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가까이 지하철 을지로 3가역 5번 출구 앞을 지키던 터줏대감 ‘을지면옥’이 문을 닫았습니다. 을지면옥은 평양냉면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입니다. 이북의 맛을 그리워하는 어르신은 물론 ‘평냉족(평양냉면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였죠. 37년의 장사 세월을 뒤로 하고 2022년 6월 25일 영업을 일시종료했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재개발 때문입니다.
을지면옥 자리는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2구역입니다. 이 구역은 2017년 4월 사업시행인가를 받았고 2019년부터 보상 절차와 철거 등 재개발 절차를 추진해왔습니다. 을지면옥 측은 재개발에 동의하지 않고 분양신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자동으로 현금청산대상자가 됐습니다.
재개발 보상 협의가 차질을 빚자 서울시 지방토지수용위원회는 을지면옥 부지 및 영업권 손실 보상금을 약 56억원으로 책정했죠. 시행사는 2021년 8월 해당 금액을 공탁하고 소유권을 획득했습니다. 그럼에도 을지면옥 측은 건물 인도를 거부하고 영업을 이어갔습니다.
시행사는 결국 을지면옥을 상대로 건물 인도 소송을 제기했고 1심에서 승소했습니다. 그러나 을지면옥 측은 다시 항소했고 시행사 측은 본안 소송의 최종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을지면옥을 상대로 지난 1월 부동산 명도 단행 가처분을 신청했습니다.
당시 가처분 사건을 심리한 1심 재판부는 “가처분이 집행될 경우 을지면옥은 본안소송에서 다퉈볼 기회가 사라진다”며 시행사의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그러나 2심을 판결한 서울고법은 을지면옥에 건물을 인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렇게 을지면옥은 문을 닫고 임시 휴업 중입니다. 새로운 곳에서 다시 영업을 재개할 예정이지만 장소는 정해진 바 없다고 합니다.
을지면옥 외에도 서울에서 오래 영업을 해온 터줏대감 식당들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또 어떤 곳들이 무슨 이유로 장사를 접는지 알아봤습니다.
을지면옥 이전을 알리는 안내문. /조선DB
◇건물주와 갈등 겪다 결국 문 닫은 노가리 집
‘을지로 노가리 골목’. 1980년대부터 380원짜리 생맥주와 구운 노가리를 팔면서 유명해진 을지로의 골목입니다. 시원한 맥주와 저렴한 안주로 퇴근길 직장인의 발목을 잡는 곳이죠. 평일 저녁과 주말에는 늘 사람들로 꽉 차 있습니다. 이곳에서 42년 동안 을지로 노가리골목의 정체성을 만들고 함께해온 ‘을지OB베어’도 얼마 전 문을 닫았습니다. 이유는 건물주와의 갈등입니다.
을비OB베어가 들어선 건물의 건물주는 2018년 건물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싶다면서 을지OB베어 측에 계약 해지를 통보했습니다. 40년 넘게 장사해온 을지OB베어 측은 임대료 2배 인상도 감수하겠다며 영업만 계속하게 해달라했지만 소용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022년 1월 노가리골목의 또 다른 유명 맥줏집 ‘만선호프’ 사장이 을지OB베어 건물 지분 70%를 매입한 건물주라는 게 알려지면서 갈등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만선호프는 을지OB베어보다 늦게 개업했지만 노가리골목 일대에 10여개 지점을 보유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을지OB베어는 과거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만선호프가 7~8년 전에 이 골목에 들어와 거리 노포들을 하나씩 차지했다. 그런 와중에 우리 집이 눈엣가시였을 수 있다. 건물 임대료를 올려도 된다. 이제까지 지켜온 영업장을 그냥 하게 해줬으면 하는 게 바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선호프 측은 “화장실을 짓기 위해 을지오비베어 매장 안 작은 공간만 내달라고 했는데, 협상 과정에서 감정이 상했다. 우리가 더 많이 벌긴 하지만 을지오비베어 순수익도 좋고 장사가 잘되는데, 우리가 무조건 약자를 괴롭히는 것처럼 비쳐 억울하다”고 전했습니다.
결국 을지OB베어는 지난 4월 강제철거됐습니다.
철거 전 을지OB베어. /YTN유튜브 캡처
◇한국 첫 경양식당 코로나로 문 닫아
국내에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를 처음 소개한 경양식 식당 ‘서울역 그릴’. 1925년 10월 15일 영업을 시작해 96년 동안 장사를 했습니다. 개업 당시에는 비싼 호텔급 호화 식당이었습니다. 재력을 과시하거나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이 찾는 선망의 장소였죠. 서울의 성장을 함께해온 서울역 그릴은 2021년 11월 30일 문을 닫았습니다.
원인은 다름 아닌 코로나19 입니다. 한국전쟁, 외환위기 등 어려움을 이겨내며 장사를 이어왔지만 코로나 불황만큼은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서울역 그릴은 2021년 11월 30일 자로 영업을 종료한다고 공지했습니다. 폐업 전날 저녁엔 마지막으로 서울역 그릴의 맛을 추억하려는 손님들도 가게가 붐볐습니다.
당시 식당 관계자는 “코로나 사태로 고객이 급감해 영업 타격이 심했다. 폐업 이후 서울역 그릴이 위치한 곳은 리모델링을 거쳐 다른 매장이 입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서울역 그릴 외에도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중식당 ‘대성관’도 2022년 6월부터 영업을 중단했습니다. 대성관은 1946년 문을 열어 그 자리에서 3대째 영업을 이어오고 있는 노포입니다. 그러나 코로나 불황, 임대료, 물가 상승 등의 여파로 문을 닫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 서울 미근동 서대문경찰서 옆 골목 터줏대감 돼지갈빗집 ‘서대문원조통술집’도 영업을 종료했습니다. 1961년 11월부터 장사를 시작해 1997년 외환 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국도 이겨 내며 번창했죠. 그러나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면서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에 나온 대성관. /KBS다큐 유튜브 캡처
◇서울문화유산, 백년가게…이름뿐?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식당들은 대부분 서울시 유산으로 선정된 곳입니다. 대성관과 통술집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식당이었습니다. 서울미래유산은 서울의 근·현대 유산 가운데 미래 세대를 위해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무형 자산으로 서울시가 선정합니다.
을지오비베어는 서울시미래유산이면서 호프집 최초 중소벤처기업부 ‘백년가게’로 지정된 바 있습니다. 백년가게는 중소벤처기업부 선정 3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하면서, 오래도록 고객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식당입니다. 평가를 통해 우수성과 성장가능성을 입증한 식당을 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코로나 불황, 부동산 갈등 등으로 하나둘씩 없어져 가자 서울시와 중소기업벤처부의 제도들이 허울뿐 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 요식업 관계자는 “미래유산, 백년가게로 선정된 가게들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제대로 마련돼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무조건 세입자 측에서 양보하라는 말은 아니다. 건물주와 세입자의 관계는 서로 이해관계가 잘 맞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례가 을지오비베어인 셈이다. 다만 이런 갈등이 생겼을 때 가운데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할 필요성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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