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는 2016년 DJ로 데뷔했다. 주로 음악 축제나 기업 행사 파티에서 디제잉을 한다. 일주일에 1~2번 1시간씩 무대에 오른다. 클럽에서 상주하며 정기 공연을 하는 레지던트 DJ는 아니다. 아이를 키우고 회사 대표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시간을 내긴 어렵기 때문이다.
“시간과 장소, 상황에 따라 음악을 선곡하는 게 중요하다. 첫 3~4곡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요즘처럼 더운 날 첫곡으로 틀기 좋은 노래는 벤 E. 킹(BEN E. KING)의 Stand by Me 리믹스 버전이다. 관객들이 초반 음악을 듣고 ‘이 DJ와 놀아도 되는지’를 판단한다. 함성 소리와 춤추는 사람 수가 디제잉 실력을 가늠하는 지표라 보면 된다. 음악이 별로면 춤추기보다 이야기를 나누거나 음료를 마시기 위해 흩어진다. 반면 음악이 좋으면 관객들이 춤을 추기 위해 모인다. 음악을 틀었는데 함성 소리가 터져나올 때 가장 짜릿하다.”
“흥청망청 즐기는 퇴폐적인 이미지는 고정관념이다. 음악 축제가 많이 열리고 파티 문화가 대중화되면서 디제이는 유망직업이다. 남녀노소 불문이다. 동료 DJ들 중 내가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고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다. 안나루노(annalunoe)라는 DJ는 만삭이었을 때도 수만명 앞에서 디제잉을 했다.
클럽이나 파티만 고집하지도 않는다. 어르신들만 계시는 지역축제에 간 적도 있고, 발달장애인 학교 축제에 초청받은 적도 있다. 가장 기억에 남고, ‘DJ를 계속 해야겠다’ 마음 먹었던 무대들이다. 앞으로 10대와 20대를 벗어나 더 넓은 연령층이 디제잉 문화를 즐길 거라 본다. ”
해외에서 DJ는 높은 연봉을 받는다. 포브스가 2017년 발표한 세계 DJ 수입을 보면 1위를 차지한 캘빈 해리스가 한해 550억원을 번다. 1만명 이상 관객이 즐기는 대형 음악 축제에 서는 DJ는 시간당 1000만원 이상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는 해외에 비해 대우를 받지는 못한다. 특정 클럽에 속한 레지던트 DJ는 1시간 정도 디제잉을 하고 15만~50만원 정도를 받는다. 클럽 무대보다는 파티나 기업 행사, 음악 축제 공연을 할 때 급여가 높다. 실력을 인정받을 수록 급여가 올라간다. 주로 파티나 기업행사 무대에 서는 이씨는 1~2시간 정도 디제잉을 하고 100만~300만원 정도를 받는다.
이민선씨 제공
-디제잉은 어떻게 시작했나
“친동생 제안으로 시작했다. 2014년 첫째딸을 임신했을 때다. EDM(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으로 태교를 했다. 갑상선암을 앓아 일을 그만둔 후 얻은 소중한 첫 아이였다. 주부를 할일 없이 한가한 사람으로 보는 시선들이 불편했다. 회사 명함 없는 사람에게 ‘하루 종일 뭐하냐’ 궁금해하는 시선이 있다. 디제잉을 할 때는 이런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너희가 나를 논다고 생각하지, 그래 진짜 어디 한번 제대로 놀아보자’라는 생각이었다.”
-디제이로서 경쟁력은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음악 속에 메시지를 담아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그 메시지에 관객이 얼마나 공감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음악만큼 사람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시간과 장소, 상황에 맞는 음악을 고를 수 있다. 나는 다양한 직업을 거쳐 여러가지를 경험했다는 강점이 있다.
음악 장르로 본다면, 어릴 때 첼로를 오랫동안 쳐서 그런지 베이스가 강한 음악을 좋아한다. 반항적인 음악을 많이 트는데 관객들이 그런 음악 속에서 희망을 느낀다고 하더라.”
◇패션과 금융을 넘나들었던 20대 시절
이씨는 아버지를 따라 4세때 미국으로 갔다. 고등학교 시절은 러시아에서 보냈다.
-아버지가 한국으로 발령받아 같이 온건가.
“아니다. 내가 먼저 왔다. 학창 시절 다른 나라 친구들은 자기가 태어난 나라를 잘 알았다. 그런데 나는 한국을 몰랐다.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한국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류학도가 금융업에 취직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만의 패션 브랜드를 갖고 회사를 운영하려면 경영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영 동아리에 가입했다. 타과 학생은 잘 받아주지 않는데, 경영을 부전공으로 하고 어렵사리 면접을 통과해 들어갈 수 있었다. 두산 전략실에서 인턴으로 일하기도 했다. 동시에 패션 경험도 쌓았다. 한 학기를 휴학하고 동대문 두타 의류 매장에서 일했다.
그런데 졸업을 앞두었을 때 투자은행 취업이 붐이었다. 경영 동아리를 즐겁게 했기 때문에 애널리스트, 컨설턴트가 적성에 잘 맞을 것 같았다. 내게 좀 벅찬 일이라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분명 배울 게 있고 해볼만한 일이라 확신했다.”
'디 에디터스' 출연했을 때. /온스타일 '디 에디터스' 캡처, 조선DB
-결국 퇴사하고 패션업계에 발을 들였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있고 투자은행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았다. 이직하는 선배들을 보며 내가 좋아하는 일을 다시 생각해봤다. 패션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TV를 보는데 ‘패션 에디터를 꿈꾸는 사람을 모집한다’는 자막이 보였다. 마침 ‘디 에디터스’ 접수 마감일이었다. ‘이거다’ 싶어 정신없이 지원서를 써서 냈다.”
디 에디터스는 2009년 패션 채널 온스타일에서 방송한 프로그램이다. 패션 에디터를 꿈꾸는 도전자들이 8주 동안 경쟁했다. 이씨는 최종 2인에 들었다. 방송이 끝나고 제일모직에 패션MD로 입사했다.
-당시 ‘디 에디터스’에서 범상치 않은 지원자였던 것 같다. 통통 튀는 성격이었을 것 같은데
“의외로 거침 없는 성격이 못된다. 성인이 되고서야 한국에 왔다. 이방인으로서 눈치를 많이 봤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사회에 빨리 적응해야 한다 생각했다. 대학교 1학년 때 나팔바지를 입고 갔다가 ‘이게 뭐냐’는 소리를 듣고 다음날부터 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외국에서 왔다고 하면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라는 시선이 있다. 재수없다는 소리 들을까봐 영어도 안썼다. 이때 스스로 편견에 갇혀 살았다.”
-스스로 가둔 테두리에서 벗어난 계기가 있나
“결혼하고 나서다. 남편이 원래 나를 인정하고 응원해줬다. 나는 스트릿 패션을 좋아했는데 사회 생활을 할때 못입었을 뿐이었다. 냉정하게 말해, 20대 때 어느정도 사회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았기 때문에 ‘이쯤 하면 됐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또 갑상선암을 앓고 시각이 변했다.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경고였다. 예전에는 내가 못하는 게 있으면 이틀 밤을 새워서라도 해야 했다. 이젠 안되는 일을 구분하고 포기할 줄 안다.”
이민선씨 제공
◇’주부가 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 깼으면
이씨는 4세 딸과 3세 아들을 뒀다. 오전 7시에 일어나 두 아이에게 아침밥을 먹인다. 오전 9시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낸 뒤 일을 한다. 집에서 업무를 보거나 미팅을 나간다. 아이들이 귀가하는 오후 3시 이씨도 집으로 돌아간다. 저녁 8시 30분까지 아이들을 돌보다,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또다시 일을 시작한다.
-스스로 ‘노는 엄마’라고 부르는 이유는
“주부를 노는 사람이라 보는 인식에 반항하는 거다. 운영하고 있는 가방 브랜드 이름도 ‘플레이올데이’다. ‘하루종일 논다’는 뜻인데 사회 인식을 풍자하고, 주부 창업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좋다고 생각했다. 아이 물품을 넣고 다닐 튼튼하고 큰 가방이 필요했는데 시중에 없어 직접 만들기로 했다. 조리원 동기와 창업했다.”
-주부, 워킹맘들에게 힘을 준다면
“디제잉을 시작할 때 반신반의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이제 결혼하고 엄마인데.’ 한발짝만 나아가보자고 생각했다. 지금 내겐 버거운 일이지만 좀만 노력하면 문턱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작해보니 많은 사람들이 내 음악을 좋아해준다. 얼마 전 ‘수유하면서 들었어요’라는 말을 들었는데 뿌듯했다. 아직도 무언가를 시작할 때 조심스럽고 무섭다. 다만 ‘내가 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시작조차 못하면 너무 억울할 것 같다.”
글 CCBB 에디터 욘두
시시비비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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