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작가가 찍은 사진 한 장이 프랑스의 대표적인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의 러시아판 표지를 장식해 화제였다. 사진 속에는 국립발레단 무용수 10명이 몸을 포개고 나무를 표현하고 있다. 쭉쭉 뻗어낸 팔과 다리가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듯하고, 어깨와 등, 손가락 하나하나의 근육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무용수의 몸짓을 가장 잘 포착한다는 평을 받는 이 사람은 국립현대무용단 발레리노 출신의 사진작가이자 비주얼 아티스트 박귀섭(BAKI) 작가(37)다. 최근에는 무용 영화 ‘상태가 형태’의 영상 감독,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스위트홈’의 타이틀 영상 연출가를 맡아 주목받았다. 유망한 발레리노가 돌연 무대에서 내려와 사진을 찍기 시작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원래 발레리노였다고요. 언제부터 발레를 했나요?
“중학교 때까진 미술을 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체육부장 선생님이 운동하는 모습을 보시곤 몸이 유연하다면서 무용을 추천했어요. 워낙 춤을 좋아했던 터라 선뜻 무용부에 들어갔습니다. 남자가 무용한다고 놀림도 많이 받았지만 재밌었어요. 무대에 오르는 것도 즐거웠죠. 공연을 앞두고는 오전 7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연습했어요. 발에 골절과 염증은 기본으로 달고 살았죠. 그땐 발이 성한 적이 없었어요. 그래도 무용하는 게 좋았습니다.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해 무용을 전공했습니다. 졸업 후 2006년에는 국립발레단에 들어갔어요. 발레단에 들어간 지 6개월 만에 운 좋게 해외 안무가 선생님 눈에 띄었어요. ‘카르멘’이라는 작품을 맡아 솔리스트(soloist·발레의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무용수)로 활동했어요. 솔리스트로 무대에 오른 첫 작품이라 가장 기억에 남아요.”
박 작가는 그렇게 발레단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떠오르는 발레리노로 주목받았다. 2007년 입단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뉴욕 인터내셔널 발레 대회에서 동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실력도 뛰어났다. 발레리노로 잘 나가던 그는 2010년 돌연 발레단을 그만둔다고 선언했다. 당시 최태지 국립발레단 단장까지 나서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갑자기 발레를 그만둔 이유가 뭔가요.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어요. 이런저런 다양한 일에 관심이 많았죠. 10여년간 발레만 해왔으니 이제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패션 쪽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많아 자연스레 사진에 관심이 많았어요. 멋있는 사진을 보면 ‘이건 어떻게 이렇게 찍은 걸까’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죠. 처음엔 사진과 관련한 이론 책 3권을 사서 계속해서 봤어요. 또 알고 지내던 사진작가를 졸라 어깨너머로 사진 찍는 법을 배웠어요. 발레단 연습이 끝나면 스튜디오로 달려가 밤새 사진을 찍었습니다. 돈이 많지 않을 때라 제대로 된 장비도 없었어요. 20만원 짜리 캐논 카메라 하나 들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발레는 짜인 동작을 계속해서 반복 연습해요. 또 무대 위에서 선보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죠. 반면, 사진은 바로바로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생각한 걸 빠르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죠. 사진을 제대로 공부해봐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래서 2010년 발레단을 나왔어요.”
10년 넘게 발레만 해오던 그가 새로운 터전에서 자리 잡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진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특별한 경력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포트폴리오를 보고 먼저 연락해 온 광고주도 이력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를 더 악물었다. 그는 가장 익숙하고, 잘 아는 무용과 관련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무용수로 오랜 기간 활동했기에 사람의 몸에 관심이 많았어요. 자연스레 몸의 움직임과 선에 집중했죠. 당시 작가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터라 수입이 많지 않았어요. 동료가 가장 큰 자산이었죠. 동료, 선후배 무용수들에게 연락해서 작업을 도와달라고 했어요. 고맙게도 한걸음에 달려와 줬고, 상상한 이미지를 몸으로 표현해줬습니다.”
박 작가의 사진이 ‘무용수들의 몸과 동작을 잘 담아낸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국립발레단, 국립 국악단, 서울예술단, 정동극장, 국립 현대무용단 등 많은 무용 단체들로부터 촬영 요청이 왔다. 아무래도 직접 무용수로 활동한 만큼 무용수의 신체 움직임과 선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빠르게 포착해내는 것이 있었다.
박 작가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2015년부터다. 연작 ‘쉐도우’ 시리즈가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으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쉐도우’ 시리즈는 무용수들의 몸과 움직임을 바탕으로 기획했다. 총 15개의 작품을 계획하고 있는데, 현재 9개 작품을 완성했다.
“‘쉐도우’ 시리즈 중 2번 작품은 국립발레단의 무용수 10명이 나무를 형상화한 작품이에요. 2015년 프랑스의 대표적인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의 러시아판 표지용으로 쓰이면서 주목받았어요. 오선지 위 음표 작품인 ‘쉐도우 #2-4’는 미국 유명 음반 회사인 소니가 발매한 뉴욕의 R&B 가수 ‘LYFE’의 음반 표지용으로 계약했습니다.
최근에는 사진작가뿐 아니라 아트 디렉터, 영상감독 등으로 입지를 넓히고 있다. 2019년 경기아트센터 단원창작무대에 오른 공연을 바탕으로 2021년 댄스 필름(무용 영화)으로 제작한 ‘상태가 형태’에서 영상감독을 맡았다. 영화 ‘상태가 형태’는 주인공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빛을 찾아가는 여정을 독창적 몸짓으로 담은 무용 영화다.
“‘상태가 형태’는 원래는 무용 공연이었어요. 필름 형태로 제작하기 위해 스토리, 캐릭터 등을 다 각색했어요. 대사가 없는 작품이라서 신체적인 움직임과 시각적인 장치로 많은 부분을 디테일하게 나타내야 했어요. 전구를 활용해 ‘빛’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제작 기간은 4~5개월 정도 걸렸어요. 최근에는 이 작품이 제5회 서울무용영화제 프로그램 ‘2021 프로젝트 SeDaFF(Seoul Dance Film Festival)’에 공식 초청받아 상영되기도 했습니다.
이 밖에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스위트홈’의 타이틀 영상 연출을 맡았어요. 최근에는 문화체육관광부의 ‘대한민국 테마 여행 10선’ 사업을 맡은 (사)한국관광개발연구원이 만드는 영상 ‘가락, 더 무브먼트 인 코리아’ 프로젝트를 디렉팅하고 있습니다. ‘가락, 더 무브먼트 인 코리아’ 프로젝트는 국내 관광지 곳곳을 홍보하기 위해 기획했어요. 발레, 한국무용, 현대무용, 타악기, 탈춤 등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과 협업해 한국의 아름다움을 색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해외 아트페어에 작품을 출시하고, 전시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서울 올리비아 박 갤러리에서 개인전 ‘휴먼’을 열었어요.”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는요.
“지금처럼 다양한 이미지 작업을 계속할 계획이에요. 결국에는 생각을 이미지로 풀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사진뿐 아니라 영상, 퍼포먼스 등 여러 분야에서 ‘몸’, ‘사람’을 주제로 많은 걸 표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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