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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부장사

운영자 2010.05.18 15:14:04
조회 273 추천 0 댓글 1

  찌는듯이 덥다.아침부터 눅눅하고 습기찬 무더운 공기가 도시의 빌딩숲 사이에 가득 차 있다.오전인데도 재판을 마치니 등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긴소매에 넥타이로 꼭 동여맨 와이셔츠는 바람한점 통할곳이 없다.사무실로 돌아왔다.예약된 상담객이 마치 「이놈 기다렸다」하고 덤비는 듯 하다.한숨돌릴 여유도 없이 법률상담에 들어갔다.말이 상담이지 찾아오는 사람의 자잘구레한 넋두리까지 그저 들어야 할 때가 많다.나름대로는 절실한 얘기를 하는데 잠시도 한눈을 팔 수가 없다.남의 고민을 항상 진지하게 들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므로.이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는 같이 이렇게 고민하고 저사람이 들어오면 또 같이 분노해 주기도 한다.그러다가 보면 나는 하루종일 고민만 한다.그러다가 저녁무렵이면 가슴속에 검고 진득진득한 공해가 가득끼는 것 같다.하루종일 남들이 배설해 놓은 것을 차곡차곡 받았으니까.상담을 하고 있는데 사무실의 미스리가 조용히 메모를 들고 왔다.메모지에는 「L이라는 분이 와서 기다리십니다」라고 씌어 있었다.월부장사를 하는 고교 동창이었다.그는 별로 반갑지 않은 손님으로 알려져 있었다.그는 일찍부터 동창들을 찾아다니며 월부책이나 비디오 테이프를 팔고 다녔다.사업에 실패하는등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그는 정확히 일년에 한번씩 사무실을 찾아오곤 했다.이런저런 형식적인 얘기끝에 그는 조용히 월부책이나 비디오테이프 목록을 내놓곤 했었다.따라서 나는 당연히 그가 왜 왔는지를 짐작했다.상담객이 나가고 곧이어 그가 방으로 들어왔다.


  “어이 오래간만이네 어서오게  점심때인데 아직 점심을 안먹었지? 우리 근처의 냉면집이나 가지”

  나는 바로 일어서 그와함께 근처의 냉면집으로 갔다.엽차잔에 육수를 따라주는 여종업원에게 냉면과 수육을 한접시 시켰다.그는 은근히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그래 돈은 많이 벌었나?”

  내말에 그가 의아한 눈치다.월부장사하러 궁상맞게 찾아온 사람에게 무슨 당치않은 소리냐는듯 했다.그러나 내 말은 그가 당당한 세일즈맨으로 직업의식을 가지고 행동해 달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돈은 무슨 나같이 복이 없는 놈은 맨날 이짓거리지----”

  그는 자조하듯 그렇게 말했다.


  “그래 지금 취급하는 물품들은 어떤 것들이야 내놔봐 내가 필요한게 있나보게--”

  눈치를 보니 그는 내가 반갑지 않은 동창을 식사한끼정도 사주고 적당히 돌려보내려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그러나 의외로 한건한다 싶었는지 그는 얼른 가지고온  카탈로그를 내놓았다.세계여행 비디오테이프들과 한국사 전집류였다.


  “이건 필요한 것 같지 않고 다른 책종류는 없어? 나는 요새 한국문학전집이 필요한데 말이야 나도 읽고 중학교에 다니는 애한테도 읽게하려고 하는데----”

  나는 진심으로 내가 필요한 것을 말했다.그리고 그가 권하는 것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거절을 했다.오랜 세월을 월부장사로 지내온 그는 어느새 사람의 내심을 파악하는 남다른 후각을 가진 것 같았다.그의 얼굴이 서서히 펴지기 시작했다.


  “나는 자네가 권하는 것을 엉거주춤하게 사지는 않겠네. 그대신 긴요한건 자네한테 감사하면서 사겠네 내가 필요한 물건을 자네가 일부러 찾아와서까지 전해주는 거니까----”

  나는 그가 진심으로 친구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성심껏 가지고 다니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그리고는 좀 더 떳떳한 태도를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었다.내가 사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당당히 팔아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팜플렛을 가지고 오지는 않았는데 어문각에서 나온 한국문학전집이 있어 내용이 좋은데 자네가 필요하다면 그것을 가져다 줄께 ”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 자신감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나 요새 형편이 좋지는 않은데 좀 깎아줘 그리고 월부로 갚게 해주면 안되겠나?”

  “그래  5%깍고  18개월로 나누어 지불할 수 있도록 하지”


  어느새 그는 월부물건 하나 사달라고 인연을 찾아온 궁상맞은 동창이 아니라 당당히 소비자에게 좋은 물건을 내놓은 세일즈맨이 되어 있었다.


  “내가 처음 세일즈를 시작할 때는 참 힘들었어.용인에 있는 의사친구를 만나 물건 하나를 팔기 위해 버스를 타고 몇시간을 털털거리면서 간 적도 있지.그런데 냉정한 표정으로 다음에 보자하고 거절을 하면 다시 저무는 해를 보면서 집으로 돌아갈 때면 몸보다 마음이 더 피곤해 지더라 분명히 내가 파는 물건 정도는 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찾아간것 아니겠니 참 서럽더라.그리고 또 어떤 동창들은 내 물건을 하나 사주면서 뒤로는 저새끼 고등학교때 공부한하고 빌빌 거리더니 기어코 사회에 나가서도 평생 친구찾아다니며 월부물건이나 강매하더라 하고 뒤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려오면 목구멍에서 설움이 복받쳐 올라오곤 하더라.”

  그의 마음문이 활짝 열려진듯 했다.그는 이어서 신난듯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친구들이 사십이 넘어가니까 이상할 정도로 따뜻해지는게 느껴져 이제는 찾아가면 스스로 알아서 물건들을 사줘 오히려 내가 미안할 정도야 그리고 그럴수록 이짓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내가 못난 놈인걸 스스로 느끼게 돼 앞으로는 진짜 친구들이 원하는 걸 알아 가지고 가서 팔아야 겠어 ----”


  점심후 나와 헤어져 한낮의 뜨거운 태양 밑으로 걸어가는 L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듯 보인다.말만 변호사지 이렇다할 경력도 능력도 없는 변호사인 나도 판사실이나 검사실을 궁싯거리고 드나들며 「한번 봐 줍쇼」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L의 심정과 근본은 같을 것이다.다만 겉포장만 위선과 점잖으로 꾸민다 할지라도.처음에는 약간의 홀대에도 자존심을 다치고 속이 얼어붙어 왔다.그러나 점점 그런 마음이 없어진다.무시하는 것은 저쪽사정이고 필요한 것은 이쪽의 형편이므로.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담당한 죄인의 분신이 되어 가는 것이라면  무릎인들 못꿇을까.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도 오후의 세일을 위해 어느새 마누라보다 더 동반자가 된 가죽가방을 들고 법원구내쪽으로 슬슬 올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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