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XX년 12월의 어느 아침, 서울 XX구 XX동.
김 노인은 오늘도 가볍게 집을 나섰다.
늘 그래왔듯 조촐한 작업복 바지에 흰색 면티, 그리고 그 위에는 싸제 군용 야상, 마지막에는 붉디 붉은 해병대 전우회 모자까지.
군데군데 기워낸 흔적이 역력한 바지와 낡고 헤진 야상은 그것들이 얼마나 오래되었으며 또한 그 낡은 옷들을 여전히 고수하는 점에서 그 옷가지들에 대한 김 노인의 애착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그가 어딜 가든 늘 착용하는 해병대 전우회 모자는 김 노인이 사는 동네의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김 노인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한풍이 유독 매서운 날이었지만 바람이라도 숭숭 들어올 것 같은 이 옷들과 함께라면 그 어떠한 추위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김 노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투철한 해병정신으로 무장한 김 노인이라 할지라도 자고로 주린 배는 채우고 든든하게 뎁혀두어야 했기에 따스한 국물이 생각난 그는 오랫만에 발걸음이 뜸했던 인근의 국밥집으로 향했다.
"어이, 오랫만일세 그려."
습기로 도배된 가게 문을 벌컥 젖히고 김 노인이 우렁차게 인사를 건네자 가게 사장인 이씨는 카운터에 앉아 있다가 김 노인을 보고는 이내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아...네, 어르신.. 오랫만이네요."
"그려 그려, 그 국밥 하나 좀 말아주지?"
"아, 네..."
오랫만에 맡아보는 얼큰한 국밥 냄새에 벌써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한 김 노인은 이씨의 굳어진 표정을 본체만체 마냥 입이 귀에 걸려 있었고 이씨는 주방 안에서 재료를 손질하고 있는 아내를 보며 인상을 잔뜩 찌푸린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보.. 저 분 왜 또 오셨대요? 저번에 당신이 잘 말해서 더는 오지 말라고 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씨의 아내 정씨도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긴장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남편을 향해 조심스레 묻자, 이씨는 한숨만 푹푹 쉴 뿐이었다.
"하... 나도 몰라... 분명 저번에 내가 몇푼 쥐어주면서 오지 말라고 그렇게 애원하다시피 했는데도 또 왔네... 하, 왜 저러냐 진짜.. 그냥 국밥 한 그릇 얼른 먹이고 보내버리자고."
"오늘은 별 일 없이 지나가야 할텐데요..."
정씨가 지난 날의 악몽이라도 떠올린 듯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잇자 이씨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께.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긴 한데... 밥 다 먹거든 내가 같이 담배 한대 피자면서 얼른 밖으로 데리고 나갈께."
불안해하는 아내의 우려를 불식시킨 이씨는 이내 내어온 국밥 한 그릇을 가지고 김 노인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드세요, 어르신..."
"어, 그래. 허허, 그동안 별일 없었나? 장사는 좀 잘 되고?"
이미 시선은 국밥에 꽂혀 인사치례로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을 던지는 김 노인이었고 이씨는 불안한 눈길로 국밥을 수저로 휘휘 젓고 있는 김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번처럼 또 국밥에서 무슨 이상한게 나왔다면서 돈을 내지 않고 먹겠다고 한다던지 혹은 다 먹고 나니 배탈이 난 것 같다며 식중독으로 신고하겠다라고 을러대던 지난 날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 네네.. 뭐, 그냥 그렇죠.. 어르신께서도 별 일 없으셨죠?"
"나야 뭐 늘 똑같이 바쁘지. 하루종일 이 동네 순찰 돌랴, 동네 주민들 안부 묻고 동향 살피랴, 몸이 남아나질 않는구먼!"
김 노인은 자랑스레 떠들었고 이씨는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이었다. 대관절 자기가 뭐라고 이 동네 순찰이며 동네 주민들 일에 간섭한단 말인가? 이 동네는 대한민국의 공권력이 통용되지 않는 우범지대라도 된단 말인가?
아, 하기사 예전에 이 김 노인이 동네 가게 상인들과 마찰이 좀 있어서 주먹다짐이 오갔기에 경찰에 신고하여 공권력의 개입이 있긴 했었으나, 경찰들도 워낙 김 노인의 자자한 '명성' 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는지라 똥을 피하려는 듯 그냥 좋게 좋게 합의하라는 식으로 흐지부지 되었던 적은 있었다.
"내가 이 동네 해병대 대장이여! 나 혼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이렇게 말이여, 으이? 혼자 이 동네 순찰 돌면서 느그 대신 방범하고 있으면 되려 나한테 모범시민 상을 주거나 포상을 주던가 해야지! 되려 나보고 뭐가 어쩌고 어째?! 아니 글쎄, 이 양반이 가게 가판대를 너무 앞으로 세워놔서 보기 안좋으니 뒤로 좀 밀라고 조언한건데 말이여! 그러면 네 한번 시정해보겠습니다, 혹은 네 고려해보겠습니다 하고 그러면 될 일이지 되려 어따대고 왜 간섭하냐는 둥, 방해하냐는 둥 지랄이여 지랄이!"
그 날 김 노인이 핏대 세워 출동한 경찰에게 삿대질 하며 힘껏 윽박지르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울리는 듯한 이씨였다. 어쩌면 오늘의 또 다른 그의 희생자가 자신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기에 이씨는 최대한 김 노인과 대화를 끊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네, 그러시군요.. 허허.. 그럼 식사 맛있게 드세요."
이씨는 황급히 자리를 떴고 김 노인은 들은체 만체 국밥을 입에 우겨넣고 있었다.
뜨거운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뱃속을 훈훈하게 데우기 시작하자 김 노인의 마음 또한 훈훈해지는 듯 했다.
아아, 이것은 아마도 오늘도 XX동의 치안과 안녕을 위해 늘 고군분투하며 헌신하는 자신에 대한 하늘의 격려인 것이리라!
어쩌면 하늘만이 전역하고 수십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건재한 해병정신, 즉 내가 아니면 안된다라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자신을 굽어 살피시고 보우하시어 내리시는 한 끼 따뜻한 양식!
비록 동네 주민들 중에 더러 그러한 자신의 깊은 생각과 마음을 몰라주고 찐빠를 내는 기열스러운 존재들이 있긴 하나, 그런 존재들을 다소 따끔한 방식으로라도 계도하고 바로 잡아주는 것이 해병의 덕목일터! 아닌 말로 이런 일을 해병이 아니고서 어느 누가 총대를 메겠는가! 해병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행위인 것이다!
비록 해병대를 전역한지는 수십년이 지났으나 기억은 잘 안나지만 어느 외국놈이 그랬다고 하지 않던가? 노병은 죽지 않는다라고.
설령 해병이 아닌 어느 흘러빠진 땅개인지 물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만큼은 참으로 기합이었다! 그 말대로였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비록 해병의 신분에서는 벗어났으나 해병대에서 익힌 신조로 사회에서도 살아가는 김 노인 자신은 영원한 해병이리라!
물론 이렇게 한 명의 해병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길은 아닐 것이며 주위의 기열스러운 이들로부터 눈총도 받겠으나 언젠가는 이 그들도 자신의 그러한 깊은 뜻을 알아줄 날이 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김 노인이었기에 그는 오늘도 기합차게 국밥 한 그릇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어느새 국밥 한 그릇을 비운 김 노인은 걸쭉하게 트림을 한번 하고는 담배를 꼬나 물었다. (아, 참고로 이곳은 실내다)
"아이고.. 다 드셨나요 어르신. 같이 나가서 담배 한 대 태우실까요?"
이미 예상했다라는 듯 이씨가 황급히 달려와 김 노인에게 말하자 김 노인은 껄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구먼, 이제 계산해야지."
"아뇨 아뇨, 그냥 가셔도 좋습니다. 그냥 제가 한 끼 대접해드렸습니다."
"허허, 이거 매번 얻어먹는 것 같아서 어쩌나?" (실제로도 매번 얻어 먹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던지며 김 노인은 천연덕스레 이씨와 함께 나갔다. 그리고는 말 한마디 없이 유난히 담배를 빠르게 피우고 꺼버린 이씨가 이상해보이긴 했지만 뭐 원래 기열스러운 존재란게 원래 그렇지 아니하던가?
그렇게 국밥 한 그릇으로 하루 일과의 동력을 얻은 김 노인은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냈다.
하릴없이 동네를 몇 번이고 돌면서 지나가는 동네주민들마다 붙잡고 안부인사를 건네고 잘못된 부분들을 하나 하나 따스하고 진심어린 충고를 건네기에도 숨가뿐 하루였으니 말이다.
과일가게의 정씨는 가격을 너무 높게 올려 붙여서 팔기에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은 (자신) 이들이 못사먹을 수 있으니 가격을 내리라는 읍참마속의 심정의 뼈아픈 조언을 건넸고,
폐지 줍는 김씨 할머니는 너무 혼자 동네 폐지를 독식하여 다른 노인들이 불공평함을 느낄 수 있으니 하루에 1kg만 줍는 것으로 합의하라고 공정한 처분을 내렸고,
마트에서 만난 40대 어느 부부에게는 국가 출산율이 너무 현저하게 떨어졌으니 얼른 셋째를 가지라는 식의 구국의 심정에서 비롯된 정감어린 종용을 하였고,
마지막으로 놀이터에서 만난 어느 어린 아이에게는 너무 그렇게 뛰어놀면 지축을 울려 지진을 유발할 수 있으니 적당히 하라는 백년대계에서 비롯된 진정어린 충고를 건넸음에도 어안이벙벙한 표정으로 있자 멱살을 잡는 것으로 따끔한 계도와 조기훈육을 선사하였으니 참으로 기합찬 하루였다!
그리고 그렇게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이 되었고 김 노인은 소주 한병을 곁들여 (동네 가게 장씨로부터 '기부' 받았다) 새우깡을 안주 삼아 텅 빈 놀이터의 벤치에 앉아 하루를 마무리 하고 있었다.
단전으로부터 올라오는 취기를 내뿜듯 입김을 토해내자 뿌연 연기가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놀이터를 물들이는 듯 했다. 오늘도 참으로 기합찬 하루였구만. 김 노인은 오늘 있었던 성과들을 되새김질하며 만족스레 웃음지었다. XX동의 하루를 오늘도 해병정신으로 지켜내고 무탈하게 흘려 보냈다라는 성취감에서 비롯된 미소였으리라.
그리고 그때....
"이 자인가?"
"악! 그렇습니다 박철곤 해병님!"
어디서인가 웬 거한 두 명이 부지불식간에 나타나 거대한 그림자를 김 노인에게 드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웬 악취가 풍겨오는 것이 슬슬 올라오던 취기 마저 확 깨게 만드는 것이었다.
"뭐, 뭣이여, 니들은?"
김 노인이 눈이 휘둥그레져 올려다 보며 묻자 그 두 거한은 말없이 김 노인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구석구석 자신을 훑어보고 있는 사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웬걸, 이 추운 한겨울에도 이 거한들은 붉은 팬티와 모자만을 걸친 나체상태였던 것이었다.
"노인이라고 미리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이건 생각보다 너무 늙은 노인이 아닌가. 무모칠! 너의 선택에 자신 있나!"
"악! 물론, 말씀대로 보시다시피 흘러빠진 기열 중의 기열스러운 육체이긴 합니다만, 제가 주목한 것은 아직 건재한 그의 해병혼입니다! 비록 노인이라 하여도 아직까지도 해병혼이 담겨 있다면 그 또한 기합일터! 이는 황근출 해병님께서 최근 제정하신 해병-코란 69조 74항에 의거하여 '전역자라 하여도 해병혼이 충만하다면 나이및 상태불문하고 자진입대 대상에 속한다' 라는 조항과도 부합합니다!"
"음...."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거한들을 보며 노인은 저도 모르게 오금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일단, 자신의 키를 아득히 뛰어넘는 체구인데다 그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협적인 기운 그리고 사납기 짝이 없는 어조, 김 노인이 사는 이 XX동에서는 일찍이 본 적도 없고 접해본 적도 없는 이들로, 그동안은 만만한 이들만 상대해오던 김 노인이었기에 이런 거구들을 보니 목소리도 기어들어가는 것이었다.
"네...네놈들, 대관절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썩 꺼져..! 이 어린놈의 새끼들이 어따대고..."
"오호..."
"보십시오! 아직 해병혼이 충만하지 않습니까! 아직까지도 해병-예절(기열 싸제어로는 꼰대질이라고 한다)이 엿보이니 말입니다!"
"느그들 내가 누군지 알어?! 내, 내가 여기 XX동 해병대 대장이야! 으이?! 어린 놈의 새끼들이 누구 앞이라고... 혼쭐나고 싶지 않으면 썩 꺼져..!"
이미 공포로 새파랗게 질린 김 노인이 혼비백산하려는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 쥐어짜내듯 외친 일갈이었음에도 이 거한들을 위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듯 보였다.
"과연 그렇군. 무모칠 네 말대로다. 이 노인은 비록 수십년이 지났음에도 해병혼이 아직 충만하군. 비록 육체는 흘러빠졌으나 그 정신만큼은 기합 그 자체!"
거한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옆에 있던 또다른 거한이 호탕하게 웃으며 김 노인에게 말했다.
"아쎄이! 비록 너의 흘러빠진 육체에 걸치고 있는 옷들은 모두 기열 그 자체이나, 유독 쓰고 있는 그 모자만큼은 기합이다! 이미 오늘의 만남을 너도 예감하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모자라면... 내 해병대 전우회 모자 말인가..? 그리고 기합과 기열이라니, 김 노인에게도 익숙한 단어를 쓰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아마도...
김 노인이 잠시 이 두 거한의 정체를 추측하는 사이, 그 거한은 갑자기 양 손으로 김 노인의 옷을 잡고는 잡아챘다. 그러자 누더기 옷들이 모조리 찢어져 나갔고 김 노인은 이제 늘 자랑스러워 하던 각개빤스 한 장만 걸친 채 초라한 모습으로 두 거한들 앞에 서게 되었다.
"오호... 기합, 기합이다! 수십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해병혼이 함께하는구나!"
그러자 잠자코 지켜보던 옆의 거한이 감탄하듯 외쳤고 김 노인의 옷을 찢어버린 거한은 김 노인을 향해 이빨을 드러낸 채 미소 짓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한의 하얀 이빨이 유난히 돋보이고 있었다.
"아쎄이! 재입대를 축하한다!"
그러고는 그 거한은 한 손으로 김 노인의 목을 움켜쥐고는 뒤돌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김 노인은 비명 한번 못지르고 맥없이 끌려갔다.
남은 거한 하나는 말없이 벤치에 남겨진 김 노인이 먹다 남긴 소주와 새우깡을 내려다 보았다.
거센 찬 바람에 새우깡들이 힘없이 흩날려 벤치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제 이것들은 김 노인, 아니 아쎄이가 이 사회에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이 될 터였다.
"축하한다. 아쎄이. 소원대로 노병은 죽지 않게 되었군."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윽고 거한도 발걸음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12월, 추운 어느 겨울날의 일이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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