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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리뷰 : 아름다운 그대여, 사랑을 주오

이응(119.204) 2020.03.02 22: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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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그대여, 사랑을 주오




시진은 아구스와 도깨비마을에서 불쾌한 인사를 나누고 난 후, 마을에 대한 보고를 본진에 올렸어.

마을 아이들에 대한 마땅한 처우에 대한 것과 아구스의 처리에 대한 군의 공식 명령을 받기 위해서였어.

하지만 그 일에 대한 사령관의 명령은 뜻밖이었지.


“이번 작전은 정의가 아니라 정치야.”


무기밀매에 납치, 감금, 인신매매까지 서슴지 않는 범죄자를 당장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아니라, 정치적 공작을 위해 그놈의 이용가치가 다하기 전까지는 내버려두라는 명령이 떨어진 거야.


그것도 지금 당장의 피해아동들까지 도로 놈이 데려간대도 모른척하고 있으라는 명령까지도 포함이었지.


“우리 군은 이 시간 이후 그 어떤 개입도 하지 않는다.”


길준의 명령과 저번 날의 아랍 의장 건에 대한 박병수의 명령, 두 상관의 명령은 같으면서도 달랐어.

그 형태는 같았지만 속 안의 의미가 너무도 달랐지.


박병수는 당시, 군의 책임 회피를 위한 선도 정의도 없는 그저 졸렬하기만 한 명령을 내렸지만 길준은 그렇지가 않았어.


길준의 명령은 정치적 대의를 위해서는 작은 것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지. 물론 누군가의 생명과 인생이 오가는 일에 의미의 크고 작음을 판단하는 건 인간의 몫이 아니야.

하지만 결국 정치도 인간이 하는 일이기에 저울 양쪽의 경중을 가려내야할 때가 있는 거겠지.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길준도 그게 달갑지 않았을 거야.

소의가 결코 소의가 아니라는 걸 그 또한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명령을 내리는 길준도 그 명령을 받는 시진도, 결국엔 국가의 명령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이지.


국가가 그러기로 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비정하지만 어떤 방향에서는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거라면 군인으로서 그걸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거야.

그래서 시진은 씁쓸하면서도 국가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어.


시진은 그렇게 본진을 나와 모우루 중대로 돌아왔어.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탄띠를 벗어놓으며 회랑 한 편에 앉아 굳은 얼굴을 펼 줄을 모르는데, 그 모습을 모연은 멀리서 지켜보고 있어.


먼발치에서 보기에도 오늘 그의 모습은 좋아보이지가 않아. 무슨 고민이 있는지 걱정이 있는지 그답지 않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

근무 중엔 탄띠를 빼놓을 줄 모르던 사람이 그것도 벗어놓고, 꼿꼿한 자세를 잃지 않던 그가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어.


그가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모연은 잘 알아.

처음 헤어질 때부터, 그리고 다시 만난 후에도 그녀는 그걸 몸으로 느껴왔어.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래요? 뭐가 그렇게 힘들어요.
무슨 일인지 말해 봐요.

나누면 반이라는데 내가 나눠 져 줄게요.


그녀가 그렇게 말한대도 시진은 아무런 말도 해줄 수가 없을 거야.

그래서 모연은 그냥 심각할 때 심각해봐야 심각하다는 그의 말에 따라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 농담을 해주기로 해.


“당분이 필요할 거 같아서요. 딱 하나 남은 건데 드리는 거예요?”
“고마워요. 나눠 마실까요?”
“살쪄요. 쭉 들이켜요. 약이다 생각하고.”


시진은 눈앞으로 쑥 내밀어진 커피잔을 받아들고는 모연의 너스레에 씩 웃었어. 모연은 따라 웃으며 무수히 많은 질문 중 한 가지를 물었어.

그녀가 생각하기에 시진이 거짓말을 하거나 농담을 하며 그 답을 감출 이유가 없을 만한 질문을. 그녀가 그에게 솔직한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순수하게 믿은 딱 한 가지 질문을 말이야.


그 질문이 지금 그를 가장 진실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은 짐작도 못한 채로…….


“도깨비마을에 남은 아이들은 어떻게 됐어요?”
“……잘 해결됐어요. 우르크 정부에서 전문시설로 옮겨 보호한답니다.”


아주 잠시간의, 질문한 모연은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아주 짧은 시간의 머뭇거림 후에 시진은 대답했어.

사실이지만 사실이 아니고 참말이지만 거짓말이기도 한 대답이었지.


표면적으론 그랬어. 아이들은 우르크 정부에서 전문시설로 옮겨 보호하겠다고 밝혔지.

보고된 사실은 그러했어.

다만 그 보고를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였던 거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시진은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마음이 괴로운 거고.


일에 관한 한 표정을 감추는 데 능숙한 시진은 모연의 눈을 똑바로 보며 그런 거짓말을 했어. 잘 해결됐다고.


그의 거짓말을 꿈에도 모르는 모연은 그저 기뻐했지.


“잘 됐다! 메디큐브로 데려온 아이들도 늦지 않게 치료 시작해서 경과가 좋아요.”
“그래서 되게 바빴군요. 머리 묶을 시간도 없을 만큼…….”


그 말에 모연은 머쓱하게 웃었지.

시진은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칼에서 그녀의 노고를 읽어냈어.


시진은 그녀가 의사로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아주 좋아해.

항상 자랑스럽고 존경스럽지.

현재 정의가 아닌 정치를 해야만 하는, 그리고 하고 있는 그가 지키지 못하는 정의를 모연은 여전히 지키고 있었어.

퍽 고맙게도…….


그래서 그는 그녀가 해도 되지만 그가 그녀에게 해줄 수도 있는 일을 기꺼이 하기로 해.


언제나 고맙고 매순간 아름다운 사람에게.


“이거 잠깐 들고 있어 봐요.”
“뭐 잠깐 들라 그러면 꼭 이상한 짓 하던데?”


두 사람은 같은 날을 떠올렸어.

주유소에서 종알대던 모연의 입을 막던 시진의 사심 가득한 작전을.


시진은 씩 웃었어.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지.

모연의 눈동자를 마주보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마음은 평소처럼 농담도 할 수 있을 만큼 가벼워졌어.


“내가 해도 되는데.”
“원래 연애라는 게 내가 해도 되는 걸 굳이 상대방이 해주는 겁니다.”
“나중에 나도 해줄게요. 대위님이 해도 되는 거 굳이 내가.”
“약속 지켜요.”


오늘 이미 모연은 그 약속을 지켰어.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지만, 풀 죽어 있는 시진을 위해 평소에 그가 줄곧 그녀에게 해주던 농담을 하며 그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지.


앞으로도 모연은 그를 위해 날마다 무언가를 주고 싶어.

어떤 날에는 위로를, 어떤 날에는 응원을, 어떤 날에는 감동을, 어떤 날에는 축하를, 그 모든 것을 더해서 유시진의 마음에 온전한 평화를…….


다른 이들의 평화를 위해 사느라 정작 그 본인은 챙기지 못하는 남자니까 그의 평화만큼은 그녀가 지켜주고 싶어.

그게 가능하다면 그녀는 기꺼이 그럴 참이야.


마주보며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행복을 찾던 두 사람 사이로 시진에게는 참 달갑지 않게도 자애의 무전 소리가 끼어들었어.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손님, 택배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이제 위로도 다해줬겠다 모연이 일어나 발걸음도 가볍게 가려는데 시진이 그녀를 잡았어.


“지금 택배 왔다고 나 버리고 가는 겁니까? 택배야 나야?”
“당연히 대위님이죠!”


동생에게 엄마 뺏긴 형 마냥 시진은 투덜대.

모처럼 모연과 둘만 있는 시간을 빼앗은 무전기가 왠지 원망스럽고 괜히 구해다 줬나 싶고…….


모연은 아까와 달리 눈에 띄게 밝아진 그 모습에 내 할일 다했구나, 마음 놓고 일어섰어.

연인의 밝아진 얼굴에 힘내서 다시 일하러 갈 기운을 차렸지.

이제 두 사람은 또 일을 하러 가야 해.


돌아서는 모연의 얼굴이 참 행복해 보여.

하지만 이때 시진은 그녀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이후에 벌어질 사달을 생각하면 말이야.


* * *


모연은 그녀의 택배 말고도 대영의 택배를 발견하고는 좋은 마음으로 함께 들고 나왔어.

남친의 전우까지 챙기는 착한 여친의 마음으로 서상사님 택배 찾으러 오시라고 무전을 했는데, 그 무전에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대영의 착한 여친 명주였어.


비록 그 착한 여친은 어째 분노의 사자후를 내지를 듯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말이야.


“이건 제가 확인 좀 해야겠습니다.”


명주는 분노와 질투로 불타오르며 뛰어온 참이야.

그녀가 모르는 대영의 여동생이 있을 수가 없기에 오빠오빠 거리는 택배 상자에 쓰인 글씨를 보고는 더욱 분노했어.


“오빠 힘내세요 하트?! 보고싶어요 오빠 하트으??! 헤헤에?”


대영의 헬게이트가 열린 거지. 쯧쯧.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사랑싸움 구경이라는 말이 맞는지, 모연은 구경꾼1의 심경으로 슬쩍 명주의 옆에 붙어 서선 그녀가 상자를 북북 뜯어대는 걸 보았어.


“그래도 돼?”


말로는 ‘어머어머! 주인도 아닌데 막 뜯어도 되는 거니?’ 그러면서도 모연의 눈은 이미 상자 속을 빠르게 스캔하고 있었어.

3초쯤 후면 그녀도 그 사랑과 전쟁의 주인공 중 하나가 될 텐데 말이지.


갖은 선물들 위에 놓인 예쁜 편지봉투 안에서 나온 쪽지와 사진.


{시진오빠랑 만났던 날♡ 우리의 추억들을 보내요~♡♡}


일면식도 없는 두 명의 여성과 너무 잘 알겠어서 죽이고 싶은 두 명의 놈팽이는 두 여친을 분노어린 침묵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어.


사진 속 네 남녀는 작은 한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아주 다정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어.

승무원복을 차려 입은 예쁜 여성들 옆에 앉아 미소 짓고 있는 연인의 모습에 두 여자는 분노는 살기로 변했어.


“이 남자들이……. 윤중위, 총 가져와.”


고개 끄덕이는 명주가 총을 가져오는 게 먼저일까, 총살당할 사형수가 도착하는 게 먼저일까.


죄 많은 남자 둘은 무전을 듣자마자 살아생전 이렇게 빠르게 달려본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죽을힘을 다해 뛰었어.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서도 이렇게 최선을 다해 달려보지 못한 것 같았지.

부디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상자가 멀쩡하길 바라며 엄청난 광란의 질주로 연병장을 가로질러 왔는데, 아뿔싸! 이미 두 여자는 머리를 맞대고 상자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어.


벌컥 열고 들어온 문이 벽에 부딪히며 낸 소리에 두 남자는 마침 자신의 가슴에 총알이 박힌 듯 간담이 서늘해졌어.

그와 동시에 일단 터진 입이라고 우르르 말을 쏟아냈지.


“오햅니다!”
“오해가 확실합니다!”


머리카락에, 얼굴에, 온몸을 땀으로 범벅을 하고선 두 남자는 그저 절망어린 시선으로 명주의 손에 들린 조그마한 사진을 보았어.


“오해? 암수가 서로 이렇게 정다운데 오해?”


온갖 변명거리를 생각해보지만 도통 두 남자의 머릿속에는 떠오르는 게 없어.

알파팀 팀장도 부팀장도 조국을 위한 작전이 아닌 일을 훈련받은 적이 없기에 이 난관을 어떻게 해쳐나가야 할지 전혀 답이 안 나오지.


시진에게는 요 15분 상간에 아까 그 상냥하고 달콤했던 여친은 어딜 가고 어깨에 별을 세 개도 모자라 네 개 달고 계신 모스타가 와 계신 거야.


“유시진씨의 최고의 미소를 전 이렇게 사진으로 보네요.”
“그거 웃은 거 아닙니다. 저 웃은 것처럼 보이는데 웃기게 생긴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앞뒤도 안 맞고 맥락도 없는 말을 마구마구 쏟아낼 뿐, 시진은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몰라.

그리곤 자신이 겪어본 중 가장 현란한 문장실력을 갖춘 대영이 저보단 낫겠지 싶어 제발 이 상황 좀 어떻게 해보시라고 필사적으로 팔꿈치로 찔러댔어.


이런 상황에선 그보다도 더 멍텅구리가 되는 사람이 그의 부관이라는 것도 모르고.


“사촌여동생입니다. 아시잖습니까. 제 사촌여동생 비행기 타는 거.”
“그렇지.”
“사촌 여동생한테 소포가 왔을 뿐인데 두 분이 세트로 달려오셨네요?”
“세트로 놀았으니까요.”


가까스로 생각해낸 ‘사촌여동생’ 작전은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돌아갔어.

명주는 뛰어난 군인답게 지금은 전진만이 필요한 타이밍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

공격을 멈추면 저 웬수들이 입을 맞추어 변명거리를 생각해낼 거라는 걸 잘 알지.

그저 갈 곳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굴리며 제정신이 아닐 때 밀어붙여야 저 미운 입에서 바른 말이 나오리라는 알기에 명주는 기관총을 연사하듯 몰아 붙였어.


“둘 중에 누가 사촌동생입니까?”
“어?”
“네?”
“둘이 동시에 대답합니다. 서상사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하나 둘 셋!”
“왼쪽! / 오른쪽!”
“…….”
“오른쪽! / 왼쪽!”


오, 제발!

두 남자는 두 눈을 꼭 지르감았어.


신은 그들을 버리셨어.

두 남자의 헬이 그 문을 활짝 연 거야.


평소엔 그렇게 죽이 잘 맞던 양반들끼리 가장 중요한 순간에 손발이 안 맞았지.

그것도 한 번 안 맞았을 때 끝내지 한 발 더 가서 완전 망했어.

대영은 쿨하게 전우를 버리기로 해.

세상은 혼자 사는 거잖아.

각자 알아서 잘 살아야지, 왜 남한테 의지해.


이 순간 대영은 전우를 구할 여력이 없어.

그도 살아남기 바쁘지.


“전 중대장님께 소개팅을 주선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지금 전우를 버리시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


두 남자의 처절한 콩트를 모연은 징벌자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어.


“우르크 와서도 쭉 연락하셨나 봐요? 여기 주소도 알고 있는 거 보면?”
“그러셨습니까? 아니 도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서상사님?”


대영의 망설임 없는 배신에 시진도 함께 죄(?)를 범한 죄책감과 부하에 대한 책임감을 잠시 내려놓기로 해.


시진에게는 그나마 정말로 다행한 일이지.

수취인이 서대영이 아니라 유시진이었다면…….


아, 정말 상상도 하기 무서운 일이야.
그래, 세상은 혼자 사는 거야.

음, 그러엄! 맞는 말이지.

살길은 각자 찾읍시다, 전우여.


시진은 그 유해한 상상에 몸서리치며 퇴로를 모색했어.


“이해할 수가 없네, 이 양반. 저 방금 되게 크게 한 소리 했습니다. 되게 잘했지 말입니다.”
“됐구요. 따라 와요.”


어떻게든 넘겨보고 싶었는데 애석하게도 모연에게는 통하지가 않았어.

이제는 각자 남친은 각자 알아서 털기로 하고 두 여자는 연합을 해체하기로 해.


“예, 가시죠.”
“안 섭니까?”
“아, 저 부르는 줄 알았습니다. 따라 나오라는 게 워낙 습관이 돼놔서.”


야차와 같은 눈을 한 명주의 발톱에서 대영은 도망을 시도하지만 실패해.

타고난 사냥꾼 독수리가 된 명주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된 대영은 그저 당신 말이 다 맞다는 듯, 자기는 남겨두고 시진에게 어서 가보라고 해.

난 여기서 털릴 테니 팀장님은 저기 가서 털리시라고.


“얼른 가보시지 말입니다.”
“아, 전우와 함께 있고 싶은데…….”


이 공포 속에서 전우와 헤어지는 게 너무 무섭고 불안하지만 직속상관이 까라면 까야 하잖아.

명주가 서라면 대영은 서야 하고, 모연이 따라 오라면 시진은 따라 가야지.


지금 두 포로가 할 수 있는 건 시키는 대로 하는 것 밖에 없어.


과거에서 날아온 거라면 좋았을 택배가 서울에서 날아오는 바람에 곤경에 처한 두 상관을 나머지 알파팀들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았어.


“제 말이 맞지 말입니다. 딱 봐도 소개팅이었습니다.”
“브라보팀 박하사 아들 돌잔치 날 맞지 말입니다. 봉투만 내고 바람처럼 사라지신 날!”
“아오! 고등학교 동창 아버지 돌아가셨다더니.”
“두 분이 같은 동창이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지 말입니다.”


알파팀은 일상생활 멍청도수치로 선착순 팀을 뽑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들만큼 다섯 중 셋은 바보였어.

나이도 한참 다르면서 같은 동창있다고 말하는 두 상관이나 그걸 믿는 우근이나, 도긴개긴 바보같긴 매한가지였지.

그나마 밑에 광남과 철호가 개중 나은 수준이랄까.


“우리한테도 말을 못 맞추는 분들입니다. 그날 두 분 복장이 남달랐습니다. 전 두 분이 돌잔치하는 줄 알았습니다.”


부하 셋이 저들 두고 만원빵 내기하는 가운데 두 남자는 어깨 넓이로 벌린 다리로 뒷짐 지고 선 채로 한참 구박을 당하는 중이야.


“둘이 어디까지 갔습니까.”
“건대 입구까지 갔습니다.”
“…….”


아놔, 이 인간이…….


건대 입구에 방화를 저지르고 싶게 만드는 대영의 상상 돋우는 대답에 명주는 더 분노했어.


“지금 누가 그거 묻습니까? 진도 어디까지 갔냔 말입니다! 스킨십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여친의 포효에 동공이 요동치는 대영과는 다르게 시진은 본래의 능글거림을 되찾았어.


“안 했습니다. 되게 순수했습니다. 저는 그냥 차만 마셨습니다.”
“아이구, 신사 나셨네.”
“흐흥. 과찬이십니다.”


여친 뒤를 따라오는 동안 쿵쾅대던 마음이 많이도 진정되신 거지.

그 모습은 모연의 분노를 부채질했어.


이 인간이 아직 덜 혼났구나. 이럴 때가 아닌데 과찬?


시진은 확실히 모연에게는 대체적으로 그렇긴 했지만 모든 순간 신사적인 사람은 아니었어.


천 번 참은 거 한 번 더 참지, 그걸 못 참고 용기를 내서는 모연을 많이도 복잡하게 만들었던 전적도 있고.

고백을 했더니 그걸 키스로 받아서는 두 사람을 태워준 고마운 농부아저씨에게 외로움을 안겨주기도 했어.


키스도 모자라서 온몸에 지푸라기를 묻히게 만들더니 이 인간이!

이런 나쁜……데 좋은 놈. 이씨!


모연의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해.

허락 없이 달려들어서 나쁜데 그렇다고 허락 구했으면 더 구박했을 거라 좋은 놈이기도 했지.


이미 아름답다며? 남자답게 내 생각 많이 했다며?

미인이랑 같이 있는데 불 꺼지기 바로 직전이라 태어나서 제일 설렌다며?

나한테는 그랬으면서 그 신지영하고는 차만 마셨다고?


이걸 믿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모연은 분통이 터져.


“종종 여자랑 그렇게 차 마셨구나. 난 또 나랑 헤어질 때 이번 생애에서 ‘여자’에 ‘여’자도 없을 것 같은 얼굴로 가길래 혼자 엄청 짠했네요? 그렇게 알콩달콩 잘 지내는 줄도 모르고?”


나는 당신과 헤어져서 8개월을 열심히 일만 하면서 살았는데 당신은 소개팅을 했다고?

그것도 나랑 헤어지고 파병 오기 전 그 짧은 시간동안?!


모연도 그가 예전에 소개팅 한 사실만 가지고 이러는 건 아니야.

따지고 보면 그녀도 이사장이 스카이라운지 가재서 따라갔었잖아.


그걸 생각한다면 그녀도 그냥 시진이 그 사이에 잠깐 뭐, 소개팅 정도 했다고 쳐줄 수도 있었어.

그때는 그녀와 만나던 때도 아니었으니까.

근데 그녀가 그냥 너그러이 웃고 넘길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어.


이사장의 스캔들을 생각해보자면 그녀는 그 호색한과의 사이를 정말 깔끔하게 끝냈어.

그놈 상판을 가방으로 후려쳐서 완전히 사이를 파투 냈지.

그런데 시진은 그렇지가 않았던 거야.


둘이 사귀고 있는 지금까지도 신지영의 택배가 날아왔으니 모연은 그거에 화가 난 거야.

그래서 지금 시진을 미워 죽겠다는 눈으로 째려보고 있는 거고.


“잘 안 지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저는 그냥, 그, 전우애로! 어쩔 수 없이 끌려갔던 겁니다.”
“전우애는 뉘 집 앤지.”


말을 고르고 고르다 불리하면 튀어나오는 전우애를 들먹이며 시진은 자신의 무고함을 밝히려 했지만, 완전히 무고하지는 않아서 그의 변명은 묵살되었어.


하지만 그는 조금 억울하기도 해.

그에게는 관심도 없는 여자가 보낼지 안 보낼지도 모를 택배를 신경 쓸 정신이 없었어.


정해진 파병 기간이 끝나가던 무렵 날아온 모연에게 온통 신경이 쏠린 그가 신지영이라는 여자가 보낼지 안 보낼지도 모르는 택배에 쏟을 관심이 어디 있었겠냐고.


회랑에서 또 한 번 뻥 차이고 한국으로 귀국했던 그때에 시진은 이미 모연에게 마음을 다 줘버린 후라, 그는 파병기간동안 모우루로 간혹 택배를 보내던 여자가 있었다는 걸 완전히 잊고 있었어.

아마 다시금 택배가 날아오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잊고 살았겠지.


그래서 그 여자에게 귀국했단 말을 전하지 않은 거고, 신지영은 아직도 시진이 모우루에서 파병 근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이리로 택배를 보낸 거야.


그렇게 올지 안 올지 모르는 택배를 막지 못한 그는 그 방심의 대가로 이렇게 연인의 분노어린 눈빛을 받아야 했어.


그렇지만 애초에 모연을 잊어보자고 나갔던 소개팅 때문에 그녀에게 미움 받고 있는 지금이 시진은 너무 억울해.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더만요. 좋아서.”
“되게 잠깐 봐서 오해하신 거 같습니다. 저는 계속 무표정이었습니다? 이 표정으로 차만 마셨습니다.”


시진은 진짜, 정말, 진심으로 그 자리가 즐겁지도 좋지도 않았었고 소개팅 나가서 차만 한 잔 마시고 집에 데려다 준 걸로 끝이었어.

그 후에 다시 만난 일도 없었다고.


그때 생각 없이 딱 한 장 찍은 사진이 이렇게 큰 사단을 만들 줄이야.

사진을 찍었었다는 것조차 새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연인은 그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지.


정말 무표정으로 찍은 사진인데! 정말 안 웃었는데!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는 얘기죠?”
“잊으라고 하는 얘기죠. 저는 정말 지금은 이름도 기억이 안 납니다.”


시진은 또 무리수를 둬.

자기가 그 이름 듣고 광란의 질주를 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는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해댔지.


“아아!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데 신지영 그 세 글자에 그렇게 헐레벌떡 달려오셨구나?”
“……그거 저 아닙니다.”


사실 그의 머리가 알파팀 팀장 머리라 너무 좋아서 이름만 기억하는 거지 별거 기억나는 것도 없어.

한 번 만나고 만 여자를 기억해봐야 얼마나 기억하겠어.


물론 모연과도 세 번 만나고 네 번째 만나서 헤어졌고 그 후로 8개월을 못 잊었지만 그건 그녀라서 그랬던 거라고.

그런데 모연은 그의 마음도 모르고는 그를 다그쳤어.

모연의 욕심 많은 마음은 시진이 그 여자의 이름 한 자라도 기억하고 있는 게 싫으니까!


“아악! 신경질 나. 진짜 약 올라!”


시진의 변명이 밉고, 밉고 또 미운데 이리저리 빠져 나가는 게 약 올라서 모연은 그가 더 미워.

하지만 그래도 어떡해.

좋아 죽겠는데.


빙글빙글 웃는 그의 말간 얼굴을 모연은 지긋이 노려보았어.

미운데 도무지 싫어지지는 않는 사랑스러운 남자의 얼굴을…….


모연은 걸려온 전화를 핑계로 시진을 놓아주기로 해. 진짜로 바람피운 것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 택배 하나 잘못 온 건데 그거 갖고 더 얘기하기도 그렇잖아.

실제로 그녀가 봉사 온 그 날부터 지금껏 신지영의 택배가 오간 적이 없었으니까.

모연은 그걸 참작해주기로 해.


여전히 시진의 머리에 그 여자의 이름이 남아 있다는 건 정말 열 받지만, 자애와 자비의 마음으로 연인을 용서해주기로 해.


“이 사람 땜에 산 줄 알아요.”
“누굽니까. 남잡니까?”
“지금 그걸 물을 타이밍 아닐 텐데? 여자면 어쩌고 남자면 어쩔 건데요?”
“여자면 밥 사고 남자면 술 사야죠! 너무 고마운데.”


오래 삐쳐 토라지지 않는 모연이 좋아서 시진이 빙글빙글 웃었어.

그 모습이 얄미워서 모연은 빽 소리치고 부러 쿵쿵 발소리를 내며 돌아섰어.


“이사장입니다. 왜요!”
“이사장입니다! 왜요?!”


팩 토라져서 가는 모연의 뒷모습에 대고 시진은 소곤소곤 그녀의 말을 따라하며 웃었어.

그녀가 화내는 게 무서우면서도 그 이유가 질투여서 시진은 좋아.


그녀가 화내고 성질 피우고 째려보는 게 무섭긴 하지만, 결국 그건 그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이라 그 매서운 눈길마저 시진은 사랑스러워.


모연은 화내도 흘겨봐도 그저 예쁜 사람이라 오늘도 시진의 병은 깊어만 가.


아름다운 그대여.
더 많이 사랑해 주세요.




이어지는 글 : 나를 바르게 살게 하는 사람




수정 전 : 그저 예쁘기만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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