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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문제 큰 사건 4

운영자 2010.07.28 16:03:15
조회 294 추천 0 댓글 0

  정식재판을 하는 법정에는 검사 직무대리가 작성해 보낸 이런 내용의 공소장이 도착해 있었다.


  ‘피고인 김정미는 주차문제로 시비가 되어 들고 있던 우산으로 피해자를 때리고 머리채를 잡아 흔든 후 손가락을 물어 치료일수 미상의 상해를 입힌 것이다.’

  검찰은 단 한 번의 확인도 없이 오광미의 일방적 말만 그대로 받아들인 셈이 됐다. 검찰이나 법원의 업무처리 관행에 도전한 투사에게 던져지는 올가미가 대개 그랬다. 본질은 이미 증발해 버렸다. 혹 떼려다 혹을 붙이는 게 정식재판청구에서 흔히 보는 결과였다. 그래서 변호사인 나는 웬만해서는 정식재판청구를 말린다.  

  “정식재판을 청구하신 이유가 뭐죠?”

  앳되어 보이는 여자 단독판사가 사무적으로 물었다.  


  “한 여자의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주민들이 괴로움을 당해 왔습니다. 그걸 얘기하려고..”

  “그게 아니라 정식재판을 청구하신 이유가 뭐냐는 거죠.”

   판사가 말을 끊으면서 어조를 높혔다. 선배부인은 순간 당황하는 얼굴이었다. 여판사가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머리채를 잡아 흔들지 않았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우산으로도 안 때렸다 이거죠?”

  “그렇습니다.”


  “그게 정식재판을 청구한 이유군요”

  판사는 다시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손가락으로 문 건요?”


  판사가 다시 확인했다.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더 볼 필요도 없네요. 그 자체로 이미 상해죄가 되고 벌금을 내기에 충분한데 왜 정식재판을 청구했죠?”

  여판사는 이미 다 끝났다는 얼굴이었다.


  “오광미가 저를 공격하는 바람에 깨물었어요.”


  “정당방위라 이건가요?”

  여판사가 물었다. 선배부인은 법률용어가 주는 이질감에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판사가 검사를 보고 말했다.


  “피고인이 범죄사실을 부인하는데 검찰 입증하시죠.”

  “피해자 오광미를 증인으로 신청하겠습니다.”


  가해자 오광미가 피해자로 둔갑해 있었다. 또 선배부인은 피고인인데 오광미는 증인의 자격이 됐다. 정식재판을 청구해서 더 억울한 위치가 되어버렸다.
 
  검은색 고급 빌로드 옷차림으로 오광미가 증언석에 올라와 앉았다. 신경을 쓴 엷은 화장이었다. 삼십대 쯤 되어 보이는 검사가 동정적인 어조로 그녀를 유도했다.


  “저기 서있는 피고인으로 인해 피해를 입으셨죠?”

  검사는 선배부인을 가리켰다.


  “그렇습니다.”

  오광미가 슬픈 모습으로 대답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 때문에 다투시게 된 건가요?”

  “저 여자가 아무 이유도 없이 제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랬나요? 구체적인 것은 경찰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지요?”

  검사가 동정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끌었다.


  “그렇습니다.”

  오광미가 얌전한 태도로 대답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검사가 신문을 마쳤다. 검찰은 그들의 결정에 불복하고 정식재판청구를 한 선배부인을 유죄로 만들기 위해 철저히 오광미 편이 되어 버렸다. 정식재판은 억울함을 풀어주는 제도가 아니라 까불면 혼내주는 제도인지도 모른다. 이어서 젊은 단독판사가 증인으로 나온 오광미를 보고 물었다.


  “그사이 주민들이 진정서를 여러 장 보냈던데 모두 오광미씨에게 좋지 않은 내용들이예요. 주민들과 사이가 나쁜가요?”

  “주민들이 저만 따돌렸어요. 그런 분위기가 싫어서 저도 사람들을 피했습니다.”


  “주민들이 왕따를 시켰다 이거죠?”

  여판사는 오광미를 동정하는 표정이었다. 오랜 시간 여러 재판을 보면서 종종 이런 모습을 봤다. 판사는 눈앞에 보이는 슬픈 표정을 하는 범인은 동정하고 보이지 않는 피해자들에게는 솔직히 관심이 없었다. 판사는 호소하는 주민들 편이 아니었다. 오광미가 왕따를 당했다고 동정하는 표정이었다. 


  “여기 조서를 보면 증인 오광미씨는 벤츠가 세 대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어요?”

  여판사의 표정에는 원인모를 호기심이 깃들여 있었다.


  “그래요. 그걸 주차장에 세워뒀었는데 누가 백밀러에 스크레치를 내놨어요. 그걸 살피다가 시비가 벌어졌습니다.”

  “살고 있는 빌라가 몇 평인가요?”
 

  여판사가 물었다. 외제차들을 댈 정도면 부자 동네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63평입니다.”

  “그런 집 비싸죠?”

  “비쌉니다.”


  “다른 집들도 다 그렇게 비싼 넓은 집인가요?”

  “대충 비슷합니다.”


  순간 젊은 여판사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스쳤다. 썩은 부자싸움에 내가 왜 끼어들어 뒤처리해야 하느냐는 그런 느낌 같았다. 사건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변호사인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사건은 사소한 다툼 같지만 공동주택이면 전국 어디서나 나타나는 중요한 큰 문제입니다. 잘살고 못살고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하는 삶에서 나타난 극단의 이기주의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정식재판을 청구한 이유는 바로 그런 사건이면의 생활관계를 한번 봐달라는 겁니다.”


   젊은 단독판사의 얼굴은 공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판사들 중에는 법적요건 이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현실을 보고 법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박힌 법원칙에 현실을 끼워 맞췄다. 천정을 보면 바닥이 안보이기 마련이다. 법적관점은 곧 법의 맹점이었다. 


  “증인을 신청 하시죠.”

  여판사가 마지못해 말했다.


  “주민들 모두 오랫동안 고통 받은 걸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 중 두 명 정도만 신청했으면 합니다.” 

  내가 말했다.


  “안돼요. 한 명만 하세요.”

  여판사가 차가운 어조로 잘랐다. 그나마 현실재판에서는 고마운 경우였다. 내가 신참변호사였으면 얼음장 같이 차게 거절당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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