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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리뷰 : 나를 설득해 주세요

이응(119.204) 2020.02.17 19:05:50
조회 457 추천 0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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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설득해 주세요




모연은 조금 전 죽을 위기를 넘겼어.

차와 함께 떨어져 추락사로 생을 마감하려던 위기의 상황에 기적처럼 시진이 나타나 그녀를 구해준 거야.

모연은 꼭 구해주겠다며 자신을 믿으라던 남자의 말을 그 순간에는 차마 믿어줄 수가 없었어.

너무 무서웠거든.


하지만 시진은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정말로 그녀를 구했어.

제대로 된 트라우마가 생기기도 전에 순식간에 상황은 끝났고, 덕분에 그녀는 지금 그때의 공포보다도 그 전에 철물점에서 들었던 총소리를 되새기게 되었어.


발렌타인의 가게를 나와 서서는 이상한 표정으로 모연의 어깨 너머를 건너다보던 유시진.

그 시선을 따라 돌아보려던 그녀를 급하게 잡아채던 그의 손길…….


의아하게 보는 그녀에게 시진은 곧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보였지만 그녀는 그 미소에서 위화감을 느꼈어.

먼저 돌아가라는 말에 무슨 일 있느냐,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냐, 연거푸 물었지만 그는 짤막한 대답만을 주었지.

본진에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는 꽤나 그럴듯한 말을 했었어.

그땐 그 말을 믿었어. 안 믿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모연은 그의 권유대로 예전에 시진과 갔었던 예화의 철물점에 차를 빌리러 갔던 거야.


그녀를 보내고 시진이 또 얼마나 무섭고 냉막한 얼굴의 ‘빅보스’로 돌아가 일을 할 줄도 모르고…….




시진이 모연을 보내고 돌아서서 한 일은 민간인인 그녀에게 알리도록 허락되지 않은 군의 일이었어.

다운타운 한복판에서 백주대낮에 범법자가 돌아다니고 있는 걸로도 모자라 그 놈은 그가 직접 잡아넣은, 잡아넣은지 며칠도 채 되지 않은 놈이었지.

대대장이 경고했던 현지 경찰과 무기밀매상의 커넥션이 생각보다 너무 추악했던 거야.


놈은 자신을 적발했던 시진의 앞에서도 전혀 거리낌 없이 의기양양했어.

또 잡아 넣어봐라 시위라도 하듯이.


하지만 시진은 혼자가 아니었어.

아무것도 모르고, 알 필요도 없고, 알아서 좋을 것도 하나 없는,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되는 모연이 그와 함께 있었으니까.


시진에게 있어서 모연은 그에게 비호의적인 무리의 눈에 띄어선 절대 안 되는 사람이야.

그래서 그는 모연에게 차를 빌려 '곧장' 부대로 가라고 말했어.

저런 놈들이 판을 치는 이 다운타운을 모연 혼자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모연이 저들에게 얼굴조차 보일 일이 없도록 시진은 내내 그녀의 뒤를 지켜보고 서있었어.

감 좋은 그녀가 모퉁이를 돌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보였어.

저들에게 모연을 숨기고, 모연에게 그가 할 일을 숨기기 위해서.


그렇게 가장 적당한 거짓말로 그녀를 보내고 시진은 곧바로 돌아서서 총을 꺼내들고 꽉 찬 탄창을 확인한 후 목표를 겨냥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어.


“/우리 구면인 거 같은데?/”
“/근데 안 놀라네? 평화유지가 목적인 파병군인이 비무장한 민간인을 총 들고 위협도 하고./”


놈은 겁먹은 흉내를 내며 이죽거렸어.

너 그거 쏠 수나 있느냐는 듯 총 든 시진의 손을 조롱하는 그들의 만용에 시진은 이건 장난으로 들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로 했어.


탕!!


“/민간인 아니고, 비무장 아니고. 경찰과 커넥션은 그렇다 치고, 일부러 내 눈에 띈 이유가 뭐야./”


비무장한 민간인은 무슨.

시진의 망설임 없는 격발에 놀란 그들은 단박에 총을 뽑았어.

총소리에 놀란 패거리들이 몰려나오고 이내 시진의 앞에 나타난 무리의 우두머리, 다니엘 아구스.


그는 시진이 익히 아는 사람이었어.

아니, 아는 사람 수준이 아니라 깊은 호의를 갖고 있던 그의 전우이자,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군인이었지.

이제는 더이상 군인이 아닌 것 같긴 했지만.


“/어떻게 된 겁니까. 당신 콜사인은 아직도 델타 포스의 전설입니다./”
“/전설은 돈이 안 돼서 말이야./”


돈…….


시진은 총을 든 채로 멍하니 굳어버렸어.


생명을 구하겠다고 군인을 하던 아구스는 이젠 돈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가 되어 있었어.

예전의 그 명예 따윈 다 내팽개친, 뒷골목 구린 돈 냄새를 풀풀 풍기는 악당 말이야.

시진이 총알이 빗발치는 데를 뚫어가며 목숨을 걸고 구했던 전우는 그렇게 살아남아 내내 악행을 일삼아 왔던 거야.


총알이 비처럼 쏟아지던 그날의 노르망디…….

그곳에서 꽃 같은 나이에 스러진 전우가 떠올랐어.

지금 이 순간 그의 앞에 서있는 남자의 목숨을 구하고 북망산으로 간 선배, 그 선배의 목숨 값까지 지고 살던 남자는 그 값을 이런 더러운 곳에 쓰고 있었던 거야.


시진은 끔찍한 후회와 분노를 느끼며 눈앞의 남자를 노려보았어.

한때는 그의 우상이었으며 전우였던 남자를.


“내가 쓸데없이 신의 뜻을 거슬렀네. 죽어가던 놈은 죽어가던 이유가 분명 있었을 텐데.”
“/모국어 뒤로 숨는 거야?/”
“/나도 부탁인데, 꺼져. 앞으로 절대 내 눈에 띄지 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누군가의 목숨 값을 받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시진은 지난날을 처음으로 후회해.

저런 추악한 괴물을 구하겠다고 시간을 지체했던 그날의 자신의 결정을…….


시진이 충격과 분노에 떨던 그 시각, 모연은 또 다른 충격을 견뎌 내고 있었어.


* * *


총소리에 놀라 돌아보긴 했었지만 모연은 그게 시진과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진 않았어.

본진에 일이 있다던 사람이니 금세 여길 빠져나갔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다만 치안이 안 좋은 나라가 맞긴 하구나, 다친 사람은 없을까 걱정은 했었지.


의사가 필요한 상황은 아니라는 다니엘의 말에 모연은 일단 그 문제를 신경 쓰지 않았어.

총에 맞아 사람이 다친 게 아니라면 의사인 그녀와는 무관한 일이었으니까.

모연에게 그땐 그 문제보다 예화 대신 나타난, 시진과 잘 아는 사이인 게 분명한 눈앞의 사람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더 중요했어.


“근데 유대위님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신지…….”
“글쎄요……. 뭐랄까, 추도식의 멤버라고 해야 하나요?”
“?”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또 여기 우르크에서도, 저흰 주로 추도식에서 봅니다.”


다니엘의 답은 모연에게 지난번 결국 답을 얻지 못했던 질문을 상기시켰어. 시진에게서는 더 이상 들을 수도, 물을 수도 없게 된 그 질문을.


“이런 질문이 좀 조심스럽긴 한데,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겠다 싶어서요. 혹시 유시진 대위님이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아세요?”


그래. 지금이 아니면 답을 들을 수가 없어.

지금 시진이 없는 때에 대면 중인, 그의 ‘추도식 멤버’에게가 아니면 그녀는 물어볼 데가 없는 거야.


고인이 된 시진의 전우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했던 일.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시진이 한다는 ‘그’ 일이 두루뭉술하게 말고, 정확하게는 무슨 일인지를 모연은 알아야 해.


이제는 다니엘이 아니면 그녀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가 없어.

시진은 이미 답하기를 거부했고 그렇기에 그의 가장 가까운 부사관들에게도 물을 수가 없어.

모연에겐 무엇보다 중요한 대답인데 시진에게도 그의 측근에게도 물을 수 없으니 누구에게라도 그녀는 답을 얻어야만 해.

그 답 없이는 내릴 수 있는 결정도, 낼 수 있는 용기도 없으니까.


그녀가 바랐던 것은, 다니엘과의 대화로 얻고자 했던 것은 사실 그 답 자체라기보다 용기였어.

시진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 답에서 용기를 얻고 싶었던 거야.


다니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시진과 함께 하게 될 수 있기를, 그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했어.

하지만 결과는 끔찍했지.


다니엘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모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어.


시진의 일은 총알이 빗발치는 데를 뚫고 전우를 구하러 가는 정도가 아니었던 거야.

총을 쏘고, 총을 맞는 게 다가 아니라, 일을 하다 피랍을 당하고 그곳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하다가 최후를 맞을 수도 있는, 시진은 그런 일을 하고 있었어.

그런 일이어서 답을 주고 싶지 않아 했던 거야.

정말 그에게 너무도 많이 불리해질 테니까.


“더 궁금한 거 있어요?”
“아뇨……. 충분합니다.”


단두대를 향해 가는 삶.


추도식의 멤버들끼리 서로의 고된 삶을 칭하는 이름이었어.

위험지역을 다니는 의사들과 군인들은 서로의 인생을 그렇게 불렀어.

왕관이 아닌 단두대를 향해 가는 삶이라고…….


다니엘은 마치 자신이 시진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려워져.

앞에 서있는, 시진의 특별한 사람일 것이 분명한 여자가 자신의 대답으로 인해 결국엔 그를 떠나는 결론을 내릴까 불안하고, 그녀를 붙잡을 수 없을 시진의 처지가 안쓰러워서…….


“뭐에 충분하죠? 이해하는데? 아님 멀리하는데?”


모연은 다니엘에게 아무 답도 할 수가 없었어.


그녀의 마음에 떠오른 답은 뭐였을까?


그순간 그건 ‘멀리하는데’였어.

그 뒤에는 다시금 복잡해졌겠지만 적어도 이때까지 만큼은 모연은 분명 시진과 거리를 둘 생각이었어.

다니엘의 말은 시진과 함께 하는 시간동안 또 반쯤 잠든 그녀의 현실감각에 사이렌을 울렸으니까.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 사는 사람을 정말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나에게 그럴 만한 용기가 있나.
내가 지금 미친 짓을 하려고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지금 내 무덤을 파고 있지 않나.
이 어리석은 짓은 그만해야 옳을 것 같은데…….


바랐던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어.

그녀를 뒤흔드는 남자의 손을 잡는 건, 그리고 그와 삶을 함께하는 것은 결국 그녀의 바람에 지나지 않았던 거야.

현실이 될 수 없어.


하지만 시진은 그와 함께 있지 않은 시간동안 점점 더 현실적이 되어가는 모연을 또 한 번 흩뜨려 놓았어.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운전을 하다가 트럭을 피해 그대로 절벽을 향해 돌진해버린 모연에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온 거야.


“어디에요 거기. 지금 뭐 보여요. 보이는 거 아무 거나 말해 봐요.”
“차가, 차가 절벽에 걸려 있어요……!”
“내 목소리 들려요?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갈게요. 내가 찾을게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유시진씨! 끊지 마요……!”



시진은 아구스와의 불쾌한 재회를 끝내고 곧바로 모연을 데리러 다니엘의 가게로 갔어.

하지만 그녀는 이미 떠나고 없었지.

그래서 바로 전화를 걸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그의 심장을 말라 붙게 하는 모연의 우는 소리를 듣게 된 거야.

통화권 이탈로 그대로 끊겨 버린 전화에 시진은 무작정 막사 방향으로 도로를 되짚어 갔어.


그 시간동안 시진은 피가 마른다는 말을 쓸 때가 바로 이런 때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어.

모연을 구할 시도도 해보기 전에 그녀가 탄 차가 버티지 못하고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릴까봐 시진의 가슴이 공포로 거세게 요동쳤어.


시진은 그녀를 혼자 보낸 자신의 결정이 미치게 후회스러웠어.

변절자 나부랭이와의 고작 몇 분의 대화를 위해 모연을 위험 속에 혼자 둔 꼴이 된 이 상황이 분통터졌어.


다행히도 다니엘의 지프는 시진이 도착할 때까지 여전히 절벽에 매달려 있었어.

시진은 당장이라도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칠 것 같은 차에 망설임 없이 올라탔어.

구조의 가능, 불가능을 따지기보다 먼저 그 상황 속으로 뛰어들었지. 망설일 시간이 없었어.

정말 당장이라도 미끄러져서 까마득한 절벽 아래 암초로 가득한 바다로 그녀가 추락할 것 같았으니까.




다행히도 시진은 모연을 구해냈고, 온몸이 젖은 두 사람은 한 차를 타고 막사로 돌아왔어.

시진의 신속한 대처에 모연도 정신적 충격을 크게 받지 않았지.

오히려 모연의 뇌리에 깊게 남은 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죽음의 위험으로 뛰어든 시진과 다니엘의 가게에서 들었던 총소리였어.


헤어질 때 어딘가 석연치 않던 시진의 표정, 철물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린 총소리, 본진에서 왔다고 하기엔 절벽에 너무 빨리 나타났던 시진.

그 모든 것이 가리키는 건 명확했어.


-본진에 갑자기 볼일이 생겨서요.
-혼나러 가는 건 맞는데 보고서 때문에 갑니다.


그땐 그 대답을 그냥 믿었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었던 거지.

시진은 그녀에게 또 한 번의 거짓말을 한 거야.

탓할 수도, 탓하지도 못하겠는 그런 기묘한 거짓말을…….


그때 모연의 상념을 뚫고 시진이 나타났어.


“다방커피 밖에 없는데 괜찮아요?”


시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그저 평화롭게 커피 두 잔을 든 채로 모연에게 다가왔어.

그 총소리의 주인이라고 하기에도,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라 하기에도 너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신경안정제 같은 거 필요하면 얘기해요. 처방해 줄게요.”
“?”
“유대위님도 놀랐을 거 아니에요. 나야 정신없이 당했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서 추락 사고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야. 물론 시진의 빠른 대처 덕에 둘 다 아무데도 안 다쳤고, 덕분에 생각보다 정신적인 충격을 받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후유증이 남지 않으리란 법이 없는 큰 사건이지.

목숨이 오가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보통 사람에겐 흔한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시진은 그저 그녀의 걱정만 흐뭇해할 뿐이야.


“지금 나 신경 써주는 겁니까?”
“써야죠. 생명의 은인인데.”
“목숨 정돈 구해줘야 신경 쓰네 이 여잔.”


시진이 추락 사고에서 받은 충격은 그 사고 자체의 위험성 때문이 아니라 그 사고 때문에 위험했던 목숨이 모연이었다는 거야.

분명 자신의 목숨 또한 걸었지만 그보다 모연을 살릴 수 없게 될까봐 시진은 그것에 더 공포를 느꼈어.

그래서 이후에 그는 모연에게 무전기를 들려주었던 거야.

열 번에 네 번은 터지지 않는 휴대폰만으로는 그의 마음이 너무 불안했기 때문에.


“근데 아까, 아까 나 구하려고 본인 목숨을 건 건 알아요?”
“……살려달라면서요.”


유시진은 이런 사람이야.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걸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

그래서 그냥 살려달라기에 살려줬다는 말로 그 상황을 넘기고 싶어 하는 사람.

생명을 구하기 위해 했던 일을 농담처럼 말하는 사람…….


“나 처음 만났을 때 그랬죠. 총알이 빗발치는 데를 뚫고 동료를 구하러 갔다고.”
“…….”
“그 라이언 일병 구하러 갔었단 얘기, 농담 아니었죠.”
“…….”


시진은 아무런 말이 없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지.

농담이었다고 말하기엔 그건 분명 거짓말이고 그렇다고 맞다고 하면 그는 또 불리해질 테니까.


“그래서 라이언 일병은 구했어요?”


시진은 순간 오래 전 과거 속의 그 때와 오늘 낮의 일을 회상했어.

과거 그가 구했던 명예로운 군인과 오늘 그 악인이 동일인물이라는 게 시진에게는 고통이야. 누구보다 바르게, 잘 살아주길 바랐던 사람인데 그 사람은 가장 추악해져선 그를 슬프게 만들었어.


“구했는데, 안 구했으면 어땠을까 오늘 처음 후회했죠.”


후회하고 싶지 않았어.

이제까지 단 한순간도 그 선택을 후회할 거라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어.

그 선택으로 존경하던 선배를 잃었고 그때의 일을 끔찍한 악몽으로 꿀망정 그래도 목숨 하나는 살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지나고 보니 허사였던 거야.

그날 흘린 피가, 돌아간 선배가, 그 모든 것이 시진은 지독하게 아파.


모연은 왜인지 마음이 아파왔어.

마주 앉은 시진의 표정에 묻은 후회와 허탈, 슬픔이 그녀의 눈에도 보였어.

이제껏 후회 따위 해본 적 없던 그의 과거 속 어떤 일이 두 사람이 잠시 떨어져 있던 그 시간에 갑자기 그를 찾아와 그에게 아주 큰 상처를 낸 것 같았어.


“아까 나 먼저 보냈을 때 나한테 거짓말했죠.”
“…….”
“생각해보니까 본진에 갔다던 사람이 날 구하러 너무 빨리 나타난 거죠. 본진에 일 있다는 거 거짓말이었죠. 철물점에서 내가 들었던 총소리, 그거 유시진씨죠.”
“……더 복잡해졌겠네요, 마음이.”
“…….”


자신의 거짓말을 간파해낸 모연에게 시진은 할 말이 없어.

변명할 만한 거짓말도 아니었고 거짓말해서 미안하다 사과하기에는 모연도 그를 탓하고자 한 말이 아니었으니까.


두 사람은 슬프고 답답해.

누군가는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을 해야만 하고 상대방은 그걸 원망조차 못하고 들어야만 한다는 게, 서로에게 솔직해질 수 없는 처지가…….


“그냥 나한테 맡겨 볼 생각은 없어요?”
“미치겠네, 정말……. 유시진씨가 이러니까 난 자꾸 더 복잡해지죠.”


시진이 쏘아낸 총소리나 그가 하는 거짓말에 모연의 마음이 복잡해진 게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라서 자꾸만 복잡해지는 거야.


이런 사람은 멀리해야 한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면서도 멀어질 수가 없어서 미치겠는 거고, 멀어지려 할 때마다 시진의 말과 행동이 자꾸 그녀를 끌어당겨서 복잡한 거지.

현실과 마음이 반대방향으로만 뻗어서 그녀를 힘들게 하는 거야.


오늘도 다니엘의 이야기를 듣고서 모연은 시진을 멀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그런데 시진은 목숨을 걸고 그녀를 구하러 왔지.

그렇게 그에게서 멀어지려할 때마다 시진은 자꾸 그를 외면하지 못하게 만들어.

그래서 자꾸 더 복잡해지는 거야.


잡을 수 없어서 슬픈 남자와 차마 더 가까워질 수가 없어서 미안한 여자가 맞추는 시선 사이로 그 순간 갑자기 어둠이 내렸어.

둘 사이를 번번이 훼방 놓던 신이 변덕이라도 부리시는지 시기적절하게 불이 나간 거야.


“정전이에요. 전기 공급이 안 좋아서. 30초 정도 있으면 다시 들어와요.”
“아…….”


두 사람은 정전이라는 핑계로 방금 전까지 나누던, 어느 누구에게도 반갑지 않던 대화를 멈출 수가 있었어.

두 사람은 이 정전이 내심 반가워.

덕분에 끝까지 갈 뻔한 대화를 도중에 그만둘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윽고 어둠 속에서 마주한 눈동자.

둘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어.

마음으로는 이제까지 줄곧 계속 이러고 싶었었거든.

아무 말도 없이 바라만 보는데도 좋은 사람인데 평소에는 두 사람 다 그럴 수가 없지.

아직은 시진이 하는 일이 두 사람 사이에 불리하기만 하니까.

그래서 이 30초의 시간은 두 사람 모두에게 어떤 시간보다도 간절해.


“안 보인다고 이상한 짓 하면 소리 지를 거예요.”


시진은 마치 제가 당하는 양 이야기했지만 속뜻은 모연에게 하는 말이었어.


내가 이 어둠을 틈타서 당신한테 이상한 짓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럼 소리 질러요.
내가 또 저번처럼 용기 낼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모연은 그저 웃기만 했어.

그의 농담은 어떨 때는 서운하고 실망스럽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순간을 기쁘게 해.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모연도 어둠을 틈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또 한 번 그녀를 구해준 은인에겐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마땅하잖아.

고마운 건 그냥 고마운 거니까.


“오늘 나 구해줘서 고마워요.”
“그래도 이상한 짓은 안 돼요.”
“알겠어요. 단념할게요.”


정전이 된 어둑어둑한 주방.

불이라곤 타닥타닥 타는 붉은 모닥불뿐인 곳에서 두 사람은 그저 서로만 보고 있었어.

30초 남짓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현실은 잊고 서로만 바라볼 기회를 얻은 것처럼 둘은 그렇게 내도록 눈을 맞추고 있었어.


서로의 눈동자에서 영원을 보기라도 하는 듯, 방금 전까지 오가던 슬픈 눈빛이 아니라 다른 감정 다 버리고 어둠을 틈타 저 사람을 눈에 박아 가려는 것처럼 애타게 바라보았어.

밝은 불 아래에선 이렇게 오래도록 바라보면 안 되는 사람이니까…….


아직 허락받지도 허락하지도 않은 사이라서 밝은 곳에선 서로를 이렇게 오래도록 볼 수가 없어서 어둡다는 핑계로 보고 싶은 만큼 보는 거야.

서로가 상대방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아무 말도 않고 그저 보고만 있지.


하지만 30초라는 시간은 어찌나 짧은지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고, 너무나 야속하게도 결국 전등불빛이 들어왔어.

그 사이로 너무도 솔직하게 마주보고 있던 눈빛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지.

시진을 행복하게 하고, 모연도 딱히 숨기고 싶어 하지 않는 눈빛이 말이야.


“계속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어요?”
“그런 눈이 어떤 눈인데요?”
“눈을 못 떼겠는 눈?”


정전이 되기 전 나누던 그 대화는 둘 다 이어가지 않아.

이어가고 싶은 대화가 아니니까.

아직 두 사람에겐 시간이 필요해.

시진이 거절당하고 싶지 않아 하는 건 당연하지만 모연도 그를 거절하고 싶지가 않거든.


다니엘의 이야기는 모연의 생각보다 더 무섭고 각오보다 훨씬 끔찍했지만 그녀는 아직 시진에게서 떠나고 싶지가 않아.

조금이라도 더 그의 옆에 있고 싶어.

그래도 결국에 떠나야 한다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루고 싶어.


다만 며칠이라도, 몇 분이라도, 아주 조금만이라도 더 오래…….


그러다 떠나지 못해서 주저앉게 된대도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아니 어쩌면 행복할 수 있을지도.
그곳이 어디든, 그때가 언제든, 당신이 함께 있다면 어쩌면…….
정말 어쩌면 행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시진이 꼭 자신을 설득해주기를, 그래서 그에게 그냥 맡겨볼 수 있게 되기를 모연의 솔직한 마음은 아주 많이 바라고 있어.



나를 설득해줘요.
당신의 미소로, 목소리로, 따뜻한 손으로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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