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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문제 큰 사건 6

운영자 2010.07.29 12:00:58
조회 325 추천 0 댓글 0

   인사이동이 있었다. 판사가 바뀌었다. 검사도 바뀌었다. 사건만 그대로였다. 이럴 때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재판은 논리 같지만 사실 느낌의 축적이 많다. 증인의 진실성판단도 사실은 감각작용이다. 전임판사가 남긴 산더미 같은 기록 속에서 건조한 내용의 메모 한 장이 남은 전부였다.

   신임 재판장은 30대 초반의 하얀 얼굴을 가진 수재형의 여자 단독판사였다. 살인적인 입시경쟁을 거쳐 대학을 다니고 사법시험을 거쳐 판사로 임용됐을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나는 선배부인에게 질문형식으로 몇 가지를 다시 묻기 시작했다. 사건의 본질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오랫동안 공동주택의 주민들이 고통을 받아온 걸 말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서신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어서 몇 가지를 묻던 중이었다. 


   “잠깐만요.”

   새로 나온 젊은 검사가 내 말을 뚝 끊고 소리쳤다.
    

   “이 사건은 서로 싸운 단순한 사건입니다. 관계없는 것은 묻지 마세요.”

젊은 검사는 아예 판사역할까지 겸하고 있었다. 판사에게 이의를 신청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변호사는 변호사의 시각이 있고 검사는 검사의 시각이 있다. 관계가 있고 없고는 각자가 판단할 사항이었다. 나는 검사에게 조용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변호권을 행사하는 시간 아닙니까? 왜 방해하십니까? 재판장에게 먼저 허락을 얻어야 하는 게 법원칙 아닌가요? 왜 그러시죠?”

   “-------” 


   순간 젊은 검사는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가진 권력에 사람들이 숨죽이는 걸 버릇같이 보아온 그로서는 갑자기 원칙을 따지니까 이상한 것이다.


   “잠깐만요, 변호인.”

   이번에는 바뀐 여자 단독판사가 나섰다.


   “공동주택 내에서 생긴 이런 이상한 일들을 이 사건에서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요?”

   검사와 마찬가지의 생각인 것 같았다. 공식같이 법을 배워온 그들이 가지는 공통된 감정이 틀림없었다. 사법연수원에서 50십명이 똑같이 제품 같은 결론이 나와야 하는 교육이었다.


   단독판사의 얼굴에는 사건은 많은데 짜증스럽다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건 질문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좁은 시야를 가진 오만한 수재들의 모습이었다.


   “재판장께서는 변호사가 하는 신문 중에 적절치 않은 게 있으면 그걸 제한할 소송지휘권이 있지 않나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게 있으면 권한을 행사하시죠. 그러면 그 질문사항은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너무나 당연한 법원칙을 말했다.


   “그렇군요.”

   단독판사가 순간 멈칫했다. 재판장이 법적절차를 어겨도 아무도 이의를 하지 못했다. 괘씸죄로 결과에 영향을 미칠까 모두 겁을 먹기 때문이다. 여판사의 눈에서 자존심을 상한 은은한 분노가 피어올랐다. 신문을 모두 끝냈다. 판사는 하나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결론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등뼈같이 여기는 공식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변론하시죠.”

   단독판사가 기계적으로 말했다. 따뜻하기를 기대했던 모든 과정마저 얼어붙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우리사회에 나타난 극심한 이기주의란 병이 공동체의 생활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사소한 주차시비가 살인사건이 되기도 하는 현실입니다. 이 사건 역시 겉으로는 작지만 본질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지만 인정받지 못할 걸 압니다.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 관여하고 싶지 않다면서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 또한 극단의 이기주의입니다. 그런 증인을 구인해 주는 법정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건 또 다른 관료적 편의주의였다. 내가 계속했다.


   “이 자리에 스스로 선 김정미씨는 바른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폭행을 당했습니다. 본질을 말하기 위해 정식재판청구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본의 아니게 검찰과 법원에 대항하는 투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원칙을 지키려면 투사가 되어야 하고 그 희생이 너무 큰 게 현실입니다. 지금 변호인이 요구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판결문에 단 한 줄이라도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판사의 판단을 써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여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율법이 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자신의 마음을 담는 판사들이 생기고 있었다. 


   판결의 선고가 있었다. 젊은 여판사는 우리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웅얼거리듯 이렇게 말했다. 

   “이 사건의 경위와 피해자가 입은 상해의 정도에 비추어 볼 때 정당방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피고인 및 변호인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말 메마른 법정이었다. 그건 판결문집에 나와 있는 전형적인 예문이었다.


   “다음 사람.”

   판사는 그렇게 우리를 쫓아냈다.


   “이제 법의 현실을 아시겠습니까?”

   법정을 나온 내가 선배부인에게 말했다. 법조인으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었다. 


   “아니에요, 나름대로 많은 깨달음을 얻었어요.”

   선배부인의 마지막 말이었다. 미국의 대법관 홈즈의 말이 떠올랐다. 법은 논리가 아니라 경험이고 천재의 영역이 아니라 어른의 영역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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