업해요.
대학에 진학할 땐 임상 수의사만 알고 있었는데, 입학 후 다양한 분야에서 수의사가 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전 평소 사람들과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 일을 좋아했기 때문에 비임상 수의사가 제 적성에 맞다고 생각했어요.”
-비임상 수의사도 다양한 진로가 있는데, 로얄캐닌 입사를 택한 이유가 있나요?
“우리나라 반려동물 인구가 1500만명을 넘어서면서 관련 산업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어요. 그 중에서도 반려동물 건강과 생존 문제와 연관된 ‘펫푸드’ 산업이 유망하죠. 프랑스에 본사를 둔 로얄캐닌은 펫푸드에 관해 오랜 기술력과 경험이 있는 회사에요. 북미와 유럽 등 반려동물 문화 선진국에서 인정받는 회사라. 저의 수의학 지식을 살리면서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해 입사했어요.”
-회사에선 주로 어떤 일을 하나요?
“반려동물 보호자와 임상 수의사에게 동물 복지나 영양에 관해 조언해요. 수의학 지식을 활용해 영양가가 높은 좋은 사료가 많이 쓰일 수 있도록 마케팅 전략을 세우기도 합니다. 임상 수의사를 대상으로 세미나를 열고, 사료와 영양에 대한 학술적 문의 상담도 이뤄지죠. 유튜브를 통해 보호자와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해요. 계절과 나이 등에 따라 반려동물에 나타날 수 있는 건강 상태를 알리고, 어떻게 관리하면 좋을지도 안내하죠. 평소 반려동물에 대해 궁금했던 부분도 답해드리고요.”
-다양한 반려동물 건강 프로젝트를 기획한다고 들었어요. 동물 건강 관리 팁도 궁금합니다.
“수의학이 발달하면서 반려동물 수명이 늘었고, 증상이 나타난 뒤에 치료하는 것보다 미리 질병에 대처하자는 인식이 많아졌어요. 일상에서 반려동물 건강을 관리하는 방법을 알리고 싶었죠. 특히 생애주기별 맞춤 영양 공급과 체중 관리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어요.
주식인 사료는 반려동물의 크기, 나이, 품종, 건강상태, 활동량에 따라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것이 중요해요. 만약 키우던 개가 성견이 됐을 때도 성장기 때 먹던 사료를 계속 준다면 그건 성인에게 이유식을 주는 것이나 다름 없어요. 태어나 1년 동안은 취약한 면역력을 강화하고, 소화기능을 보강할 수 있는 영양 공급이 필요하죠. 11개월 이후 성장이 끝나면 고열량 사료보다 성견 전용 사료를 통해 열량을 적절히 공급해야 합니다. 노령기에 접어들면 다양한 노화 신호가 나타나기 때문에 그 어느때보다 맞춤 영양 관리가 중요해요.
반려동물 체중 관리도 중요해요. 비만은 호흡기나 관절, 심혈관계 질환에 큰 영향을 줍니다. 전세계 반려동물 50%가 비만을 앓고 있는 탓에 로얄캐닌에선 4년째 ‘반려동물 체중관리 캠페인’을 열어 체중 관리 팁을 공유하고 있어요.”
-반려묘를 키우는 집사를 위한 팁도 있나요?
“고양이는 아픈 것을 숨기는 습성이 있어요. 아픈 것을 일찍 눈치채지 못해 이미 병이 많이 진행된 상태에서 병원에 오는 경우가 많죠. 정기 검진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제 고양이 호야는 임시보호를 받던 중 입양됐는데, 특발성 방광염이라고 하는 하부요로기계 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어요. 흔하고 자주 재발하는 질환이라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죠. ‘고양이 주치의’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고양이의 이런 특성을 알리고, 식사나 음수량, 배변 활동 등을 세심하게 관찰하라고 안내하고 있어요.”
-‘질환관리 사료’는 무엇인가요?
“특정 질환으로 대사 기능에 문제가 생긴 반려동물에게 급여하는 사료입니다. 약을 통해 완치가 어려운 만성질환은 주식인 사료를 통해 관리해야 해요. 500명이 넘는 사내 수의사들이 연구 결과를 가지고 만든 레시피인데, 요로계, 피부, 소화, 신장 등에 걸친 종류만 80가지에 달해요.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는데, 수의사의 정확한 진단과 처방 후 질환관리 사료를 줘야 한다는 겁니다. 보호자가 임의로 판단해서 잘못 주면 오히려 병을 키울 수도 있어요. 예컨대 식이 알러지로 피부 가려움증이 생긴 5개월 짜리 그레이트데인에게 무작정 피부 질환 사료를 급여하면 골관절 장애가 생길 수 있죠. 반드시 수의사로부터 질환관리 사료를 처방 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비임상 수의사에 관심을 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나라 반려동물 산업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상황이라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요. 직접 진료하지 않아도 반려동물 건강과 복지에 기여하는 방법은 다양해요. 대학에서 배운 수의학 지식을 동물병원에서 활용할 수도 있지만, 반려동물을 위한 제품을 개발하고 소비자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구상하는 것도 반려동물 행복을 위한 일이죠.
비임상 수의사에 대한 수요는 많아요. 만약 기업으로 진로를 정했다면 수의사라는 본인 지식을 잘 활용하되, 팀으로서 일한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또 많은 외국계 회사와 협업하는 만큼 영어 실력을 키워두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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