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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업)다시쓰는리뷰 : 좁혀지지 않는 거리

이응(119.204) 2020.02.17 18:51:11
조회 280 추천 0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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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혀지지 않는 거리






“내 걱정이, 당신 일에 끼어들어 정말 미안하네요.”


그저 그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하며 내내 침묵하던 모연이 내뱉은 한마디에 시진은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처럼 고개를 떨군 채 그녀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어.

좁혀지기는커녕 멀어지기만 한 거리에 시진은 몹시 실망했어.


걱정.
당신은 걱정이라고 했다.
방금 전까지 당신이 하던 말과 행동의 모든 이유가 나를 걱정했기 때문이었던 거다.
그런데 나는 뭐라고 했더라?


되새길수록 자신이 한 기막힌 말들이 떠올라서 시진은 한숨만 뻑뻑 내쉬었어.


“나 여기 본진에서 모우루 방향 5km 지점이다. 차 좀 갖고 와라.”


모연이 탄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다 시진은 중대로 전화를 걸어 차를 불렀어.

그러곤 막사 방향으로 내처 걷는 시진의 걸음이 평소답지 않게 무거워.


시진은 모든 일이 다 후회스러워.

쓸데없는 짓이라고 했던 말도, 죽은 선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도, 내버려 두라고 했던 말까지 전부 다 후회야.


누군가의 걱정을 받는 게 너무 낯설어서 몰랐어.

걱정돼서 뛰어온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어.

말없이 묻어두려 했던 일이 부지불식간에 모두 드러나 버려서 너무 당황스러웠고, 그래서 그 마음까지 미처 깊게 생각해 볼 수가 없었다고.


그는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에게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탓하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냅두라는 말까지 한 거야.

시진은 너무도 후회스러워.


그렇게 당신에게 언성을 높이고 화낼 일이 아니었는데…….


제대로 그녀에게 설명해주었으면 됐을 일이었는데 순간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아내지 못한 탓에 일을 그르친 거야.

깨달았을 때엔 이미 모연이 한참 떠나간 후였어.


모연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하면 속내를 감추기가 시진에게는 너무도 어려워.

그게 일과 관련되어 있을 때는 그나마 냉정해질 수 있는데, 감정을 이야기할 때는 도저히 그걸 감출 수가 없어.


따뜻한 말, 차가운 말, 무서운 말, 가릴 것 없이 그녀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모두 입 밖으로 튀어 나와. 항상 그래.


조금 전에도 그는 어쩌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감추는 게 더 나았을 이야기까지 전부 말해버렸어.


죽은 선배에 대한 이야기까지 왜 꺼냈을까.

가뜩이나 내 일을 무서워하는 당신에게 그 일까지 말해서 뭘 어쩌자고…….


목숨을 빚졌다는 내 말에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어.

왜 아깐 그 이야기들이 전부 필요하다고 생각한 걸까. 도대체 왜…….


시진은 자책했어.


특임대에 들어오고부터 그는 죽을 위기를 수도 없이 넘기며 살아왔어.

그런데 모연을 만나고부터 그게 새삼 문제가 되기 시작한 거야.

이곳 우르크에서 모연을 다시 만난 후로 그는 내내 후회했어.


처음 만난 날에 농담 삼아라도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총알이 비처럼 쏟아지는데 그 총알을 뚫고 전우를 구하러 갔다는 그 말은 하지 말 걸.

그 말은 하는 게 아니었는데…….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오늘 그가 했던 말을 모연이 전부 기억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 시진은 미치도록 답답해.

그 조그만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그리도 많이 담고 사는지…….

시진은 오늘 그가 했던 말에 모연이 겁을 먹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더 미안해져.


답답한 속을 조금이라도 풀어보자고 때마침 지구 반대편에서 걸려온 대영과 통화를 하는데 그의 부관은 상관의 마음도 모르고 제 짝 얘기만 듣고 싶어 안달이었어.


“명주는 보셨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전 지금 진급도 못하고 감봉도 됐단 말입니다!”


사실 감봉이고 진급 누락이고 그건 지금 시진에게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그가 정말 미치겠는 건 이 일로 모연이 그에게서 완전히 돌아서 버릴지 모른다는 것.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입으로 적나라하게 털어놓은 그의 위험한 일들.

수의, 무덤, 목숨…….


그 모든 단어와 배려 없는 말은 모연을 그에게서 달아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어.

그 생각에 시진은 초조해져.


“당연히 감봉 되고도 남지 말입니다. 대체 여자 때문에 얼마를 쓰시는 겁니까?”
“여자 하나 때문이 아니라 저는 자국민 보호를 최우선으로 삼는 군인으로서,”
“자국민이, 예쁘니까.”
“이 냥반이! 지금 이러려고 전화하셨습니까?”


대영의 말은 시진을 화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위로했어.


팀장님이 지키고 싶었던 ‘그’ 자국민은 지켰지 않느냐고.

감봉이든 진급 누락이든 팀장님이 지키고 싶은 건 지켜냈으니 다행이라고.


대영도 알아.

그의 상관이 감봉이나 진급 누락에 불만을 토로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무언가 다른 일이 있었던 거겠지.


그 일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대영은 상관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기 위해 그가 숨겨둔 보물을 기꺼이 넘겨주기로 했어.

그가 조리실 찬장에 남겨두고 온 와인을 말이야.

술 한 모금에 시름 한 사발 퍼낼 수 있다면 와인 정도야 친우에게 양보할 수 있으니까.


* * *


모연은 내내 울적한 속을 달랠 길이 없어.

시진의 무섭도록 위험한 일과 그녀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그에 대한 원망,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를 곤란하게 만들기만 했다는 미안함까지 그 모든 것들이 모연을 무겁게 짓눌렀어.

그녀의 무거운 마음이 눈물이 되어 주룩주룩 흘러 내렸어.


모연이 울음끝을 삼키는데 숙소 밖으로 헤드라이트가 비치더니 군용 트럭 한 대가 들어왔어.

그리고 한 사람이 조수석에서 내렸지. 시진이었어.


길 위에 남겨진 시진을 태우러 온 병사는 내내 그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어.

징계 받고 온 중대장님이 기분이 좋으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병사는 안절부절 눈만 데룩데룩 굴려댔지.

지금 중대장님에게 중요한 건 그깟 징계가 아니었지만 말이야.


막사로 돌아온 시진은 대영이 남겨두고 갔다는 와인을 찾아 조리실로 왔어.

시진이 와인병을 쥐고 몸을 일으키는데 창밖으로 비가 많이도 쏟아지고 있었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맑았는데, 그가 조리실로 들어와 와인을 찾는 그 사이에 쏟아지기 시작한 거야.


하루 내내 해가 쨍하더니 소나기인가 싶어 조금만 더 늦었으면 저 비 다 맞았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시진이 잠깐 하던 그때, 갑자기 조리실 문이 열리더니 모연이 들어왔어.


시진은 문뜩 깨달았어.

오늘처럼 사건사고가 많았던 날에 그가 바로 쉬러가지 않은 진짜 이유를.

부대 안 사람들 모두가 징계 받고 온 그를 주시하는 오늘 같은 날, 하필이면 온 사람들이 다 오가는 막사 주방에서 술 생각이 난다는 걸 핑계 삼아 서성댔던 이유를.


사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어.

아까 전에 망연히 놓쳐버린 누군가, 강모연이라는 사람을…….


막사 사람들 모두 함께 쓰는 조리실이니 그녀가 들르지 않을까 싶어서 혹시나 하는 우연을 바라며 뭉그적거리고 있었던 거였어.


그런 그가 안타까웠는지 소나기가 모연을 그의 곁으로 데려다 주었지.

한참 멀어져 눈에 안 보일만큼 가버렸던 모연이 다시금 가까워져 그의 앞에 나타난 거야.


눈이 마주치고는 멈칫해서 도로 돌아나가려는 모연을 시진은 다급하게 붙잡았어.


“무슨, 일입니까?”


잠시 멈춰 선 모연이 금방이라도 나가버릴 것처럼 등 돌린 채 어색한 대답을 했어.


“물 좀 마시려구요.”


거짓말이야.

사실 모연은 그를 따라왔어.

그가 조리실로 들어가는 걸 보고 무슨 말을 할지 생각도 안 해보고 일단 따라온 거야.

근데 막상 문을 열려니까 그의 얼굴을 보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고, 그렇게 그녀가 조리실 문 앞에 서서 온갖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에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어.

이제 더는 돌아갈 수도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눈 딱 감고 조리실 문을 연 거야.


그렇게 빗속을 걸어왔다고 하기엔 너무 보송보송한 차림으로 모연은 물 마시러 왔다는 핑계를 댔지.


물 마시려고 이제 막, 지금 막, 방금 막 온 건데 우연히 당신을 마주친 거예요, 하기엔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 옷깃 한 자락 젖지 않았는데도 모연은 그런 깜찍한 거짓말을 했어.

앞뒤가 맞지 않는 거짓말임이 분명한데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느라 거짓말하는 여자는 물론 그걸 듣는 남자도 알아채지 못했지.


모연이 시진을 보고 돌아 나오려고 한 이유는 우연히 만난 것에 놀란 게 아니라, 그녀가 시진을 만나러 오기 위해 끌어 모아온 용기를 그를 보자마자 순식간에 잃어버렸기 때문이야.

저질러 보자는 마음으로 문은 열고 들어왔는데 정말 너무나 딱 정면에서 시진을 보니까 이 무겁고 어색한 분위기에선 뭐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던 거지.

모연은 아까 보았던 시진의 그 냉정하고 칼 같던 모습이 생각나서, 무서워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용기를 모두 잃어버렸어.

좋아하는 사람이 화를 내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다 무섭기 마련이니까.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나한테 화를 내는 그 상황 자체가 주는 압박감과 불편함, 불안감 같은 것은 모연에게도 마찬가지였어.

시진의 입에서 또 쏟아져 나올지 모를 그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모연은 두려워.

그 말을 하며 그가 짓던 표정, 굳어진 입매, 날카로운 말투가 그녀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


그래서 모연은 아까 일에 대한 사과도, 대화도 잠시 미루어두고 싶어서 다시 돌아나가려 했지만 시진에게 이건 기회였어.

아까 그 모습을 벗어 던진 시진에겐 그 모르게 모연이 만든 이 우연 아닌 우연이 무척이나 반가운 만남이야.


“근데 왜 그냥 가요. 마시고 가지.”
“혼자 있고 싶으신 것 같아서요.”
“아뇨. 같이 있고 싶습니다. 나 여러 번 얘기했는데.”


시진의 입은 또 그의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밖으로 꺼내놓았어.

그렇게 다퉈놓고 그런 말을 할 타이밍이 아니었지만, 모연만 옆에 있으면 그의 입이 정신을 못 차리고 그의 마음 속 진심을 마구 쏟아내.

딱히 시진도 그걸 막을 생각이 없다는 게 문제이기도 하지.


그는 모연에게 얼마 전에 같은 말을 했었어.


-머니까. 오래 같이 있고 싶거든요.


얼마 전 나바지오로 가는 선착장에서 모연을 그 자리에 멈춰 서게 했던 그 말이 지금 또 시진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거야.

그런데 그때는 모연을 그에게로 다가올 수 없게 했던 그 말이 이번엔 반대로 모연을 그에게서 멀어지지 못하게 했어.


그의 말에 놀란 모연이 멈추어 돌아보자 시진은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청했어.


“가지 말고 와요. 이쪽으로.”


시진은 아까 그렇게 매몰차고 차갑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싹 지우고 평소와 같은 부드럽고 상냥한 남자로 돌아와 있었어.

그래서 모연도 조금 긴장을 풀고 용기를 낼 수가 있게 된 거야.

그녀는 너무 가까이는 아니지만 또 너무 멀지만도 않은 곳에 기대서서 눈동자를 또록또록 굴렸어.


모연은 자신을 붙잡아 준 시진에게 내심 고마워.

그대로 돌아서서 나갔더라면 문 닫고 나가자마자 그녀는 또 후회를 삼켜야 했을 테니까.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작은 보폭으로 세 걸음쯤.

모연에게는 여전히 그 정도의 거리가 필요해.

서로 팔을 뻗어 스카프를 주고받을 정도의 거리, 팔걸이를 사이에 둔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거리, 와인병을 주고받을 정도의 거리 말이야.

그보다 가깝게 거리를 좁히려면 그녀에겐 시간이 더 필요해.


시진은 그녀가 더 이상 가까이 오지는 않아도 일단 그가 끌어당기는 대로 그의 옆에 다가와 주었다는 게 기뻤어.

몹시도 굳어 있던 시진의 입매가 조금씩 편안해져.


“물 대신 와인은 어때요?”


시진이 마개를 뽑아 건네는 와인병을 모연은 아무 말 없이 받아 쥐고는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어.

잔을 든 채 멍하니 그녀를 보는 그에게 모연은 불쑥 와인병을 내밀었어.


마실래요?


그 행동에 결국 시진이 웃었어.

가을바람에 코스모스가 살랑이듯 모연의 사소한 행동, 표정에 시진의 마음이 한들거려.


“파병 군인은 술 못 마십니다.”
“마시려고 꺼낸 거 아니었어요?”
“아까는 그랬는데 지금은 목격자가 생겨서 망했습니다.”


사실은 마실 마음이 사라진 거지.

가까워진 적도 없이 멀어져버린 모연과의 사이가 속이 상해서 술이 고팠는데 그녀는 시진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다가와 주었으니까.

시진에게는 더 이상 술이 필요 없어.


서로 간에 오가는 작은 몸짓들, 표정, 농담에 조금씩 둘 사이가 편안해지고 있어.

모연은 시진의 농담에 픽 웃으면서도 자신이 이곳으로 시진을 쫓아와 하려던 말을 잊지 않았지.

모연은 언제나처럼 미안한 일에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를 피하지 않고 시진에게 똑바로 사과했어.


“아까는 뭣 모르고 나대서 미안해요.”
“사과는 내가 하려고 했는데. 같이 한 걸로 합시다.”


조금 풀어진 긴장에, 편안해지는 분위기에 시진이 가볍게 그 사과에 편승하려는데, 모연이 한 말은 그를 다시 얼어붙게 했어.


“안 하셨잖아요.”
“…….”


모연의 말은 그의 가슴을 선득하게 했어.


내 사과가 너무 가벼웠구나.

그래. 이렇게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지.
내가 분위기에 휩쓸려서 또 실수를 했구나.


그렇게 시진의 얼굴이 파삭파삭 굳어지는데 그걸 보곤 모연이 웃었어.


“뭘 또 쫄아요! 내가 또 나댔나?”


모연의 장난과 농담은 시진의 심장에 좋지가 않아.

그녀의 표정 하나, 눈짓 한 번에 시진의 가슴은 덜컹거려.


“뭐 타고 왔어요?”
“뛰어왔죠. 나나 되니까 이 시간에 도착한 겁니다.”
“봤는데. 아까 차에서 내리는 거.”


시진은 모연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그녀가 만든 이 우연 아닌 우연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어.

그가 차에서 내려서 바로 직행한 곳이 여기 주방인데, 차에서 내리는 그를 보았다면 모연이 이곳에 우연히 왔을 리가 없잖아.

알파팀 팀장씩이나 된 남자도 좋아하는 여자의 내숭과 거짓말을 간파해내기는 쉽지 않은지, 시진은 답지 않게 어리바리하게 굴어.

아마 모연이 말해주지 않는다면 시진은 꼬부랑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도 이 날의 진실을 모를 거야.


“봤구나……. 근데 왜 묻습니까?”
“농담 듣고 싶어서요.”


모연은 이제 시진의 농담과 거짓말을 구분할 줄 알아.


우르크에 온 첫날, 시진을 다시 만난 신기한 그 날, 안전구역 울타리를 넘어간 모연에게 시진이 했던 농담을 그녀는 그 때 거짓말이라고 했어.

그랬던 그녀가 이제는 그의 농담을 농담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지.


당신의 농담이 듣고 싶어서 던진 물음이었다는 모연의 말에 시진은 그의 마음에 그녀가 설탕을 뿌리기라도 한 듯 달콤하게 웃었어.


“정복 잘 어울려요. 잘 어울리는 옷 입고 징계 받고 온 사람한테 할 소린 아니지만.”
“이게 정복인 건 어떻게 알아요?”


부사관이 뭔지도 모르던 모연은 이제 정복이 뭔지도 알아.

지난 8개월 간 여기저기서 군에 대한 말을 많이 들었거든.

사실 그녀의 주변엔 언제나 그런 말들이 떠돌아다녔을지도 몰라.

그 말이 그녀에게 의미가 없었다 뿐이지.


그런데 시진과 헤어지고 나서는 모연은 도통 군에 대한 이야기와 군복 입은 환자들에게서 관심을 떼어낼 수가 없었어.

덕분에 알음알음으로 알게 된 것이 적지 않지.


“왜 몰라요. 여자도 제복 판타지 있어요.”
“내가 군인이 된 이유죠.”


아까 두 사람의 그 날선 대화 속 군복은 수의였는데, 지금 둘의 대화 속 육군 정복은 제복 판타지로 통했어.

시진은 그녀의 말에 맞장구치며 천연덕스럽게 굴었지.

그의 농담은 한 번 더 모연을 웃게 했어.


여전히 두 사람 사이는 몇 발자국 떨어져 있지만 둘의 마음만은 서로에게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있어.


“맛있습니까?”


모연이 와인을 또 한 모금 마셨어.

아까 처음 한 모금을 마실 땐 좀 써서 인상을 찌푸렸는데, 지금 다시 마시니까 아주 달콤한 와인이야.

그 사이 와인 맛이 변했을 리는 없으니, 모연의 마음이 변한 거겠지.


“좀? 술 좋아해요?”
“……같이 영화 보고 술도 한 잔 하고 싶었는데.”
“완벽한 데이트가 될 뻔 했네요.”


두 사람은 같은 날을 떠올리고 있어.

시진이 모연을 만나러 두 시간도 더 빨리 병원 앞에 서있었던 그날, 그저 웃고 즐겁다가 그가 모연을 남겨두고 갑자기 가버렸던 그날을…….


두 사람 사이에 시진의 일이 제대로 훼방을 놓아서 둘을 헤어지게 만들었던 그날에 대해 그는 말하고 있었어.


시진은 내내 궁금했었어.


그날 내가 당신을 덩그러니 놓고 오고 나서 혼자 남은 당신이 영화를 제대로 볼 수는 있었을까.

내가 가자마자 영화관을 나온 건 아닐까.

그랬다면 그 후에 그 영화를 봤을까?


그 후에 혹시 다른 남자와 본 건 아닐까…….


“영화는 봤습니까?”
“아뇨.”
“왜, 안 봤습니까?”
“누군가와 같이 보려고 했던 영화니까요.”
“…….”


시진의 심장이 뛰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어.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모연의 눈썹 한 올, 눈매, 말하는 입술을 응시하고, 그의 귀는 창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는 아랑곳없이 오직 모연의 입술에서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만 들었어.


“그리고 생각했죠. 다음에 남자랑 영화 볼 땐 재밌는 영화는 피해야겠다. 그 영화 천만 될 때까지 기사가 매일 쏟아지는데, 그 영화는 나한테 곧 유시진이라 자꾸 생각이 났거든요.”


말하는 내내 그때를 회상하는 듯 모연의 눈동자는 먼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어.

두 사람 사이에 오가던 대화가 잦아들고 창밖의 빗소리가 볼륨을 높였어.

시진의 뜨거운 시선에 모연은 견딜 수 없게 숨이 막혀.


이런 걸 취중진담이라고 하는지, 와인 몇 모금 좀 마셨다고 말을 너무 여과 없이 뱉은 것 같아서 모연은 뒤늦게 당황스러워졌어.

차마 시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녀는 와인으로 타는 목만 적셨어.


모연의 말이 끝나도 시진은 아무 말도 안 해.

아니, 할 수가 없지.

충격과 전율, 감동과 환희, 욕망과 인내가 차례로 그를 스쳐갔어.

그녀의 말은 마치 이렇게 들렸어.


당신과 보려던 영화라 당신 없이 나 혼자서는 볼 수가 없었어요.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구와도 보고 싶지 않았어요.
매일매일 쏟아지는 그 영화에 대한 기사를 볼 때마다 나는 매번 당신 생각을 했어요.
지난 시간동안 당신을 잊은 적이 없어요, 나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어.

아니, 다른 쪽으로 생각하고 싶지가 않아.

시진은 계속해서 참았어.

이제까지 그래왔듯 자신을 꼭 조여 당겼어.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지.


그의 이성이 꺼질듯 말듯 깜빡댔어.


“…….”
“되게 먹고 싶은가 봐요?”
“……방법이 없진 않죠.”


모연이 끝내 그의 인내심을 날려 버렸어.

불안하게 깜빡거리던 시진의 이성이 결국 탁! 하고 불이 꺼졌어.

그와 그녀 사이의 몇 걸음을 시진이 순식간에 좁혀 모연의 입술을 삼켰어.


모연은 그를 밀어내지 않았어.

지금은 그러고 싶지가 않아.

모연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가 이내 내리 감겼어.


둘은 서로의 숨결을 삼키고 체온을 느꼈어.

모연에게 묻어있던 와인향이 시진에게로 옮겨가고 빗소리가 멀어졌어.

마지못해 입술을 떼어낸 사이 시진은 속눈썹이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모연을 내려다보았어.


검은 눈동자, 희게 빛나는 피부, 작고 동그란 콧망울을 스쳐 방금 그가 맛 본 붉게 젖은 입술을 시진은 빠짐없이 눈에 새겼어.


모연의 손에서 아슬아슬 떨어질 듯 흔들리던 와인병을 받아 내려놓고는 시진이 다시 그 입술로 다가가는데 그녀가 순간 살짝 고개를 돌려 피했어.


“!”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난 듯, 시진의 이성에 다시 불이 들어왔어.

그는 모연의 싸인을 알아듣고 바로 물러섰어.


“……안녕히 주무세요. 이건 나 준거니까.”


모연이 눈 깜짝할 새 그의 눈앞에서 사라져.

이제야 비로소 가장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도 해보기 전에 그녀는 순식간에 저 멀리로 사라져버렸어.

10초 전까지 모연이 그의 품 안에 있었는데 이젠 찬바람만이 시진의 가슴 속을 불어오고 있어.





이어지는 글 : 특별한 사람

수정 전 : 좁혀지지 않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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