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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리뷰 : 당신의 평안만은 지켜지기를

이응(119.204) 2020.02.13 16:06:59
조회 372 추천 0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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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평안만은 지켜지기를




“니가 한 짓 때문에 지금 몇 사람 모가지가 날아가게 생긴 줄 알아?”
“변명의 여지없습니다.”
“없지. 없어야지!”


박병수는 이 모든 상황을 너 때문이라며 시진을 탓했어.

자기 모가지 날아갈까 전전긍긍하는 상관은 여전히 제 잘못을 모르고 있지.

아마 앞으로 평생 모를 거야.

그러나 시진은 부족한 상관이나마 예를 다했어.


시진은 영창행을 당해 본 것이 15년 군생활 중 난생처음이야.

몸으로 때우는 벌이야 많이 받아봤지만 이렇게 기록으로 남을 만한 수위의 처벌은 받아본 적이 이제껏 없었어.

그의 군생활은 항상 포상과 훈장의 연속이었으니까.


“사고만 안 치면 때마다 진급에 별이란 별은 다 달 놈이 지 발목을 지가 잡아?”


그래. 대위 유시진은 그를 그다지 탐탁하게 생각지 않는 박병수의 눈에도 때마다 진급 대상이 될 만한 군인이었고, 앞으로 자기보다 더 높아질 것이 분명한 눈꼴시게 능력 좋은 놈이었어.

그렇게 탄탄대로를 걸어갈 것만 같았던 놈이 갑자기 뻘짓을 하더니 제 발로 불구덩이에 걸어 들어가는 꼴이 박병수는 참 어처구니가 없었어.


시진도 알고 있어.

오늘 일은 분명 그의 인생에서 아주 큰 걸림돌이 될 거야.

더 나쁜 건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


시진은 무바라트의 생사에 따라 자신에게 얼마든지 더 큰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까지도 그는 이미 전부 각오했어.

그는 숙였던 머리를 들고 상관을 똑바로 응시했어.


“후회 없습니다. 모든 결정은 제가 했습니다. 책임도 전부 제가 지겠습니다.”


진심이야. 시진의 마음엔 후회는 먼지 한 톨 만큼도 없어.

그는 여전히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책임을 혼자 질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해.


이 먼지 풀풀 날리는 영창행도, 보직해임도 모두 시진에게 있어 영 최악은 아니었어.

어쩌면 아랍 의장이 아주 잘못되어서 군복을 벗는 일이 생기거나 더 최악은 그가 징역을 살아야 한다고 해도 시진은 오늘 상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가 오늘밤 꼭 지키고자 했던 건 이미 모두 지켜졌으니까.


오늘 그가 내린 결정은 한 생명을 살렸고, 이제껏 지켜온 신념을 잘 지켜냈고, 그의 전우들의 명예와 영광과 사명감을 지켰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지키고 싶었던 한 여자의 인생을 낭떠러지 끝에서 구했지.

발끝에 채인 돌이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그 곳에서 그는 지키고 싶었던 사람을 그런대로 잘 지켜냈어.


“……너 그 말, 진짜 책임져.”


시진의 말을 박병수는 대대장님께 책임 미루지 않을 거라는 말로 들었는지 몰라도, 그 말의 진짜 뜻은 ‘명령을 한 것은 본인이며 그 명령에 따랐을 뿐인 휘하 알파팀과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인 의료팀 전체는 이 일의 책임 문제에서 제외시켜야 한다.’였어.

그래야만 시진이 그 정의롭지만 위험했던 결정을 내린 의미이자 목적이 다행스럽게도 지켜질 테니까.


시진은 만일 무바라트가 죽는다면 닥쳐올 또 한 번의 위기마저도 모연을 비켜갔으면 해.

제발 그랬으면 하지.


그 시각 모연은 시진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어.


“쌤, 어떡해요? 유대위님 잡혀갔어요! 아까 그 일 때문인가 봐요!”


시진이 보급창고로 연행되어 가는 걸 본 민지가 모연을 찾아 무바라트의 병실로 뛰어 들어왔어.


그리고 모연은 알았지.

귀에 꽂은 인이어를 벗어던지던 시진의 행동, 그리고 잠시 생각하던 그의 모습.

거기서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던 거야.

모연은 시진을 찾아 뛰었어.


“유대위님 어딨어요?”
“구금대기 중입니다. 면회 안 됩니다.”


대영은 모연이 무슨 마음으로 이곳에 온 건지 알지만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았어.

안에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인 대대장이 있었으니까.


“부탁드려요. 딱 5분만요! 네?”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하는 모연과 그런 그녀를 딱하게 보는 대영, 시진을 걱정하는 두 사람이 마주보는 사이 보급창고 문을 열고 박병수가 나왔어.

대영은 은근슬쩍 모연을 가리고 서서 박병수를 맞았어.

아니나 다를까 박병수는 안에서는 시진을 윽박지르고 밖으로 나와서는 곧바로 또 다른 주모자, 모연을 찾았어.


그가 할 말 못할 말 못 가리고 마구 질러댈 위인임을 잘 아는 대영은 지금만큼은 모연을 대대장과 대면시키고 싶지 않았어.

그나마 무바라트가 깨어난 후에 자기 목이 안전해지고 나면 대대장이 말을 가려할 것 같아서 그때까진 미루어두고 싶었지.

하지만 모연은 정신 나간 의사 어쩌고 하며 혼자 잘나신 군인을 피해 숨어있을 생각이 전혀 없었어.


“제가 강모연입니다.”


갑자기 부하의 등 뒤에서 튀어나온 여의사를 보는 박병수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고맙게도 그녀를 보호해주려 했던 대영의 등을 벗어난 모연은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어.

낯짝 보셨으니 할 말 하시라고.


“VIP는 아직이요?”
“지켜보는 중입니다.”
“그런 말은 누가 못해! 지켜봤는데 안 깨어나면.”
“……진단과 치료는 모두 의학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무바라트의 의식불명에 속 태우는 사람이 저 하나가 아님에도 세상시름 혼자 다 짊어진 양 구는 군인에게 모연이 해줄 말은 그것뿐이야.


수술은 성공했지만 아직 환자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어.

수술하고 날이 바뀌지도 않았는데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눈을 뜨고 회복할 것 같았으면 애초에 이런 난리가 나지도 않았지.


하지만 당장이라도 군복 벗으라는 말을 들을까 겁에 질린 중년남자에게 그 답이 탐탁할 리가 있나.


“당당하시네. 병원 짤려도 개업하면 된다 이거지. 잘 나가는 의사시니.”
“…….”


모연은 덮어놓고 비아냥대는 박병수의 말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아.

그녀가 나는 그런 마음으로 그 환자를 수술한 게 아니다. 난 그저 그 환자에게 필요했던 적절한 치료를 했을 뿐이다.

애써 입 아프게 말해봐야 앞에 서 있는 이 사나운 기세의 군인은 그걸 곱게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직후 이어진 말에 모연은 굳어버렸어.


“유시진이 인생은 끝장내놓고.”
“!”
“현재 상황, 십수년 군 경력에 출셋길은 이미 날려 먹었고, VIP 안 깨어나면 남은 인생까지 시원하게 날리는 거고. 의사선생 합리적인 선택 덕에.”


박병수는 이런 상황에조차 시진이 당하는 일을 모연의 탓으로 돌렸어.

자기 눈앞에 서 있는 수술복 입은 의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총알받이로 쓰려고 했으면서도 박병수는 그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도 느끼지 않아.


박병수의 말은 모연에게 큰 오해를 하게 했어.

‘그녀의 선택 때문에’ 시진이 이렇게 된 거고, 앞으로 더 심한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하게 만든 거야.

그리고 이 오해는 이후 두 사람이 시진의 징계로 인해 심각한 대화를 하게 만든 출발점이기도 하지.


모연은 자신을 수술실에 들여보낸 시진의 그 결정이 무엇을 각오하고 내린 것이었는지 이제 알았어.

그는 그 모든 대가를 치를 것을 감수하고 그녀가 무바라트를 수술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거야.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는지. 그렇게까지 하면서 그가 원한 것이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결국 시진이 당하고 있는, 앞으로도 더 당할지도 모르는 그 모진 일들이 자신의 선택에서부터 야기된 것이라는 생각을 모연은 지울 수가 없어.


여전히 눈을 굳게 감고 있는 환자를 보며 모연의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어.


* * *


시진은 자신에게 닥쳐올 일이 꽤나 큰일이라는 걸 예상하고 있어.

무바라트가 무사히 깨어나든 아니든 그는 징계를 피할 수 없을 거야.

징계 수준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군복을 벗거나 군법에 따라 징역에 처할지도 모를 일이지.

그로서도 불안과 초조, 그리고 허탈함을 모두 감출 수는 없어.


그렇게 시진이 온갖 생각들을 삼키는 사이 문이 열리고 대영이 들어섰어.

이런 사태가 되었어도 사령관의 전출 명령은 변함이 없어서 대영은 조국으로 돌아가야만 했으니까.


“지금 가시는 겁니까?”
“이런 상황에 먼저 가서 죄송합니다. 전출신고 하겠습니다.”
“보직해임 돼서 이제 직속상관도 아닌데 무슨 신곱니까.”
“…….”


두 남자가 다시 보게 됐을 땐 직속상관은커녕 더 이상 시진이 군인이 아닐 수도 있겠지.

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잘 감추던 시진의 쓴 속이 결국 말이 되어 튀어나왔어.


대영은 그런 상관을 보다가 이내 오늘 그가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을 이야기 해주기로 해.

그래야만 어울리지 않게 숙여진 상관의 고개를 바로 세워줄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명예, 영광, 사명감을 가진 한 명의 군인으로서, 옳은 명령으로 그 모든 것을 지켜준 그의 상관이자 그의 전우에게 지극한 감사를 담아서 대영은 말했어.


“오늘 저의 직속상관이 내린 명령은 모두 옳았습니다. 또 오늘 저의 직속상관이 내린 모든 명령은 명예로웠습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보는 상관에게 대영은 못 박았어.

당신은 모두 옳았다고, 명예로웠다고, 여전히 저의 상관이시니까 고개 숙이지 말라고.


“조국에서 뵙겠습니다, 중대장님.”


보직해임 명령 한 마디에 대영에게 시진이 직속상관이 아니게 되진 않아.

대영은 지금도 언제든 시진의 명령을 가장 우선할 준비가 되어있어.

시진의 명령을 따를 때면 언제나 대영은 떳떳했고 자랑스러웠어.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게 기꺼웠고, 언제나 당당할 수 있는 명령을 내리는 상관을 만난 제 운에 감사해왔어.


그런 상관이 도리어 그 올곧음 때문에 수모를 당하고 있는 이 상황이 대영은 답답하고 고통스러워.

시진의 숙인 고개를, 좁아진 어깨를 본래의 꼿꼿하고 바른 모습으로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대영은 더 바랄 것이 없었어.


“……소주는 제가 사겠습니다. 무박삼일.”


대영의 진심어린 말은 시진의 마음 한구석에 남았던 씁쓸함을 모두 날려 버렸어.

대영은 그의 스승이었고, 이제는 동료가 되었고, 마음으로는 오래전 이미 친우가 됐어.

전쟁터에서 자신의 등을 맡기기에 누구보다도 안심되고 믿을 수 있는 전우가 바로 대영이야.

그런 대영이 하는 말이라서 시진에겐 더 값지고 영광됐어.


나는 옳았던 거야.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시진의 결정은 그의 전우들에게도 자랑스럽고 명예로운 것이었어.

그는 썩 잘 해낸 거야.

대영은 그걸 확인시켜주었어.


대영의 말은 시진에게 있어 진급보다 보람됐고, 그 어떤 표창보다도 그를 명예롭게 했어.

시진은 마치 가슴팍에 훈장 하나를 더한 것처럼 영예로웠어.

시진은 대영의 경례를 받았어.


대영은 시진에게 인사를 전한 후 부중대장의 보직을 내려놓기 바로 전에 모연을 찾아와 면회를 허락해주었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게 다야. 바르고, 옳고, 정의로운 일을 행하고도 고통 받는 두 사람을 위해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서로를 볼 수는 없어도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대영은 이 고통스러운 밤에 그것만이라도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어.


여전히 의식이 없는 무바라트와 그로 인해 장담할 수 없는 내일이 더 불안하고 초조할 두 사람에게 고작 10분이지만 그 짧은 시간이라도 마음을 풀어놓고 위로할 시간을 대영은 주고 싶었어.


20시 50분부터 21시 정각까지, 그 사이 고작 10분.

그 시간을 위해 모연은 한걸음에 보급창고로 달려왔어.

지키는 군인도 한 명 없는 건 대영의 배려겠지.


시진은 길고 긴 밤 불안을 삭히느라 여전히 창고 안을 서성대며 생각에 잠겨 있어.

영창이 처음인 군인은 요령도 피울 생각 못하고 벌 받던 자리 그대로 서서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어.


이른 저녁에 수술이 있었고 사실은 이제야 겨우 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었어.

아직도 달은 하늘 한가운데에 걸려 있지.


이 밤이 얼마나 길어질까, 아침이 된다고 무엇이 달라지기나 할까, 어쩔 수 없는 근심을 하던 남자의 귀에 힘없는 인사가 들린 건 바로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이었어.


“저 강모연인데요.”


모연의 목소리가 창고 문 너머로 들리고 시진은 문 바로 앞에, 그녀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다가와 앉았어.


“되게 반갑네. 나 면회 온 겁니까?”


친우의 배려라는 걸 알아챈 시진은 그에게 마음 깊이 감사를 느꼈어.

어두침침하다고 생각했던 창고 한 켠 쪽창에서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는 걸 시진은 모연의 인사를 듣고서야 알 수가 있었어.

그의 마음속에도 깜빡이며 불이 밝혀진 것처럼 조금은 환해진 것 같아.

대영의 선물은 소주 두 궤짝은 사야 갚을 수 있지 싶었어.


그때 문 너머에서 들린 모연의 낮은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던 시진의 미소를 굳어지게 했어.


“……미안해요.”


쉽게 말을 잇지 못하던 모연에게서 들려온 미안하다는 말에 시진은 마음이 아파와.

왜 지금 이 상황에 그가 모연에게서 사과를 들어야 하는지 시진은 속이 답답해.


당신에게 사과를 듣자고 내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닌데…….
잘못한 것도 없는 당신이 왜 사과를 해요.


“강선생 사과할 일 한 거 없는데.”
“환자가…… 아직 안 깨어나요.”
“이 남자 저 남자 너무 걱정하는 남자가 많은 거 아닙니까? 헤프게 굴지 말고, 강선생은 이 시간 이후 내 걱정만 합니다.”


누가 누구를 위로하는 건지…….

안에 갇혀서도 그녀를 위로하는 농담에 모연은 더 미안해지기만 해.

지금 자기 걱정만 해도 모자랄 사람에게 자꾸만 걱정 끼치는 게 모연은 속상하고 마음이 아파.

그가 괜찮은 척 너무 애쓰는 것 같아서 모연의 눈에선 소리 없는 눈물만 펑펑 쏟아졌어.


“아까 보니까 강선생이 전에 했던 얘기 진짜던데.”
“뭐가요?”
“수술실에서 섹시하다던 말.”


모연이 애써 울먹임을 참는데 시진은 그 울먹임마저 달래주고 싶었는지 그녀의 아픈 곳을 어루만졌어.


변했다던 당신 말은 틀렸어요.
아까 당신의 그 모습은 내가 첫눈에 반했던 그때와 같았습니다.
당신은 전혀 변하지 않아서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워요.


시진의 따뜻한 말에, 진심어린 위로에 모연은 가슴 시리게 고맙고 미안해.


“근데 왜 그랬어요. 아까 그 상황, 선택할 수 있었잖아요. 이렇게 안 될 수도 있었잖아요.”
“말했잖아요. 미인과 노인과 아이는 보호해야 한다가 내 원칙이라고. 미인과 노인, 눈앞에 둘이나 있는데 보호 안 할 재간 있나.”


시진은 난 그냥 내 원칙을 따랐을 뿐이라고 모연이 더는 미안해하지도 못하게 대답했어.


당신은 의사로서 환자를 살렸고 나는 내 원칙을 지켰으니 우리 둘은 옳았어요.
그러니까 서로 미안해하지 맙시다.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요. 당신은 잘못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


“오늘 아주 용감했어요. 압니까?”


그의 말에 모연은 결국 참고 참던 울음을 터뜨려 버렸어.

지금 가장 속상하고 막막할 사람이 하는 말이라곤 모두 그녀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칭찬하는 말 뿐이라는 게, 그의 말에 위안 받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모연은 참을 수 없이 가슴이 아파.


“……웁니까, 지금?”


문 너머로 들리는 모연의 울음소리에 시진은 이 모든 것들이 백배는 더 답답해지는 것 같아.

미안해하지 말라고, 잘했다고 한 말인데 그 말이 오히려 모연의 눈물을 돋운 것 같았어.

모연이 훌쩍이는 소리에 시진은 속이 상해.


서상사는 기왕 도와줄 거면 이 쓸데없이 튼튼한 문까지 좀 따주고 갈 것이지 그걸 그냥 갔네.

아오, 이 일관성 있는 사람.


“거기 안엔 괜찮아요? 뭐 필요한 거 없어요?”
“C4나 RDX 부탁합니다.”
“그게 뭔데요?”
“폭탄입니다. 좀 전까진 괜찮았는데 방금 문 부수고 나가고 싶어졌습니다. 누구 땜에.”
“이 와중에 농담이 나와요?”
“안 되는데 그 어려운 걸 자꾸 해냅니다, 내가.”


그가 끝까지 모연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고 싶어 하는 게 느껴져서 모연은 이내 픽 웃었어.

그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어서 슬프고, 자기 걱정도 할 줄 모르는 남자가 아프고, 그를 이렇게 만든 게 자신이라서 미안하면서도 결국에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이 고마워서 모연은 울음을 멈추었어.

자신이 울음을 멈추지 않으면 울음을 그칠 때까지 문 안에 갇힌 저 남자가 저 아픈 농담을 해달 것 같았거든.

그건 더 슬픈 일이니까.


“시간 다 됐나 봐요.”


벌써? 참 빠르기도 하네…….


혼자 있는 시간동안엔 속 터지게 느리더니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지 10분은 쏜살같이 흘러가고 창고 앞을 지키기 위해 군인들이 돌아오고 있었어.

멀리서 다가오는 군홧발 소리가 들리자 모연은 문틈으로 무언가를 얼른 건넸어.


“이거요. 아무래도 필요할 거 같아서……. 이제 가볼게요.”
“고마워요. 마침 딱 필요했던 건데.”


모기향이었어.

하룻밤 태우면 딱 좋을 회색빛 모기향 한 둘레…….


폭탄 밖에는 필요한 게 없다는 시진이지만 그래도 모연은 뭐라도 챙겨줄 게 없을까 싶어서 가져온 거였지.

모기가 많은 우르크의 밤에 이거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군 내 보급 창고에 수십 상자 쌓여 있는 게 모기향이라는 걸 알 리가 없는 모연이 최선을 다해서 생각하고 생각한 결과였어.


그 마음을 알기에 시진은 눈앞 한가득 쌓여있는 모기향 상자가 무색하게도 모래사막 마지막 남은 물 한 모금처럼 조심스럽게 그걸 받아들었어.

모연이 건넨 모기향은 시진에게는 그녀가 하는 걱정이고 그녀가 주고 싶었던 위로였어.


피어오르는 모기향 연기를 보며 시진은 밤새 많은 생각을 했어.

정말로 군복을 벗게 될지도 모를 이 상황이 언제쯤이면 끝이 날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로지 자신만의 책임으로 끝이 날 수 있을지, 쪽창으로 들어오는 달을 올려다보며 시진은 밤새 그렇게 앉아 있었어.


메디큐브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모연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어.

더는 시진과 함께 있도록 허락받지 못한 시간을 환자에게로 돌리며 모연은 오늘 같은 밤이 내일은 부디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어.

그렇게 모연의 걱정을 먹고 시진의 불안을 삼키며 그 밤은 아주 느리게 지나갔어.


* * *


다음날 새벽.

사람들의 속을 무던히도 태우던 무바라트 의장이 깨어났어.

아랍 연맹은 대한민국에 간밤의 일들을 모두 불문에 붙여주기를 요청했고 그에 따라 시진은 구금 상태에서 풀려나 중대장으로 복귀했지.

이후 징계위원회는 열리겠지만 일단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모우루 중대는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거야.


“유대위님 방금 풀려나셨대요!”


민지는 전서구마냥 시진의 소식을 부지런히 물어다 날랐고 그것을 듣자마자 모연은 또 메디큐브를 빠져나와 정신없이 그를 찾아 뛰었어.

뚜렷하게 그에게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무사한 모습을 그녀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어.

하지만 시진은 혼자가 아니었지.

장병들이 가득한 사식당 한가운데서 그는 그녀를 맞았어.


아뿔싸!

순간 넘쳐 오른 격정적인 마음이 불러온 이 초롱초롱한 수십 쌍의 눈동자.

아차 싶어진 모연이 돌아 나오려는데 시진은 그녀의 반가운 걸음을 붙잡았어.


“왜 그냥 갑니까? 나 보러 온 거 아닙니까?”
“나중에요. 식사하세요.”
“아뇨. 지금 봅시다.”


병사들 다 보는 앞에서 저 여자는 날 만나러 온 거니까 다들 조용히 밥이나 먹어라, 하고는 시진은 모연을 데리고 유유히 사식당을 벗어났어.


그는 중대원들이 보는 앞에서도 모연과의 사이를 감출 생각이 없어.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을 만나러 달려온 그녀에 대한 반가움도 숨길 마음이 없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병사들과 세 명의 알파팀은 아주 익히 알고 있던 둘 사이를 다시 한 번 확신했어.

그리고 그에 우근은 한없이 못마땅해졌지.


병원 시트가 살랑살랑 날리는 그 사이에 멈추어 선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딴청만 부렸어.

모연은 어제 시진이 듣는 데에서 운 것도 좀 민망하고 미안할 일 안했다는 그에게 또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도 없어서 그저 하릴없이 눈동자만 굴렸어.


모연과 마주선 시진은 또 그 나름대로 입을 뗄 수가 없어.

급해서 일단 붙잡아 놓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어제 실컷 상처 주는 말을 해놓고 제대로 얼굴 보는 게 지금이 처음인 거야.

어떤 얼굴로 마주봐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그는 사실 잘 모르겠어.

결국 아쉬운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지.


“……돌팔인 줄 알았더니 아닌가 봐요? 살렸던데?”
“살리라면서요.”
“그 말은 또 잘 듣네요? 의료팀 일은 의료팀이 알아서 하게 두라고 했던 거 같은데.”
“보기보다 뒤끝 있으시네요?”
“강선생은 하루 새 쿨해졌네요?”
“…….”


모연은 어제 그 자괴감 어렸던 뾰족한 말을 밤새 후회하고 반성했어.

자존심 때문에 솔직히 말하지 못했던 그 인사를 뒤늦게라도 전하고 싶었어.

어제 했어야 했는데 하룻밤 늦어진 그 인사를.


그 하룻밤 사이에 큰일이 여럿 지나갔고 고마움을 전할 일이 또 있었어.

그것에 대한 감사만큼은 늦지 않게 전하고 싶어.


“고마운 건 그냥 고마운 거라면서요. 고마웠어요. 믿어줘서.”


시진은 모연이 전하는 감사의 인사에 지난밤의 일이 그런대로 괜찮아진 것 같아.

아직 그에게만은 끝이 난 게 아니지만 모연은 이대로 끝이 났다고 알았으면 해.

지난밤은 모연에겐 너무 무서웠겠지.

시진은 그녀가 더는 지난밤의 일로 마음 고생할 일이 없기를 바라.


“많이 무서웠죠.”
“솔직히 좀…… 네. 대위님도 무서웠죠.”
“나한텐 비교적 익숙한 상황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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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에게 다시금 현실을 상기시키는 말이 또 두 사람 사이에 튀어나왔어.

시진은 그녀가 그것을 잊을 만하면 다시 떠올리게 해.

둘 사이에 여전히 남은 문제를, 남은 거리를…….

시진이 의도한 것도 바란 바도 아니지만 주머니 속에 있다고 송곳의 뾰족함이 감추어지지 않는 것처럼 둘 사이의 문제는 자꾸만 나 여기 있다고 삐죽 그 몸을 내밀곤 해.


그래. 그랬었지. 내가 잊고 있었어.
당신은 간밤의 그런 일보다도 훨씬 더 무섭고 위험한 일을 하는 남자였지.


그런 모연의 상념을 뚫고 들리는 시진의 말.


“그리고, 마음에 계속 걸렸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방송하는 의사도 있어야 한단 말, 진심 아니었습니다. 담아두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틀린 말도 아닌데요, 뭐.”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도 환자를 살리겠다는 의사한텐 틀린 말이죠.”
“정 그러시면 뭐.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내내 마음에 걸렸던 그 말을 시진은 사과했어.

그가 순간 감정에 욱해서 내뱉었던 말이 그녀에게 지독한 상처를 주었고 그 고통은 여전히 유효할 테니까.

사과는 빠를수록 좋기에 그 후 모연의 눈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처음, 시진은 진심어린 사과를 했어.

그리고 모연은 그의 사과를 상냥하게 받아주었지.


그의 사과에 모연은 알게 모르게 남았던 앙금과 상처가 다 날아가 버린 것 같아.

되찾은 평온한 일상에서 나누는 시진과의 이야기는 간밤의 그 일들에 놀란 모연의 가슴을 가라앉히고 평화를 되찾게 하기에 충분했어.

두 사람은 다시 찾은 평화에 마주 웃었어.


당신의 평안만은 부디 지켜지기를…….






이어지는 글 : 숨기는 것이 많으면 한계는 빠르게 찾아오는 법이다

수정 전 : 언제, 어느 때이건 당신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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