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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만원, 너무 많잖아!

운영자 2010.04.22 12:36:32
조회 352 추천 0 댓글 0

  저 멀리서부터 잉크 빛 물이 흐느적거리며 서서히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이따금씩 흘러 내려오는 수량이 적은 물 위로 검은 플라스틱 통이 둥둥 떠내려 오다가 탄천 바닥의 돌 위에 걸려 제자리에서 빙글하고 한 번 회전을 하고 서 있다. 조그만 실개천으로부터 탄천으로 합류하는 지점은 초록색의 부유물들이 물 위에 떠서 맴돌고 있다.
   나는 정리 공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어가는 탄천을 오른쪽으로 끼고 둑을 따라 걸어 나갔다. 아직도 약간 서늘한 기를 띤 봄바람이 마른 먼지를 머금고 내게 다가왔다. 왼쪽으로 올려다 보이는 둑 위로 개나리들이 노랗게 피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주일이 되면 흙을 밟으면서 한정 없이 걷고 싶다. 특히 물새들이 우는 맑은 강물 옆을 말이다. 그러나 도로를 꽉 메운 차량들의 밀도를 생각하면 아예 시작부터 포기하고 만다. 그 대신 나는 요즈음 그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할 장소를 찾아냈다. 일요일이면 내가 사는 야탑역 앞을 흐르는 탄천을 따라 그 옆길을 산책하는 것이다. 

   주변은 비교적 잘 정리되었는데 흘러 내려오는 물이 고약하다. 물만 정화되면 어디 내놔도 지지 않을 좋은 산책로가 될 것 같다. 나는 그런 맑은 물을 상상하면서 물가를 따라 한참을 걸어봤다. 탄천 변에 있는 새로 지은 교회에 들어가 오후 예배를 보고 나오는 길에 산책 겸 탄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이다. 한 없이 걸을 것 같았는데 의외로 한 시간 가량 걸으니 장단지가 묵지룩해지고 허기가 졌다. 늦은 아침을 먹고 배가 고프지 않아 그냥 있었던 것이다. 둑에 나 있는 콘크리트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분당 신도시의 탄천을 따라 만든 도로가 날씬하게 뻗어 있었다.
   드문드문 앞뒤가 뚫리고 투명한 천장을 올려놓은 긴 상자 모양의 버스정류장이 보인다. 그 안에 노랑 파랑의 붙박이 의자가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낯선 도시에 나그네로 온 것 같은 감상에 젖어들었다. 저녁 늦게 집에 들어와 잠만 자고 아침에 일어나 서울 강남에 있는 사무실을 시계추같이 오가다 보니까 내가 사는 곳의 이웃이 낯설기만 했다. 아파트의 밀림만 뺀 거리모양이라면 마치 스위스의 어느 조용한 도시 길모퉁이에 서 있는 기분일 것이다. 나는 문 닫은 상가의 쇼윈도 속에서 혼자 폼을 잡고 서 있는 마네킹들을 구경하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팠다.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만이 즐기는 한 가지 버릇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식사도 시간을 맞추어 먹지 않았다. 물도 자주 마시지 않는 편이다. 너무 규칙적으로 식사가 주어지고 의무적으로 그것을 먹으면 맛이 없다. 배고프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는다. 허기가 져야 비로소 식사를 찾아 헤멘다. 배에서 한참 음식을 요구할 때 혀는 비로소 그 맛을 몇 배 느끼는 것 같다.

   그 후로 찾아오는 포만감은 무엇 하나 부럽지 않다. 먹는 음료수도 마찬가지다. 어떤 때는 오랫동안 갈증을 참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물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바로 그때의 물맛을 즐긴다. 아내가 건강에 나쁘다고 말려도 아직은 그걸 고수하는 편이다. 다리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사무실 책상 앞에서만 일해 온 40대 중반의 다리는 걷는 걸 거부하고 힘들어하고 있다. 나는 도로가에 잠시 멍청히 서 있었다. 배는 고프고 지나가는 택시도 없다. 걸어 온 길을 다시 걸어갈 힘이 없다.
   그때였다. 노란색 페인트칠을 곱게 한 마을버스가 눈앞에 다가왔다. 버스 옆에 있는 행선지를 적은 안내판을 보니 내 집이 있는 야탑역이 적혀 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마을버스는 처음 타 보았다. 차에 올라타 좌석에 털썩 앉았다. 차가 출발을 하니까 반동으로 저절로 의자에 앉혀지는 것이다. 운전기사 옆의 장방형 돈 통 표면에 일반 3백원, 학생 2백원이라고 쓰여 있다. 승객이 직접 동전을 그 통에 넣고 있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동전이 없다. 동전이 생기면 그건 항상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 몫이었다. 하는 수 없이 천원 짜리 지폐 한 장을 그 돈 통에 집어넣었다.


  “아저씨, 이 차는 잔돈이 없어요. 다음 정거장에서 직접 돈을 받아 거슬러 드릴께요.”

  선량해 보이는 젊은 기사가 앞을 보면서 상냥하게 말한다. 하얀 얼굴에 검은 눈썹이 윤곽을 뚜렷하게 한다. 썬글래스를 쓴 미남형이다. 다음 정거장에서 손님이 오른다.


  “동전 좀 이리 주세요.”

  운전기사가 말한다. 그러나 버릇인지 그 말 전에 손님들은 벌써 동전을 돈통 속에 ‘찰그랑’소리를 내며 집어넣었다. 운전기사가 가벼운 낭패의 표정을 짓는다. 버스가 다시 떠났다. 다음 버스정류장에서였다. 어떤 젊은 여자 둘이서 차에 올랐다. 30대 주부로 보이는 맑은 얼굴들이었다. 아마 인근 슈퍼마켓이나 시장에 왔다가 가는 길인 것 같았다. 차에 올라탄 그들의 얼굴에 잠시 낭패의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머 어떻게 하지? 만 원짜리 밖에 없어. 항상 돈이 많아도 걱정이야..”

  그녀들은 동전이 없어 도로 내렸다. 그걸 보면서 나도 동전 세 개를 준비 못하고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돈 통에 밀어 넣은 게 미안했다. 천대하던 천원이 큰돈인 걸로 느껴졌다. 그녀들은 아예 미안해서 스스로 차에서 도로 내린 것이었다. 마을버스는 돈이 많은 사람은 거절하는 버스였다. 어른은 동전 세 닢 그리고 아이들은 동전 두 닢이면 충분했다. 돈이 많은 사람은 태우지 않는 차였다.


  며칠 전 신문에 만 원권 지폐를 2억 5천만원씩 가득 채운 사과상자가 창고 가득 쌓인 사진이 나온 걸 봤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자금 중 일부라는 몇 십 억원의 돈이었다. 변호사인 나는 법정에서 그를 본 적이 있다. 하얗게 빛바랜 얼굴을 한 노인의 눈은 노여움과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명예가 구속되는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숨겨둔 돈으로 해서 사 입은 미결수용 하늘색 잠바와 바지는 2만5천원짜리였다. 그리고 감옥에서 그에게 제공되는 한 끼 식사비는 천원 안팎으로 짐작이 간다. 할아버지인 그가 남은 평생을 써도 그 자신은 얼마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런 그가 그 많은 돈을 몰래 끌어안고 끙끙대고 있었던 것이다. 만 원짜리 한 장 가진 여자가 “돈이 많아도 걱정이야”하면서 낭패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리던 모습이 겹쳐졌다. 일요일 오후 지치고 허기져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바릿대 같이 생긴 검은 도기 그릇에 물과 밥을 가득 담아 김치와 함께 우걱우억 먹어댔다. 갈증과 허기가 동시에 풀리는 순간이었다. 창문으로 앞집 뜰에 활짝 핀 연분홍 벚꽃이 내려다 보였다. 행복한 일요일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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