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나 다녀올게!"
"놓고가는 거 없죠? 정말, 아침이라도 먹고 가지..."
이른 아침의 아파트는 부산스럽다. 초코바의 포장을 까며 나갈 준비를 하는 선생과, 그런 남편의 넥타이를 고쳐주는 하나코의 분주한 움직임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회의인데 어쩌겠어. 서류는 가방에 다 정리해놨고, 사무실 PC에도 백업본이 있어서 괜찮아. 그럼, 이제 진짜로..."
"아, 가기 전에요."
"응?"
하나코는 말 대신, 선생의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살짝 눈을 감았다. 고개를 들어올린 그녀는, 입술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 오늘은 일찍 들어올게."
"네..."
잠깐의 침묵이 끝나고 겹쳐진 입술을 뗀 선생은, 서류 가방을 고쳐잡고 현관을 나섰다.
"이제~, 울지 말아요... 지금~, 그대를 찾고 있는..."
남편의 출근 후, 하나코는 부엌에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곧 일어날 아이의 아침을 차려주기 위해, 그녀는 된장국을 데우는 중이었다.
"국은 이 정도면 될 것 같고, 반찬이... 어라?"
아침상에 놓을 찬거리를 꺼내던 중, 하나코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싱크대 옆에 놓여있는, 하늘빛 보자기에 싸인 도시락이었다.
"이건... 어머!"
하나코는 그제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남편에게 도시락을 건네주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어쩌죠... 아침도 제대로 안 먹고 가서, 도시락이 없으면 곤란할텐데..."
그렇다고 무작정 남편의 일터로 찾아가는 것도, 예의는 아닐 터였다. 무엇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지, 하나코가 고민하고 있을 때.
"후아암... 엄마, 왜 그래?"
"어라? 우리 딸, 벌써 깼어요?"
부엌 뒤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선생과 하나코의 딸이 눈을 비비며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하나코의 목소리를 듣고 일어난 소녀였지만, 잠이 덜 깼는지 눈은 반쯤 감긴 채였다.
"시끄러워서 깼나요? 미안해요, 들어가서 좀 더 자는 게..."
"우웅, 괜찮아. 세수하고 올게에..."
세면대에서 얼굴에 대충 물칠을 한 소녀는, 늘 그렇듯이 식탁에 앉아 밥그릇과 젓가락을 들었다. 기계적으로 밥을 입 안에 밀어넣는 소녀는, 입 안의 밥알의 개수를 세며 열심히 턱을 움직였다.
"움뇸뇸... 응? 근데 그건 뭐야?"
잠이 조금 깬 탓일까, 소녀는 맞은편에 앉은 하나코의 손에 들린 도시락을 발견했다. 소녀는 흥미가 동한듯, 도시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 이거요? 아빠한테 주려던 건데, 깜빡해서요. 어떡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응? 그럼 당연히 갖다드려야 되는 거 아냐?"
"그렇긴 하지만요, 역시 일터에 함부로 가는 건 실례니까..."
망설이는 하나코와 달리, 소녀의 눈빛은 이미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아빠의 직장에 놀러갈 수 있다는 것이, 소녀를 흥분되게 만들었다.
"그러지 말고, 한 번 가보자! 아빠가 무슨 일 하는지 보고 싶어!"
"유치원에 늦을 거라고요?"
"샬레랑 유치원 가까우니까 괜찮아!"
아무래도 소녀의 고집은 쉬이 꺾이지 않을 모양이었다. 누굴 닮아 애가 이런 성격이 되었나 하나코는 생각했지만, 결국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고 순응하기로 했다.
"하아... 그럼 좋아요, 아빠도 우리 딸 얼굴 보면 힘이 날 테니까. 대신 도시락만 전해주고 바로 유치원으로 가는 거예요?"
"응! 셋쨩도 데려가도 돼?"
"그럼요. 어서 아침 먹고 준비해요."
아까까지의 무기력함은 온데간데없이, 소녀는 즐겁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등원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니, 하나코도 조금은 기대가 되었다.
"과연, 그이는 어떤 표정을 지어줄지... 재밌겠는데요? 후후..."
베란다의 창 너머로 보이는 총학생회 건물을 보며, 하나코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엄마! 준비 다 됐어!"
[퓨퓨이!]
"네, 엄마도 금방 나가요!"
원복으로 말끔히 갈아입은 소녀는, 그녀의 애완 로봇 셋쨩과 함께 엄마를 불렀다. 안방에서 머리를 빗던 하나코는, 화장대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짜잔~, 어때요? 아빠한테 부끄럽지 않겠죠?"
"우와... 응! 엄청 예뻐!"
소녀의 칭찬은 빈말이 아니었다. 수수한 카키색 스웨터를 입은 하나코였지만, 원숙함이 느껴지는 그녀의 미모는 스웨터 따위로 감춰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까 콜택시를 불렀으니까, 곧 도착할 거예요. 어서 내려가죠."
"응! 셋쨩, 가자!"
[퓨이!]
현관에 나가 신발을 갈아신은 모녀는, 무거운 철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조금 이른 아침의 시원한 공기가, 두 사람의 폐부를 상쾌하게 채워주었다.
"셋쨩, 아빠는 샬레에서 무슨 일을 할까? 슈퍼 특공대처럼 키보토스를 지킬 작전을 세우고 있을지도 몰라!"
[퓨우?]
소녀는 그녀의 친구이자 애완동물인 셋쨩에게 자랑하듯 말했지만, 셋쨩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합리성을 바탕으로 프로그래밍된 로봇에게, 소녀의 말은 딱히 가능성이 없는 추론이기 때문이다.
"자자, 빨리 안 타면 놓고갈 거예요?"
"아앗! 잠깐 기다려줘!"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하나코는 먼저 올라타 열림 버튼을 눌러주었다. 엄마의 장난에 화들짝 놀란 소녀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총총 뛰어들어왔다.
"에헤헤... 안 늦었다."
"그럼 가볼까요? 렛츠 고!"
"고, 고!"
[퓨잇!]
1층 버튼을 누른 후, 하나코는 소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어린아이의 높은 체온이, 손을 타고 가슴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한편, 샬레의 사무실에선 회의 준비가 한창이었다. 자리에 앉아 기지개를 켠 선생은, 컴퓨터에 저장된 문서들을 확인 중이었다.
"보자~. D.U 내 지하철 관련이랑, 밀레니엄 엑스포 시찰, 그리고 아리우스 지원 관련..."
- 똑, 똑똑.
회의 안건을 다시 한 번 확인하던 선생은,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를 들었다. 총학생회 학생일 거라 생각한 그는, 벽 너머로 들릴만큼 적당히 큰 소리로 말했다.
"열려 있어~! 그냥 들어오면..."
"어머나~, 진짜네요? 후훗,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군요?"
"... 여보?"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선생이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생글생글 웃는 아내와 딸이 있었다.
"우와아, 넓다! 셋쨩, 여기가 우리 아빠 사무실이야!"
[퓨이퓨이!]
소녀는 가슴을 펴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사랑하는 아빠의 일터를, 친구인 애완 로봇에게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서프라이즈가 있는 편이 더 즐겁잖아요? 그리고..."
하나코는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아침에 선생이 놓고간 바로 그것이었다.
"아, 도시락? 고마워, 놓고간지도 몰랐네."
"오늘 아침도 제대로 안 먹었잖아요? 점심식사라도 든든히 먹었으면 하니까요."
하나코는 선생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도시락이 없었다면, 외식할 시간도 아까워서 휴게실의 컵라면을 끓여먹었겠지.
하나코는 그것이 싫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깎아가는 삶의 방식은, 지켜보는 사람을 아프게 하니까.
"우린 가족이잖아요? 그러니까... 조금 더 의지해줬으면 좋겠어요."
"어... 응, 고마워. 당신밖에 없네."
선생은 평소 학생을 대하듯, 하나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하나코는 눈을 내리깐 채,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 셋쨩, 엄마아빠는 왜 맨날 저러는 걸까?"
[퓨잇퓨퓨.]
그 모습을 의아해하는 소녀였지만, 이렇다할 답을 듣지는 못했다. 너무 어린 소녀에게는, 말해줘도 모를 테니까.
"그럼 엄마아빠, 나 먼저 갈게! 가자, 셋쨩!"
[퓨이!]
어느 새 유치원 등원 시간이 되었기에, 소녀는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평소같으면 집 앞에서 통원버스를 탔겠지만, 샬레는 소녀의 유치원 바로 앞에 있었기에 애완 로봇과 함께 걸어가기로 했다.
"길 건널 때 차 조심하고, 앞은 잘 보고 다녀야 해요!"
"네~! 다녀오겠습니다!"
손흔들며 딸을 배웅한 후, 하나코는 사무실 소파에 주저앉았다. 순백의 가죽 시트는, 그녀의 지친 몸을 받쳐주었다.
"후우... 저도 슬슬 돌아가볼까요. 청소도 해야 되고, 빨래도..."
"여보, 그 전에."
하나코의 옆에 앉은 선생은,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의 무릎을 두드렸다. 무슨 의미인지 잠시 고민하던 하나코는, 곧 그 사인을 이해하고 조금 당황했다.
"네? 자, 잠시만요! 곧 회의잖아요? 방해가 될 텐데..."
"까짓거 내가 린 쨩한테 혼나지 뭐. 어서 이리 와."
자상한 선생의 미소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키보토스에 없었다. 결국 하나코는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그러고보니, 당신에겐 무릎베개를 해준 적이 거의 없네. 조숙한 아이라고 생각했어서 그런 걸까?"
"그... 건... 으음..."
선생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하나코는 서서히 눈이 감겼다. 거기다 선생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까지 들리니, 졸음을 참기 어려웠다.
"가족이니까 의지해도 된댔지? 당신도 언제든, 나한테 의지해도 돼. 당신이 있어서... 나도 여기 있는 거니까."
"선... 생님..."
대답인지 잠꼬대인지 모를 말을 흘리며 눈을 감은 하나코를 확인한 후, 선생은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하나코가 자신 앞에서는 마음을 놓을 수 있기를, 자신이 언제나 그녀의 안식처가 될 수 있기를 바라왔던 선생이었기에. 어느 성자를 품어준 독사처럼, 그는 그저 그곳에 앉아있었다.
- 똑, 똑.
잠시 시간이 흐르고, 샬레의 사무실에는 다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노크 소리의 주인은 샬레의 문이 언제나 열려있음을 알기에, 그녀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선생님, 계십니까? 슬슬 회의 시간입니다만... 어머."
"아, 린 쨩. 좋은 아침."
선생은 총학생회 고문 나나가미 린에게 인사한 후, 자신의 검지를 입술 위에 가져다댔다. 하나코는 여전히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채였다.
"내가 도시락을 놓고 와서, 아내가 전해줬거든. 많이 피곤해하길래 잠시 눈 좀 붙이라고 했어."
"그랬나요. 그럼... 10분 뒤에 다시 들어와도 괜찮겠습니까?"
"5분이면 돼. 고마워, 린 쨩."
린은 선생에게 간단히 목례한 후, 복도로 나갔다. 아마 부부의 시간을 지켜주려는 그녀 나름의 배려이리라.
"여보, 여보? 슬슬 일어나야지."
"음... 어라? 저, 깜빡 잠들었나요...?"
서서히 눈을 뜬 하나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머리를 정리했다. 칠칠맞은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닐까 걱정하던 그때.
"여보."
"네?"
갑작스런 부름에 옆을 본 하나코에게, 선생은 입술을 포갰다. 가볍게, 그러나 뜨겁게.
"... 이제 잠이 좀 깼어?"
"... 후후훗. 네, 덕분에요."
서로를 보며 생긋 웃은 후, 두 사람은 사무실 문을 열었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린과 눈이 마주친 하나코는, 그녀에게도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럼 전 가볼게요. 당신도 린 씨도, 평안한 하루 되시길."
"감사합니다, 하나코 씨. 선생님? 어서 가시죠."
"그럴까? 당신도 조심해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하나코의 모습을, 선생은 말없이 지켜봤다. 1층에 도착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선생은 움직였다.
"늘 느끼지만, 단란해 보이셔서 다행이군요."
"린 쨩 덕분이지~. 내 일을 도와줘서 퇴근이 빨라졌으니까."
"누가 린 쨩입니까. 그것보다 서두르죠. 오늘은 안건이 꽤 많으니까요."
"그럴까? 후딱 처리하자고."
어깨를 스트레칭하는 선생은, 점점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가족의 온정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활력이니까.
*****
육아일기 시리즈는 이번에도 즐거우셨나요?
이번 화는 특히 선생과 하나코에 대해 좀더 다루고자 노력했습니다...만, 역량 부족으로 그게 잘 전달됐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시리즈는 이어집니다.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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