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3국 중 중국에는 공부차법(功夫茶法), 일본엔 다도(茶道)라고 부르는 차 문화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다례(茶禮)라고 부르는 차 의식이 있지만 중국이나 일본처럼 발달하지 않았다. 한국이 유독 차에 대한 개념이 약한 이유는 역사를 거슬러 추측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선 삼국시대부터 차를 마시기 시작해 불교가 성행하던 고려시대까지 차를 즐겨마셨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자 차 문화가 쇠퇴하고 일상 생활에서 차를 접하기 어려워졌다. 명절에 지내는 제사도 본래 차를 올려서 차례라고 불렀지만, 조선시대 때 차를 마시는 문화가 약해지면서 지금처럼 술을 올리는 방식으로 변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을 찾기 쉽지 않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격식을 갖추고 정해진 방식을 엄격하게 따라야 한다는 선입견이 강하다. 서울 종로구 통인동 골목에 이 편견을 깨고 차를 사람들의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 있다. 2012년 문을 연 호전다실이다. 호전다실을 운영하는 박재형(42)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 호전다실은 뭘 하는 곳인가요
“호전다실(湖田茶室)은 사람들이 일일끽다(日日喫茶)를 실천할 수 있길 바라는 차 회사예요. 일일끽다는 일상 속에서 차를 마시자는 뜻입니다. 국내·외 차 산지에서 직접 선별해 온 차를 무료로 마실 수 있는 시음 공간이자 차에 관한 정보를 가르쳐주는 수업이 열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2000년 대학교 1학년 때 컴퓨터를 고치는 아르바이트를 갔다가 우연히 보이차를 접하고 그 매력에 빠졌어요. 커피를 마실 땐 몰랐던 농밀함과 부드러움을 느꼈어요. 그 때부터 차를 좋아하는 어른들과 함께 인사동 찻집에 다니며 다양한 차를 접했습니다. 당시 차를 주로 소비하는 사람은 60대 매니아층이었어요. 인사동에 찻집이 많아지기 시작한 60~70년대에 20대였던 1세대 사장님들이 나이가 든 거예요. 그렇게 10년 동안 차를 수집하고 공부하는데 몰두했어요. 20대 중반까지는 차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많이 알아야 차를 잘 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2002년에 인사동 한 찻집에서 들은 할머니의 말 한마디로 생각이 변했어요.
평소처럼 인사동에서 7542 중 73청병이란 보이차를 마시고 있는데 한 70대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와서 앞에 앉으셨어요. 그러곤 “그 차는 좋은 차지, 그 차는 참 맛있지”라고 한 마디 했어요. 그 때 충격을 받았어요. 그동안 차를 머리로만 이해했지 맛있는 차는 경험해 본 적이 없는거예요. 그 때부터 직접 차를 마셔보고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박 대표는 2003년 후반부터 차맛을 느끼면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2006년부터는 한 포털사이트의 블로그에 보이차 400여종의 시음기를 정리했다. 블로그는 누적방문자가 1000만명을 넘을 정도로 유명했다. 2012년 포털사이트가 서비스를 종료하면서 블로그는 없어졌다. 하지만 당시 올렸던 내용은 현재 운영하는 호전다실 블로그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12년에 결혼을 하고 자녀가 생기면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차에 대한 공부만 계속 할 수 없었다. 같은 해 호전다실을 열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박 대표는 오래 공부했기 때문에 좋은 차를 고를 자신이 있었다. 사업 초반 4~5년 동안 혼자서 중국 복건성·인도·스리랑카·태국·베트남 등 차 시장을 돌아다녔다.
- 어떤 차를 찾아다녔나요
“차를 고를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건 안전성이에요. 식품이니까요. 그리고 마셨을 때 속이 편안한 차를 찾았어요. 카페인 걱정 없이 남녀노소 마실 수 있는 그런 차요. 또 내포성(여러번 우릴 수 있는 성질)이 좋아서 최소한 10번 이상 우릴 수 있는 차, 가격 부담이 적은 차를 찾아다녔습니다.”
-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차를 구할 때 힘들었던 점이 있나요
“처음엔 차를 공부만 했지 비즈니스 마인드가 없어서 힘들었어요. 중국에서는 톤 단위로 취급을 하더라고요. 차 판매 시장은 개인이 접근하기엔 문턱이 높았어요. 한국은 차 시장이 작은 걸 아니까 한국 사람을 뜨내기 취급하고 바가지 씌우기 일쑤였죠. 또 차를 사기만 하면 전부 가져올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정식 통관이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때 산 차는 아직도 중국 창고에 쌓여있어요. 원산지를 증명을 해줄 서류가 없어서 가서 먹어야 해요.
그리고 한국에서 책을 통해 얻은 정보가 현지 상황과 달라서 애를 먹었어요. 오히려 블로그에 올라온 여행 후기가 정확했어요. 현지에서 차를 우리는 물과 방식이 알고 있는 내용과 달라서 차맛이 전혀 달랐어요. 수입을 해왔을 때 어떨지 가늠하기가 어려웠어요.”
- 직접 해외에 나가서 차를 들여와야 하나요
“우리나라로 차를 수입해 온 유통업자에게 차를 받아서 파는 방법도 있었어요. 하지만 차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려면 적어도 내가 이 차를 왜 들여왔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직접 차를 들여오기 위해 무역과 유통까지 공부했습니다.”
호전다실은 차를 파는 카페도 아니고, 유통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도 아니고, 교육을 하는 장소도 아닌 애매한 공간이었다. 주변에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차라리 테이블을 가져다 놓고 장사를 하라는 사람도 있었다. 힘든 시기였지만 단순히 차를 마시는 카페를 열고 싶진 않아 타협하지 않았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선별해 온 좋은 차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
- 사업을 접을 뻔한 적도 있다고요
“사업을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주 소비층이던 60대가 구매력이 떨어졌어요. 어르신들은 이미 많은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소비 활동을 활발히 하지 않았죠. 또 다른 주요 소비층인 불교 시장이 작아졌어요. 스님들이 상인들을 불신하면서 직접 차를 구하기 시작했거든요. 거기다가 업계에서 가짜 보이차를 수입하다 걸린 사건으로 일반 소비자는 차 업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어요. 상황이 어렵다보니 저도 주변 사람에게 민폐를 그만 끼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지하게 사업을 접으려고 하는데 2018년에 갑자기 2030세대가 시장으로 유입해 들어왔어요. 만약 그저 차를 우려서 파는 카페를 했으면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고 사업을 접었을 거예요. 그런데 차를 콘텐츠 삼아 새로운 사업을 해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게 보였어요.”
박 대표는 2030세대가 갑자기 차 시장에 들어온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했다. 첫째로 2017년 효리네 민박에 보이차를 마시는 장면이 자주 나오면서 젊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을 거라고 한다. 두번째로 2020년 중국 국내총생산(GDP)이 2015년보다 5배 늘어난 점을 꼽았다. 성장이 주춤하던 중국이 다시 G2로 부상하면서 중국식 차가 관심을 받았을 거라는 얘기다. 시장 분위기도 전에는 영국식 홍차를 주로 즐겼지만 요즘은 중국식 클래식차를 더 찾는 쪽으로 변했다고 한다. 시장 분위기가 변하는 걸 보고 재정비를 했다. 먼저 젊은 사람의 소비 패턴과 취향을 분석해 1년 정도 준비 과정을 거쳤다.
- 어떤 준비를 했나요
“주 소비층이던 60대 어르신은 많이, 싸게, 오래 마실 수 있는 차를 찾았어요. 젊은 사람들은 하나를 많이 사기 보다는 같은 돈이면 여러가지 경험해보려는 소비 패턴을 보였어요. 그래서 원래 하나에 30만원~40만원, 비싼 건 100만원씩 하는 차를 소분해서 가격대를 낮추고 소비자가 접근하기 쉽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포장 색깔을 다르게 해서 차의 종류나 성격을 표시했어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알 수 있어서 좋다는 반응을 보여줬어요. 반면에 어르신들은 차 문화가 가진 전통을 해친다며 부정적이었어요. 어르신 시장을 놓친 건 아쉽지만 새로 들어오는 젊은 층을 보고 과감하게 변화를 줬습니다.”
- 차를 가르쳐주는 수업도 한다고요
“그동안의 경험이 도움은 됐지만 다시 돌아간다면 또 겪고 싶지는 않아요. 제가 스승도 없이 20대 때 혼자 시작해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잖아요. 그래서인지 젊은 사람이 오면 저도 모르게 어느 새 차 클래스를 하고 있었어요. 차의 정의·종류·특징 같은 걸 설명해줬어요. 이걸 커리큘럼을 잘 짜서 운영하면 사람들한테 차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줄 수 있겠다. 그러면 정보 격차가 줄어드니까 차를 좀 더 편하게 접근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오래 배울 필요도 없고 2시간짜리 수업을 하면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기획을 한 게 일일 클래스예요. 젊은 사람들은 순응도가 높고 잘 따라와서 즐겁게 하고 있어요.”
2020년부터 차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배울 수 있는 수업을 운영하고 있다. /jobsN
- 향후 목표나 계획이 있나요
“앞으로도 계속 정보 격차를 줄이기 위한 방법을 찾을 거예요. 차를 사가는 사람은 차 덩어리가 아니라 정보를 사가는 거예요. 점점 차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집단지성을 이용해 전세계 차를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일종의 차 위키피디아처럼요. 우리나라에서는 차에 대한 정보가 구전으로 전해지다보니 부정확한 내용이 많아요. 다같이 토론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싶어요.
또 차 연구소를 만들어서 일일끽다를 가능하게 도와주는 차 도구와 차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일상생활에서 차를 쉽게 접할 수 있게 해서 다례 문화 전통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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