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카 시대에 부활하는 국산 올드카
외제차보다 각그랜저가 더 멋있는 이유는?
과장 : 부장님, 신입이 그랜저 타고 출근했답니다.
부장 : 꼰대냐? 그럴 수도 있지.
과장 : 그게 아니라… 각그랜저라는데요.
부장 : 뭐? 야, 나가보자.
요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밈(meme·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문화)으로 쓰이는 대화의 일부이다. 한 네티즌이 ‘신입 사원이 30년도 족히 넘은 그랜저를 끌고 와서, 부장님과 함께 구경나갔다’는 후기를 올리자 누군가 이같은 대화를 가상으로 만들어 퍼날랐다.
럭셔리카를 소유한 또래를 유튜브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세상에서 ‘각그랜저’가 젊은 세대가 동경하는 자동차로 새로 뜨고 있다. 각그랜저는 1986년부터 1992년까지 현대자동차에서 생산한 1세대 그랜저를 부르는 별칭이다. 자동차 앞뒤가 각 진 디자인이 특징이라 이런 별칭을 얻었다.
세차 영상을 주로 만드는 유튜버 ‘샤인프릭’이 올린 각그랜저 세차 영상은 조회수가 185만이 넘을 정도로 유독 인기 있는 콘텐츠다. 나온 지 31년이 지난 차량을 손세차하고 광을 내는 영상에 사람들이 열광한다. 지역명이 쓰인 옛 초록색 번호판을 달고 있고, 틴팅도 되어있지 않다. 출고 당시만 하더라도 ‘기함’ 차량에 걸맞은 편의 사양을 갖췄겠지만, 옵션도 요즘 차에 비하면 이른바 ‘깡통차’라 불릴 정도로 빈약한 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차를 갖고 있는 이를 선망한다. 영상 속 각그랜저를 소유한 20대 남성은 “할아버지가 물려주셔서 생애 첫 차를 얼떨결에 각그랜저로 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2021년 포르쉐, 벤틀리, 람보르기니, 롤스로이스 등 럭셔리카 브랜드가 모두 사상 최대 실적을 찍었고 국내에서도 일제히 판매량이 늘어난 가운데, 오히려 20~30년 이상 된 국산 자동차를 찾는 현상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올드카(old car)는 일반적으로 1960년 이전 생산된 차를 일컫는데, 1980년대가 되어서야 ‘마이카’ 시대가 열린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1980~1990년대 생산된 국산차까지 올드카로 치고 있다.
중고차 시장에서 국산 올드카 매물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중고차 거래 플랫폼 ‘엔카’가 2021년 1~10월 1980~1990년대 생산된 국산차 중고 매물 현황을 분석했더니, 현대 갤로퍼가 가장 매물이 많았다. 기아 프라이드, 현대 그랜저, 쌍용 코란도, GM대우 티코 순으로 뒤를 이었다.
1991년 출시돼 2003년까지 생산됐던 SUV인 갤로퍼는 비교적 부품을 수급하기 쉬워 중고차를 복원하는 리스토어(restore) 인기 차종이다. 중고차 플랫폼뿐 아니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갤로퍼 리스토어 매물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차박 캠핑족이 늘면서 갤로퍼 인기가 커졌다. MBC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 배우 안보현이 갤로퍼를 타고 캠핑하는 장면이 방영된 후 이 차를 사려는 수요가 늘었다고 한다. 한때는 중고 갤로퍼가 2000만원을 호가하기도 했다는 후문이 있다.
럭셔리 소비에 관심이 많다고 알려진 MZ세대가 올드카를 멋있어 하는 이유는 뭘까? MZ 소비 트렌드의 핵심은 희소성에 있다. 아무리 좋은 차라도 흔해지면 매력을 못 느낀다. 희소한 상품을 가지려는 욕구로 해석한다면, 럭셔리카를 사고자 하는 마음과 올드카를 사고자 하는 마음이 맞닿는 지점이 있다. 올드카는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들다는 면에서 차주의 개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올드카 마니아들은 부족한 편의 기능마저도 차의 개성으로 여긴다. 틴팅이 되지 않아 차량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걸 ‘어항 간지(어항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라고 부르고, 수동으로 창문을 올리고 내리는 ‘돌돌이’에서 감성을 느낀다. 포니를 복원해 세컨카로 끈다는 한 차주는 “차에서 내릴 때 주변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보는 ‘하차감(승차감에 대비해 생긴 신조어)’이 외제차 못지 않다”고 했다.
특히 올드카 중 각그랜저를 향한 동경은 부(富)를 향한 것으로도 귀결된다. 현재 6세대 모델이 팔리고 조만간 7세대 모델 출시를 앞둔 요즘 그랜저는 2021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세단으로 ‘국민차’라 부를 정도로 흔해졌지만, 1세대 그랜저가 나왔을 때만 해도 그랜저는 재력과 성공의 상징이었다. 요즘이야 각종 할부 금융을 이용해 소득이 낮아도 웬만한 외제차를 끌 수 있지만, 당시 각그랜저는 ‘찐 부자(진짜 부자)’만 끌 수 있었다.
1989년 그랜저 최상위 모델 가격은 2890만원으로 어지간한 집 한 채 값이었다. 할아버지의 각그랜저를 물려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MZ세대에게는 대대로 금수저임을 인증하는 상징일 수도 있다. 본인의 경제력에 비해 비싼 차를 끄느라 궁핍한 생활을 감내하는 카푸어들은 범접할 수 없는 차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저 과거 향수 때문에 올드카를 좋아한다는 이들도 있다. 직장인 김모(32)씨는 최근 길에서 프라이드 차량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기념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첫 차로 프라이드를 구매하고 가족 모두 기뻐했던 날이 생각 나 뭉클했다”며 “내가 첫 차를 장만할 나이가 되어 그때 차종을 보니 추억에 젖게 되더라”고 했다.
자동차 제조사들도 올드카 열풍에 화답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2021 서울모터쇼’에서 1975년 출시한 포니를 재해석한 ‘헤리티지 시리즈 포니’를 공개했다. 레트로 디자인은 살리면서, 카메라 기반 사이드미러, 전기차 구동계 같은 요즘 기술을 도입했다. 그랜저 출시 35주년을 기념해서는 각그랜저 디자인을 차용한 전기차 ‘헤리티지 시리즈 그랜저’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차를 끌기란 녹록지 않다. 일단 수리비가 많이 든다. 또 매연 저감 장치가 따로 나오지 않은 일부 국산 올드카는 서울 시내에선 주행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 2019년 12월부터 서울 시내 15개 동에 배출가스 5등급 차량이 진입하면 과태료가 부과되고 있다.
글 시시비비 유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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