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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도(地獄圖) 1

운영자 2010.08.17 10:20:25
조회 520 추천 0 댓글 0

    인생에서 어떤 게 가장 잘사는 방법일까. 남을 의식하지 않고 혼자 즐기는 일을 찾는 것이다. 그러다 결론을 낸 것이 ‘천 권의 책과 천 편의 영화’였다. 향기 나는 좋은 책 천 권쯤 읽고 아름다운 영화를 삽화처럼 즐기면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안경알을 갈면서 스피노자는 철학책을 봤다. 어떤 위치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몇 해 전 여름 밤 나는 일본의 노숙자들이 밤을 지새우는 다리 밑을 가봤었다. 신문지를 깔고 그들은 대부분 말이 없이 누워있었다. 몇 명은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또 캐나다 토론토의 이른 새벽길을 걸을 때였다. 길모퉁이의 슬리핑백 속에서 노숙자가 자고 있었다. 그 옆 길바닥에는 지난 저녁 가로등 아래서 봤을 것 같은 두툼한 문고판 책이 놓여있었다. 거지와 도인(道人)의 차이는 아마도 그 책에 있지 않을까. 아마도 그 책들 속에는 좋은 집에서 편히 자는 사람은 가지지 못할 깊은 행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책이 나를 성장시켰다. 초등학교 3학년시절 회사원이었던 아버지가 월부로 사다준 세계명작전집을 읽고 또 읽었다. 동네 만화방에서 빌려주는 암굴왕, 삼총사 등 눈에 보이는 읽을거리는 탐식하는 짐승처럼 읽어 치웠다. 아버지는 월부로 사들인 세계문학전집과 한국문학전집들을 보물단지 같이 여겼다. 

    중학시절 그 책들은 나의 친구였다. 장용학의 ‘원형의 전설’속에 나오는 눈 덮인 산속의 동굴을 보면 불기 없는 나의 추운 방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쟁 문학속의 굶주림을 보면 앞에 놓인 어떤 조악한 음식이라도 감사 그 자체였다. 대학시절 나는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깊은 산속 암자에서 몇 년을 보냈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사간 책들을 촛불 아래서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책만 많다면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죽은 선비가 염라대왕 앞에 가서 소원을 아뢴 얘기가 있었다. 선비는 초당을 하나 짓고 거기서 만권의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걸 들은 염라대왕은 그게 가능하면 자기가 먼저 할 것이라면서 그런 복은 삼대에 걸쳐 덕을 쌓아도 얻기 힘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복을 받았다. 변호사자격증은 그런 권리를 얼마간 제공했다. 보고 싶은 책들로 벽을 쌓았다. 한 권 한 권 번호를 먹여가며 정독을 했다. ‘쿼바디스’를 읽고 사십이 넘은 나이에도 울었다. ‘25시’를 읽고도 울었다. 캬라마죠프가의 형제에 나오는 조시마 장로에게서 주님을 봤다. 톨스토이의 책에서 천사가 굶주린 거지로 변장하고 나타나는 걸 알았다. 그런 천사를 놓치면 기회가 다시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괴테의 파우스트나 단테의 신곡같이 이해가 가지 않는 책들이 있었다. 그런 책은 매일 새벽 한두 장씩 쪼개어 읽었다. 일과 수입은 그런 생활을 뒷받침할 정도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카알라일은 돈에 대해 속인의 속박을 면할 정도로만 벌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의사출신의 작가 크로닌의 책들은 나의 제2의 인생을 글쟁이로 바꾸는데 기여했다. 처방전 단어밖에 모르던 크로닌이 40에 작가로 변한걸 보고 나도 따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글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알려준 단편소설이 있다. 일본작가 아쿠다카와 류노스케가 쓴 ‘지옥변’은 섬뜩하게 나의 영혼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걸 소개해 달라고 청탁을 받았다. 그 내용은 대강 이렇다. 일본의 봉건시대 절대 권력을 가진 성주가 있었다. 그리고 당대 역시 최고로 알려진 고집불통의 화공이 있었다. 그 화공에 대해서는 악평이 들끓었다. 그는 오만하며 세상의 습관이나 관례는 모두 무시하는 괴벽을 가지고 있었다. 화공이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고 또 그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 화공은 성주에게 시녀로 들어간 딸을 끔찍이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의 붓놀림이나 색채는 다른 화공들과 달랐다. 그는 아름다운 것 보다는 시체나 병자, 늙은이 같은 대상을 많이 그렸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보면 귀신이 탄식하는 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시체 썩는 냄새가 난다고도 했다. 그런 화공을 보면서 한번은 성주가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어쨌든 추한 것을 좋아하는구나.”


    “얼치기들은 추한 것의 아름다움을 알 턱이 없사옵니다.”


    화공의 대답이었다. 성주 앞에서 감히 할 수 없는 무례한 말이었다. 그 얼마 후 성주는 화공에게 지옥의 장면을 그린 병풍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예술적 자부심을 가진 화공의 몰두는 대단했다. 그는 경험을 해보고 가슴으로 느껴야 붓을 드는 사람이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눈을 감아버릴 거리의 끔찍한 시체 앞에 유유히 앉아서 썩어 문드러진 얼굴과 손발을 머리칼 하나까지 똑같이 그렸다. 지옥을 연상할 대상이 없을 때는 그런 장면을 만들기도 했다. 제자를 방에 들어오게 해서 쇠사슬로 몸을 묶게 했다. 그 다음 그는 숨겨둔 뱀을 움직이지 못하는 제자에게 달려들게 했다. 공포에 질린 눈을 보는 순간 그는 붓을 들어 첫 획을 긋기도 했다. 미치광이 같은 음산한 몰두였다. 그렇게 그림이 80퍼센트 정도 완성됐을 때였다. 화공은 침울해져 있었고 때때로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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