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만 있어도 중간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괜한 말이나 행동을 해 오해나 미움을 사느니 차라리 가만히 있는게 낫다는 의미인데요. 비슷한 말로는 ‘경거망동하지 마라’, ‘괜히 긁어부스럼 만들지 마라’ 등이 있습니다.
이 말은 최근 고용노동부가 소셜미디어에 게재한 야근 관련 게시물에 딱 어울리는 말입니다. 고용노동부는 2022년 6월 28일 고용노동부 SNS 채널에 ‘칼퇴를 잊은 사람들에게 야근송’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고용노동부는 해당 글을 통해 ‘어차피 해야 할 야근이라면 미뤄 봤자 시간만 늦출 뿐’이라며 ‘에너지 부스터 같은 야근송 들으며 얼른얼른 처리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수 이이경의 ‘칼퇴근’, 장미여관의 ‘퇴근하겠습니다’ 등의 노래를 야근하며 듣기 좋은 야근송으로 추천했습니다.
네, 맞는 말입니다. 어차피 할 거라면 빨리 끝내는 게 좋죠. 질질 끈다고 누가 대신 해줄 것도 아니고 그럴수록 더 피곤해지는 건 근로자 본인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메시지를 작성한 주체가 고용노동부라는 점이 네티즌들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노동시간 규제를 담당하는 고용노동부가 야근 자제를 당부하기는커녕 ‘피할 수 없으면 즐기세요’라는 식의 글을 써 올렸기 때문입니다.
네티즌들은 ‘다른 곳도 아니고 고용노동부에서 이걸 웃으라고 올린거냐’, ‘고용노동부라면 야근을 줄일 생각을 해야하는 거 아니냐’, ‘혹시 해킹당한 거냐’ 등의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생각지 못한 비난 여론에 고용노동부는 해당 게시물을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온라인 콘텐츠를 면밀히 확인하지 못한 점 죄송하다고 사과했습니다.
고용노동부가 글을 내리는 것으로 해프닝은 막을 내렸지만, 근로자들의 마음 속 분노가 당장 사라질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주52시간 근무제 개편을 앞두고 예민해진 근로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52시간 근무제는 주당 법정 근로시간을 기존 68시간에서 52시간(법정근로 40시간+연장근로 12시간)으로 단축한 근로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2018년 주당 법정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단축하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그해 7월 1일부터 종업원 300인 이상의 사업장을 대상으로 우선 시행에 들어간 뒤 적용 범위를 확대해 왔습니다.
주52시간제 시행으로 야근이 잦던 IT업계 근로자들은 삶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야근이 잦은 IT기업들이 몰린 판교는 특히 밤 늦게까지 불켜진 사무실이 많아 ‘판교 등대’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었는데요, 52시간제 시행 이후에는 ‘등대의 불’이 많이 꺼졌었습니다.
실제 통계청의 ‘2019년 한국의 사회지표’ 자료를 보면, 주52시간 근무제 시행으로 임금 근로자들의 근로 여건 만족도는 이전에 비해 큰 폭으로 상승했습니다. 주52시간제 도입 이전에는 25% 내외였던 만족도가 2019년 32.3%까지 높아진 겁니다. 임금, 근무환경, 근로시간 등으로 세분화한 만족도 조사에서도 근로시간에 대한 만족도는 2017년 28%에서 2019년 34.5%로 6.5%p 상승해 각각 4.3%p, 3.75%p씩 오른 임금과 근로시간에 비해 만족 정도가 상대적으로 높았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주단위로 관리하던 연장 근로시간을 월 단위로 바꿔 일주일에 초과 근무를 12시간 이상씩 할 수 있도록 하는 개편안 추진을 2022년 6월 23일 발표하면서 직장인들 사이에선 판교의 등대가 다시 불을 밝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노동부가 발표한 내용은 주별로 따져보던 초과 근무 시간을 월별로 통합해 보겠다는 게 골자입니다.
주당 초과근무를 12시간 이상 못하게 하던 걸 월 단위로 바꿔 첫 째주부터 마지막 전주까지 주당 40시간씩 일을 시켰다면, 마지막 주는 그간 쌓아온 초과근무 시간인 52.1시간(주당 12시간을 연평균인 월별 4.3주에 곱한 것)을 한꺼번에 적용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최악의 경우 1주당 법정근로 시간인 40시간에 52.1시간의 초과 근무를 더한 92.1시간을 일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민간공익단체인 직장갑질 119가 “이번 개편안은 정부가 회사들에 주 92시간씩 일을 시킬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라고 비판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시민단체뿐 아닙니다. 이 제도 개편으로 직격탄을 맞을 근로자들의 반응 역시 좋지 않습니다. 여러 인터넷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야근 지옥 다시 시작인가”, “주52시간제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았는데 이제는 회사에 붙들려 있을 걸 생각하니 아찔하다”, “판교의 오징어배(판교의 게임 회사 사무실이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일하는 것이 심야시간대 밝은 불을 켜놓고 오징어를 잡는 오징어배와 같다고 해 유래된 말) 다시 부활하나” 등의 글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용노동부는 근로자의 워라밸을 지켜주던 주52시간제를 왜 고치겠다고 나선 걸까요?
그 출발점은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선택적 근로시간제(선택 근로제)’를 대폭 확대하겠다며 주52시간제를 손보겠다고 발표한 것이었습니다. 윤 대통령이 말한 선택적 근로시간제는 단위 기간을 정해 자유롭게 근무를 하되, 해당 기간 안에 주당 평균 근로 시간이 52시간을 넘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대통령이 공식 업무를 시작하기 꾸렸던 인수위원회는 이 선택근로제의 단위기간을 최대 1년으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했습니다. 1년 동안 주당 평균 근로시간이 52시간을 넘지 않는다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당 100시간씩 일하는 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주에 근로시간을 줄여 주당 평균 근로시간을 52시간에만 맞추면 문제가 없었던 것이죠.
그나마 주당 52시간제를 환산하는 단위기준이 1년에서 월 단위로 줄어든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요. 야근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근로자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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