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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리뷰 : 그대 내게 다시 돌아와요

이응(119.204) 2020.02.24 23:2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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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내게 다시 돌아와요




현재 상황 사망자 18, 부상자 41, 그리고 실종자 3.


세 명의 실종자 중 한 명의 생존신호가 잡혔어.

그를 구하기 위해 건물 아래로 들어가는 시진에게 모연은 함께 내려가자고 했지.

그런데 시진은 새로운 희생자를 내지 않기 위해서라며 그녀에게 함께 내려갈 수 없다고 해.


모연은 그걸 받아들이고 혼자 내려갈 그에게 줄 약상자를 준비하는데, 약병에 인쇄된 영어 아래에 그녀가 손글씨로 쓰는 한글, ‘엔세이드’.


그걸 보고 시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내가 영어를 못 읽을까봐 그러는 거냐고 억울하다고 항변하지만 모연은 아랑곳없이 심각하고 진지했어.


그녀가 시진의 웃음기 섞인 불평을 받아주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그를 놀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그녀는 시진이 농담으로 희석시키고자 한 현실적인 위험을 차마 허투루 넘길 수가 없었던 거야.


-구조현장에서 첫 번째 수칙은 새로운 희생자를 내지 않는 겁니다.


안전 공간이 확보되지 않았다며 새로운 희생자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을 해버린 뒤의 시진의 농담은 위험한 상황을 감추기엔 너무 부족했어.

최소한의 안전도 확보되지 않은 그 현장으로 들어갈 당사자의 덤덤함은 지켜보는 사람을 도리어 불안하게 할 뿐이었지.


모연은 제 자신도 걱정할 줄 모르는 저 멍청한 남자의 얼굴을 다시 보기 위해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벨트를 그에게 매주기로 해.


약병 하나하나 적어 넣은 메시지는 모연이 준비한 ‘만약’이야.

모연은 시진이 들고 갈 모든 약병마다 또박또박 적는 그녀의 글씨로 그를 위한 만약을 준비했어.


약병의 글자는 시진더러 읽으라고 적은 게 아니야.

분명 그를 위해서, 그의 ‘생환’을 위해서 적은 것이지만 정작 그 메시지의 수신자는 유시진이 아니지.

그는 그저 전달자일 뿐, 모연이 쓴 그 글자를 읽을 사람은 지금으로선 누가될지 알 수 없어.


시진이 약병의 원문을 읽고 쓰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모연은 잘 알고 있어.

그 원문이 영어가 아니라 러시아어라도, 심지어 우르크 현지어라 해도 시진은 그녀의 지시에 따라 응급처치를 충분히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야.


하지만 만약 시진이 다치게 된다면?

그럼 누가 그를 치료해주지?


부상당한 그의 옆에 영어로 된 의료용어를 알아볼 수 없거나 응급처치를 할 줄 모르는 누군가밖에 없다면?

모연을 비롯한 의사들은 모두 건물 밖에 대기 중이고, 그의 옆엔 병사들 중 한명 또는 최악의 상황에는 생존자뿐이겠지.

군인들이 얼마나 의료용어를 알아볼 수 있는지 모연에겐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녀는 그래서 한글로 적어둔거야.

그들에게 적합한 지시를 주기 위해서.


약병의 모든 영어 밑에 그녀의 메시지를 적은거지.


유시진을 살려달라고. 그를 구해달라고.


확실히 해두는 게 좋으니까.


끝까지 그녀에게 농담을 늘어놓던 시진이 휘적휘적 걸어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모연의 눈에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해.


모연은 바라지.

저 약병의 메시지가 부디 소용없기를, 아무 일 없이 돌아온 시진이 되게 영어로 말하는 걸 꼭 듣게 되기를 모연은 바라고 또 바랐어.


* * *


“다녀와서 내가 되게 영어로 얘기할 테니까 좀 이따 봅시다.”


묵묵부답 그를 무연히 바라보기만 하는 모연을 미소로 일별하고 시진은 무너진 건물 아래로 들어왔어.

그녀가 자신을 무척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그래서 부러 더 너스레를 떨었던 거야.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아닌 척, 이정도 일은 별거 아니라고 그렇게 그녀를 안심시켜주고 싶었어.

방금 전에 그의 입으로 안전 공간 확보가 안됐다는 말을 그녀에게 했으면서도, 그런 소용없는 농담으로라도 그녀를 달래고 싶었으니까.


‘다녀와서’ 모연을 다시 보고 거보라고, 별거 아니었다고, 나 하나도 안 다쳤다고 보여주고 싶었어.

‘좀 이따’ 꼭 그러고 싶었어.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함께 있던 대영을 유압기를 가져오라고 내보내고 그 혼자 생존자 옆에 남은지 얼마 되지 않아 별안간 건물 전체, 아니 땅 전체가 우르릉 소리를 내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떨리더니 건물 잔해가 쏟아지기 시작했어.

작은 돌조각 몇 개가 굴러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공간 전체가 우그러져 내렸어.


“고개 숙여!!”


시진은 생존자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낙석덩이를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생존자를 감싸 덮고 엎드렸어.

그저 본능적인 행동이었어.

그가 구해야 하는 요구조자를 보호하기 위한 결정을 시진은 숨 한 번 내쉴 시간도 안 될 찰나의 순간에 내려야 했으니까.

그게 그 순간에 시진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


시진의 최선은 언제나 자신의 안전은 배제한 채로 이루어지기 일쑤야.

그건 오늘도 다르지 않았어.


그리고 그 최선은 한 사람에겐 너무 잔인한 결정이었어.


모연은 시진을 들여보내고 상황실 텐트에서 그의 무전을 기다렸어.

곧이어 시진의 무전이 들어왔고, 그는 모연의 지시에 따라 생존자를 처치했지.

그렇게 일각에서 보기엔 순조로운 구조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어.

그러나 실상은 전혀 순조롭지도 원활하지도 않았어.


필요한 장비를 챙기러 대영이 상황실로 들어왔고, 모연은 대영에게 들려 보낼 약을 찾으며 명주와 대영이 하는 말을 들었지.

안쪽 상황을 묻는 명주에게 대영은 말했어.


“언제 무너져도 안 이상합니다.”


시진은 그 곳에서 잠시만이라도 대영을 내보내주고 싶었던 거야.


당장 그날 아침나절에 여진이 있었고 건물 곳곳은 더 불안정해진 상태였어.

이전보다 훨씬 위험해진 현장에 시진은 그의 전우를 남겨두고 올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는 힘든 일은 서상사님이 하라는 농담으로 그렇게 대영을 내보내고 생존자와 단둘이 그 ‘언제 무너져도 안 이상한’ 곳에 남기로 했지.

그는 언제나 작전지역에서 제일 위험한 일은 자기가 하려고 하니까.


대영의 그 불안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리더니 땅이 흔들거리기 시작했어.

사색이 된 사람들이 그 진동의 원인을 찾는 동안 모연의 얼굴은 점점 납처럼 굳어가.


기범이 부는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여기저기서 들리는 낙석 소리,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울리는 사이, 모연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 되어갔어.


“선배, 괜찮습니까? 선배!”


모연은 명주가 시진에게 치는 무전 소리를 그저 애타게 듣고 있을 수밖에 없어.


제발 받으라고, 무전 하라고.
제발, 제발, 제발……!


“응답바랍니다! 선배님! 선배님!”
+…….+
“……무전 끊겼어요.”


모연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어.

시진은 응답하지 않아.

흔들리던 등불이 훅, 꺼졌어.


무전기 저편 침묵의 의미가 무엇일지 모연은 생각하기조차 무서워.


왜 당신은 침묵하고 있는 거지.
저 무전기 너머 당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상황실의 고요한 무전기는 모연의 마음을 무저갱으로 밀어 넣었어.


* * *


시진은 그의 몸을 강타한 충격에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졌어.

하지만 곧 의식을 되찾았고 다행히 몸을 움직일 수도 있었지.

그의 순간적 판단은 생존자를 구했고, 천만다행으로 그도 산거야.

비록 생존자에게 떨어지는 낙석을 받아내느라 팔이 찢기고 등을 다치긴 했어도 그래도 다행히 구사일생으로 그는 목숨을 구했어.


붕괴의 원인은 여진도, 불안정한 건물 상태도 아니었어.

붕괴된 건물 안 어딘가에 있을 다이아몬드를 찾겠다고 포크레인질을 해댄 어떤 개새끼 때문이었지.


만약 알파팀들이 진영수를 빨리 처리하지 않았다면 두 목숨은 방금 전 그 붕괴로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야.

시진은 이 순간 또 한 번의 죽음이 그를 비켜갔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두려워해선 안 되는 사람이지.


“아저씨 괜찮아요? 아저씨. 죽은 거 아니죠! 일어나 봐요!”
“……나 아저씨 아닌데.”
“어! 괜찮아요? 아, 아저씨 죽은 줄 알았잖아요!”
“나 아저씨 아니라니까.”


시진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안도의 한숨도 내쉴 겨를도 없이 주변을 살피고 생존자를 안심시킬 농담을 해.


위기가 지나간 순간 시진은 그걸 충격으로 남기지 않고 삼켜버려.

그걸 넘기지 않고 계속 붙잡고 있기엔 그가 지나쳐온 죽음의 순간들이 밤하늘의 별만큼 많거든.


그 순간들마다 시진이 매번 충격에 몸부림치고 두려워했다면 그는 이미 군인의 길을 포기했을 거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겠지.


시진은 그가 군 생활을 하며 줄곧 그래온 대로 아무렇지 않게 목숨을 위협받기 전까지 하던 일을 계속 이어가.

그가 구해야할 요구조자를 돌보는 일을.


“다친 덴 없어?”
“지금 내 걱정할 때가 아니에요. 아저씨 팔뚝에 피나요, 지금!”
“그러네……. 넌 발은 빠졌네?”


낙석을 받아낸 등이 아파서 인상을 벅벅 쓰고 신음을 삼키면서도 시진이 의식을 찾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생존자를 살피는 일이야.


시진은 그런 삶을 살아왔어.

위기의 순간에도 그 위기가 지나간 다음에도, 자신을 돌보기보다 그의 해야 할 임무를 가장 우선하도록 훈련받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해왔어.

그건 시진에게 너무 당연했고, 그래서 일상적으로 해왔던 일이야.


시진의 일상은 그렇게도 우직하고 슬프지.

그 자신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많이도 슬프게 해.


이번엔 살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몰라

. 상황이 너무 안 좋아.

또 한 번 무너져 내린 지하3층은 간신히 뚫어놓은 입구도 도로 막혀버리고 모든 구조가 뒤틀려 버렸어.

여진이라도 오게 되면 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그대로 깔려 죽게 될 거야.


설상가상 무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작동하질 않았어.

이로써 상황실에 그와 생존자의 무사함조차 알릴 수가 없게 된 거야.

어느 누구도 그들이 살아있음을 모르게 되어버렸어.


그러나 시진이 걱정하는 것은 여전히 그 자신이 아니었지.


“살아 나간다니까. 너 인마 여친 기다릴 거 아냐.”
“여친 없거든요. 아저씬 있어요?”
“너 아까 무전으로 그 여의사 목소리 들었지. 내가 그 여자 되게 좋아하거든. 근데 한 세 번 차였어. 죽어도 싼가?”


시진은 비록 자기 자신은 걱정하지 않지만 저 위, 햇빛 아래에서 그를 기다리고 또 걱정하고 있을 사람 한 명은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

큰 위기가 지나갔는데 그의 무전기는 먹통이야.

무전을 받지 않는 그를 지금 땅 위에선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또는 응답할 수 없을 정도로 죽음과 가까워져 있다고…….


“근데 그 여자 지금 밖에서 엄청 쫄았을 거야. 나 죽은 줄 알고. 이럴 줄 알았으면 고백 받아줄 걸 그랬나, 그런 생각도 하면서.”


모연에게 다녀오겠다고, 좀 이따 보자고 얘기하고 들어왔는데 시진은 이제 그 말을 지킬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그는 또 후회를 해.


이럴 줄 알았으면 좋아한다고 한 번이라도 더 말해주고 올 걸.
네 번 차이고 다섯 번 차이더라도 더 많이 말해줄 걸…….


“그래서 쌤통이에요?”
“아니. 걱정돼.”


막혀 버린 입구. 닿지 않는 무전. 언제 또 흔들릴지 모르는 지반.

또 한 번 흔들리면 이번엔 정말 다 무너져 내릴게 분명한 이 아슬아슬한 공간.


그 어둠 안에서 시진은 곧 닥칠지도 모르는 그의 죽음보다도 그 죽음 뒤에 남겨질 사람을 더 걱정하고 있어.

그가 사랑하는 여자와 그가 구해야 하는 생존자를.



그 시각, 건물 밖 밝은 곳에서는 응답하지 않는 시진을 모두들 애태우며 걱정하고 있어.


“여기는 상황실. 빅보스 응답하라. 선배! 대답 좀 해요, 쫌! 미치겠네, 진짜.”


그저 묵묵부답 조용한 무전 너머로 지치지도 않고 무전을 보내는 명주와 그걸 조마조마한 눈으로 지켜보는 중대원들도 모두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그런데 정작 모연은 텐트 안을 서성거리는 명주 옆에서 아무 말이 없지.

넋을 놓고 앉아 있지도, 울음을 터뜨리지도 않아.

그저 묵묵히 운동화 끈을 풀어 다시금 꼭 잡아 동여맬 뿐이야.


시진이 그녀의 신발끈을 묶어 주었던 것처럼 풀어지지 않게 단단히.


“……괜찮을 겁니다. 곧 연락 될 겁니다.”


아까 그토록 불안에 떨던 모습은 어디가고 내내 조용한 모연의 모습이 명주에겐 도리어 불안하고 걱정스러워.


명주도 지금 모연의 속이 어떨지 모르지 않아.

그녀 또한 이 현장에서 대영과 무전이 닿지 않던 그 수분을 겪어보았으니까.

그때 그녀도 자신이 집도 중이던 수술 환자에게 집중하려고 무던히 노력했었어.

등 뒤에 누워 있는 기범의 무전에 온통 귀가 쏠려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메스를 잡은 손을 떨지 않기 위해 겉으로는 멀쩡한 척 머릿속에서만 미친 듯이 질렀던 그 끔찍한 비명을 모연도 그렇게 참아 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그녀는 모연이 너무 안쓰러웠어.


“근데 뭐 합니까? 아까부터?”
“언제든 바로 달려갈 준비. 넘어지면 안 되니까.”


모연이 울지 않는 이유는 하나야.

울다 지치면 안돼.

언제든 그에게서 무전이 들어오면 조금이라도 빨리, 1초라도 더 빨리 그곳으로 달려가야 해.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에게 닿아야 그를 살릴 수 있을 테니까.


모연은 그가 그녀의 옆으로 돌아온 날 새벽, 그가 한 말을 뼈아프게 되새겼어.


-안 다쳤으면 했는데…….
“대위님도요.”


시진이 했던 그 말을 모연은 지금 그에게 그대로 해주고 싶어.


제발 다치지도 말고, 죽지도 말고 다시 돌아오라고.
돌아온 당신에게 나도 해주어야 할 말이 있을 것 같으니까
제발 돌아오라고…….


그러나 모연이 눈물 고인 눈동자로 하염없이 바라고 또 바라고 있는 살아있는 시진은 지금, 그녀에겐 몹시도 서글프게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어.


“너 팔 줘봐. 너 이름 뭐야.”
“강민재요.”
“강민재.”
“근데 지금 뭐하는 거예요?”
“약이야. 너만 나가게 될 만약?”


시진은 그에게 발생할 아주 만약의 사고를 대비해 놓아야 해.

절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이 불안한 상황에 시진은 항상 해온 대로 자신의 사후(死後) 방책을 마련해놓을 의무가 있어.


혹시나 이후 또 다른 사고로 그가 죽고 난 후에 생존자가 천만다행으로 구조되거나, 혹은 생존자도 죽을지도 모르므로 생존자의 신원과 심신 상태를 정확하게 밝혀두어야 하는 거야.


생존자의 상태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자신이 함구무언의 싸늘한 시체가 되더라도, 이후 상황은 조금 더 쉽게 해결될 수 있도록 해두어야 하니까.


그렇게 시진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준비해. 이때 시진은 한국에 유서를 남겨놓고 왔을 지도 몰라.

재난지역의 구조대는 생사를 걸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시진의 만약은 아무 쓸모가 없었어.

그저 그 만약, 그가 스스로 준비한 죽음을 본 한 여자의 가슴만 찢어놓았을 뿐…….



모연은 시진과 구조자의 생존을 확인한 대영의 무전을 받자마자 그들이 나오는 길목으로 지체 없이 달렸어.

그러나 먼저 나온 구조자의 팔에 적힌 글씨에 모연은 멈칫했어.


“이거 누가 썼어요?”


그 말을 하면서도 모연은 이미 생존자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알고 있었어.

그 독특한 차트를 오래 전 본 적이 있었으니까.


오래 전 시진을 처음 만난 날.

그날 그녀는 오늘 본 것과 꼭 닮은 차트를 보았어.

그날 그 차트는 시진이 썼던 거였지.

그때 분명 그는 환자의 옆에 없었어.

그가 옆에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서 써놓은 차트였지.


{강민재 A형 혈압130/110 맥박85
왼쪽 발목과 오른쪽 어깨 골절의심
수액/엔세이드 30mg 투약 여친X}


모연은 시진이 무슨 생각으로 이걸 적었는지 단박에 알아챘어.

모를 수가 없었어.

처음 만났던 날도 그는 그 자리에 없었고, 오늘도 그는 그럴 예정이었던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던 거지.

이 차트를 그의 살아생전 마지막 기록으로 만들 생각이었던 거야.

그녀는 그걸 가슴 저미는 고통으로 깨달았어.


환자의 신원을 비롯한 심신상태, 투약한 약물, 알레르기 반응까지 빠짐없이 기록한 후 시진은 농담까지 써놓았어.

곧 닥쳐올지 모르는 죽음을 준비한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흔들림 없이 평소 같은 시진의 글씨체는 할 말을 잃게 만들었지.


“나 살려준 군인 아저씨요.”
“저게 기껏 살려놨더니. 아저씨 아니라니까!”


모연을 이리저리 뒤흔들어대던 그 사람은 멀쩡히 두 발로 걸어 나왔어.

그녀는 마주보고선 남자를 망연자실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야.


앞으로도 당신은 이런 삶을 살아가겠죠.
살아있는 현재에도 예견도 없이 찾아올 죽음을 대비하는 삶을.
모든 일에 목숨을 거는 삶을.
내 가슴을 찢어놓고, 그래서 당신이 나를 잡을 수 없는 그런 삶을 말예요.


모연의 가슴에 비통한 칼자국을 내는 그의 일을 시진은 계속하며 살아갈 거야.

그걸 그녀는 막을 수 없겠지.


모연은 앞으로도 이렇게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이 모든 것을 피할 수 있는 완전무결한 신의 한 수가 없는 한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시진이 준비하는 죽음을 바라봐야만 할 거야.



무서워요.
도망치고 싶어요…….






이어지는 글 :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수정 전 : "엔세이드"의 수신자 / 그대 내게 다시 돌아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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