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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큰 재판장 3

운영자 2010.04.13 14:30:00
조회 365 추천 0 댓글 1

  다음 재판 날이었다. 그 절도범을 직접 붙들었다는 집주인 남자가 증인으로 증언석에 앉아 있었다.


  “저는 저기 있는 사람이 저의 안방에서 물건을 훔쳐 나오는 것을 세 사는 할머니와 함께 보고 파출소에 신고한 적이 있습니다. 저 사람 내가 아는 사람도 아니고 저의 집에 물을 먹으로 온 것도 아니에요. 또 잡혔을 당시 술을 먹은 것 같지도 않던데요..”

  그는 증인으로 불려나온 게 몹시 못마땅한 듯 일사천리로 당시의 상황을 말했다.


  “피고인, 저 증인한테 정말 억울한 게 있다면 말해 보세요.”

  재판장은 절도범에게 증인을 신문할 기회를 주었다. 절도범의 단추 구멍 같은 작은 눈이 순간 반짝 빛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뭔가 이번에는 증인에게 할 말을 준비해 온 눈치였다.


  “아저씨, 제가 집 앞에서 아저씨를 봤을 때 물건을 다 돌려 드리고 제 삐삐하고 주민등록증까지 맡겼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제가 도둑놈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게 맡긴 겁니까? 나한테 뺏긴 거지요. 그 날 내가 댁을 파출소로 끌고 가려고 하니까 하도 사정을 하는 바람에 내가 일단 삐삐하고 주민등록증을 맡아 두고 당신을 보내 주었는데 그 후 연락이 없어 사실대로 파출소에 신고한 게 아니에요?”

  절도죄의 증언이 증인과 절도범의 옥신각신 말싸움이 되어버렸다.


  “아저씨, 그 날 내가 무릎 꿇고 빌었잖아요. 기억나요. 그만하면 됐지 왜 신고해서 나를 이 고생시킵니까? 저는 도망간 게 아니고 그 집 앞에 주차해 있던 내 차로 들어가 있었다니까요. 아저씨가 신고하기 저에 합의하려고요. 그러데 그새 참지 못하고 신고하다니요. 제가 정말 도둑 같으면 그랬겠습니까?”

  절도범은 현장에서 자기가 순순히 잡혀 준 게 큰 인심이나 되는 듯 계속 주장했다. 그건 도둑이 아니라는 그 나름으로의 논리가 짙게 베어 있었다. 요새 같은 험한 세상에 나 같은 착한 도둑은 용서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재판장의 입가에서 빙긋이 미소가 지어 나왔다.


  “피고인, 빌었데메?”

  “!”


  “남의 물건을 훔치지도 않았고 잘못도 없다는 사람이 빌긴 왜 빌어?”

  “!”


  “피고인, 그 날 술이 취해서 절도한 사실을 전혀 기억 못하겠다고 그랬는데 어떻게 운전을 하고 온 차를 그 앞에 대어 놓았지?”

  “술은 먹어도 운전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아, 술을 먹어서 아무것도 기억을 못할 정도라는 사람이 운전을 했단 말이요?”

  “자, 사실 아주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피고인, 이제 끝냅시다.”

  재판장은 피고인에게 할 만큼 해 주었지 않느냐는 눈치를 보이며 물었다.


  “....”

  그렇게 우연히 목격한 절도범의 재판이 끝났다.


  얼마 후 나는 재판장과 차를 한잔할 기회가 있었다. 낡고 퇴락한 서소문의 우중충한 법원건물 6층 구석이 그의 방이었다. 방문 입구에 칸막이를 옆으로 하고 심부름하는 아가씨가 한 명 있고 그 뒤에 소파 하나와 창문 쪽으로 오래 된 갈색 목재 책상이 놓여 있었다. 피고인들의 인생에서 어느 기간의 삶을 박탈할 신 같은 권한을 가진 재판장으로 방으로서는 너무 초라한 인상이었다. S재판장은 한동안 변호사 생활을 했었다. 그러다가 다시 임관을 받아 판사가 된 것이다. 자유로운 생활과 상대적 넉넉함을 버리고 그는 다시 스스로 판관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담배 한 대 하시지요.”

  담배를 권하는 그의 얼굴에는 20년 전에 보았던 젊고 싱싱한 기운이 이미 빛바랜 낙엽처럼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검버섯이 하나 둘 돋아나고 있었다. 그는 그가 무허가 학원 강사 시절 내가 그에게서 강의를 들은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 피우겠습니다.”

  나는 예의로 사양했다. 변호사가 재판장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표명하는 것은 사법부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나는 매번 생각한다. 어떤 판사들은 변호사가 취하는 예우를 그 자신의 권한에 대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또 변호사가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자신에게 청탁을 위한 전제쯤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판사에게 예의를 취할 당시 그가 취하는 태도에 따라 판사의 인생관과 사회관을 가늠하게 될 때가 많은 것이다.


  “눈치를 보니까 못 피시는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자, 한 대 피우시지요.”

  S재판장은 담배 갑을 내 앞에 내밀면서 계속 강권한다. 이 정도면 더 거절하는 것은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형식적인 예의가 된다. 나는 담배 갑에서 한 가치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가 라이터에 불을 켜서 내게 건네주다. 고맙다. 그를 찾아온 친하지 않은 사람의 입장을 감싸 안는 부드러운 모습이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따뜻함을 느낀다.


  “재판하는 걸 보니까 식사도 못한 채 하루 종일 고생하시고 또 변호사들도 기다리다 지쳐서 불평이 많던데요. 변호사에서 다시 재판장으로 입장이 바뀌니까 어떻습니까?”

  “글쎄요.. 판사라는 직업 이건 직업적 사명감이 없으면 못해낼 것 같아요. 제가 변호사할 때 답답했던 건 이건 도대체 재판장들이 내가 다 안다는 식으로 대하면서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어요. 하기야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다는 것 보다 어려운 건 없지만 말이지요. 그래서 내가 재판장이 된 이후에는 아무리 하잘 것 없는 말이라도 또 눈에 보이는 거짓말이 있더라도 가급적 다 들어주려고 합니다.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게 판사의 역할 아닐까요? 답은 판결문으로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재판장이 법정에서 총명함을 자랑하거나 말을 하는 것보다는 끝까지 인내하면서 불쌍한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게 훨씬 훌륭하게 보입니다.”

  나는 S재판장실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 나왔다. 빛이 들지 않는 우중충한 긴 복도를 지나 낡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두세 사람 들어가면 꽉 차는 엘리베이터가 덜덜거리며 내려와 입을 연다. 법원 건물 문 앞에 나와서니 찬바람이 확 다가온다. 법정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 들어간 가족들이 개정시간을 기다리며 서 있다. 추워서 그러지 사람들의 입에서 마치 스팀 꼭지처럼 김이 나온다.


  나는 S재판장의 깊은 영혼 속에서 타고 있는 체온이 어떤 모습으로든 그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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