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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을병씨의 죽음 9

운영자 2010.08.10 10:13:49
조회 350 추천 0 댓글 0

  그 이후 그와 친구처럼 가까워 졌다. 한 달에 한 두 번씩 광화문 뒷골목 그의 단골식당에서 밥을 먹고 그 앞의 오래된 찻집에서 문학과 철학에 많은 얘기를 나누곤 했다. 그는 내게 여러 가지 책을 선물했다. ‘내안의 나’,‘윤회의 비밀’같은 영성과 명상에 관한 것들이 많았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보관해온 습작노트도 프린트를 해서 가져다주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갈 때면 광화문 지하도로 내려가 행상한테서 복제한 싸구려 DVD를 사가곤 했다. 그는 내게 ‘천국’이라는 DVD를 선물했다. 자기는 열 번 이상 봤다고 했다. 단순히 본 게 아니라 그 영화의 구성이 소설을 쓸 때 참고할 만한 것이라고 내게 가르쳐 주었다. 얼마 안 되는 밥값은 주로 내가 내는 편이었다. 내고 싶어 하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역력했다. 그러나 돈이 없는 것 같았다. 이따금씩 몇 천 원하는 커피 값이라도 그가 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본 사법부와 감옥에 대해서 특히 관심이 많았다.  

 “재판을 받으면서 오랫동안 관찰해 보니까 판사들이 무죄판결을 쓰고 싶어도 문장실력이 안 되서 그냥 집행유예 같은 유죄판결로 결론을 내리는 걸 발견했어요. 유죄판결이면 그냥 양식화된 판결서에 도장만 찍으면 되는 것 같은데 무죄를 선고하려면 왜 그런지를 문장으로 자세히 쓰게 되어 있거든. 문학적 실력이 없으니까 그게 귀찮고 곤혹스러운 거지. 거기에 무죄판결문에는 판사의 철학이 들어가야 하니까 말이요. 대법원판례만 달달 외우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는 말이요? 그래서 일제시대는 법과가 아니라 법문학부라고 해서 판사가 될 사람에게 먼저 책을 읽히고 문학을 겸해서 가르쳤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단 말이요. 나는 판사들이 문장공부를 하지 않아서 무죄판결이 덜 나온다고 생각해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는 법률가들의 취약한 점을 정확히 보고 있었다. 그는 낙인찍힌 외로움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름을 날릴 때는 얼굴이 명함이었죠. 누구를 만나려고 해도 이름만 대면 통했어요. 수많은 작가지망생이 몰려오고 강연요청이 쇄도했지. 그런데 횡령범이란 낙인이 찍히니까 난 문둥이가 되어 버렸어요. 엄변호사 영화 ‘벤허’를 봤죠? 거기 보면 문둥이가 된 엄마와 딸이 로마 교외의 굴속에서 따로 사는 걸 그 아들이 찾아가는 장면 있죠? 눈물이 왈칵 흐르게 비참한 장면인데 문학계에서 나는 바로 그런 문둥이가 되어 버린 거지. 엄변호사가 나를 안다고 하면 어떤 문학인도 싫어할걸?”  

  그의 자조 섞인 말이었다.  그가 계속했다.
 

 “감옥에서 나오니까 이제는 민사소송이 걸려있습디다. 그동안 통장으로 받았던 돈을 전부 배상하라는 거요. 사실 내 원고료나 저작료도 다 돌려받지 못했는데 말이죠. 횡령한 직원들이 의도적으로 국고보조금을 내게 보내 코를 꿰어 버리고 정작 보관하고 있던 내 돈은 먹어 버린 것 같아요. 아무튼 이번에 40년 살던 집까지 내 놨어요. 활동비로 썼던 돈을 물어주려구.”

  누구에게나 불행은 항상 세 박자로 오는 것 같았다.


 “그 집은 보통 인연이 아니신 것 같던데요?”

  내가 그의 글에서 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물었다.


 “평생 나와 함께 늙어온 집이죠.  70년대 부동산투기로 한번만 이사해도 돈을 벌던 그때도 난 이사한번 하지 않았어요. 내 주민등록등본을 한번 보세요. 평생 이사한 적이 있는지? 내가 정원에 심은 묘목들이 같이 늙어서 우람한 고목이 되어 버렸죠.”

  그의 말 속에는 아쉬움이 짙게 묻어 있었다. 명예에 이어 그는 전 재산인 집을 날린 것이다. 다시 그 집을 사기에 그는 이미 너무 늙어 있었다. 그날도 낮에 만나 오랫동안 얘기하다 보니 서서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어디 근처의 식당에 가서 밥을 같이 먹죠?”

  내가 제안했다.


 “도를 닦는 사람이 저녁은 무슨 저녁? 난 여태까지 하루에 한 끼 먹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애쓴다니까요.”

  그가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어스름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은 항상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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