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귀가 큰 재판장 1

운영자 2010.04.13 14:27:01
조회 432 추천 0 댓글 0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정리가 말하자 빽빽하게 의자에 앉아 있던 방청객들이 모두 일서서 법관출입문 쪽으로 시선을 향한다. 그 시선을 온몸으로 가득 느끼면서 법대 뒤쪽의 작은 문을 통해 S재판장이 들었고 이어서 배석판사들이 그 뒤를 따른다. 재판장이 이번에는 방청석에 대고 꾸뻑 고개를 숙인다. 마치 설교를 하러 강단에 올라서는 겸손한 목사의 모습과 같다. 그를 보면서 나는 이십년 전의 한 장면이 불쑥 떠올랐다. 종로 5가 뒷골목에 허름한 사층 건물 꼭대기에 무허가 사설학원이 있었다. 대학 2학년 겨울방학 때 나는 형법을 공부하기 위해 한 달 치 수강증을 끊었었다. S재판장은 당시 사법연수원생으로 있으면서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 강사로 나오고 있었다. 그에게서 나는 공모공동정범이론 등 형법의 총론을 한 달간 배운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원숙하고 노련한 50대의 재판장이 되어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이며 재판에 임하고 있다. 나는 40대의 변호사가 되어 그의 앞에서 변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앞으로 피고인 한 사람이 재판을 받으러 나왔다. 짱구형의 머리에 주름이 많은 50대의 남자였다. 남의 집에 들어가서 텔레비전과 그 밖의 가전제품을 들고 나오다가 걸려서 재판정에 서게 된 것이다.
 

  “저는 물건을 훔치러 들어간 게 아니라 술에 만취되어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된 겁니다. 친구의 집인 줄 알고 물을 먹으러 들어갔어요. 절대로 도둑질하러 들어간 게 아닙니다. 그 집 주인이 증명해 줄 거예요. 정말 억울합니다. 재판장님.”

  그는 절도 사실을 부인하면서 술에 취해 정신이 없었다고 강변했다. 재판정에서 절도범들의 항변을 보면 잘못을 직접 시인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이 술에 취해서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는 피해자가 나타날 것 같지 않은 눈치면 훔친 사실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어려서부터의 가난을 얘기하면서 배가 고파서 남의 물건을 가져가게 됐다는 신파조의 변명도 많이 눈에 뛴다. 대부분의 재판장들은 이골이 난 그런 변명에는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게 현실이다. 아흔아홉 사람에게 속으면 한 사람의 진실도 그에 파묻혀 버리는 것이다.


  “물을 먹으러 남의 집에 들어갔다면 물이나 먹고 나오지 그 집 안방에는 왜 들어갔오?”

  “저는 절대로 그 집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증거로 제출된 기록을 보면 그 집에서 피고인이 물건을 훔쳐갈 때 목격한 할머니나 물건의 주인이 모두 피고인이 물건들을 훔쳐가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그러면 그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말인가요?”
  “재판장님,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저를 보았다는 그 할머니를 증인으로 불러 주십시오. 저의 결백에 대해서 충분히 말해 줄 겁니다.”

  “좋아요. 그러면 그 할머니를 법정에 불러서 증언을 듣도록 하지요. 그러나 피고인, 될 수 있으면 불필요한 절차는 밟지 않도록 하는 게 좋아요. 증언을 하는 사람이 경찰이나 검찰에 가서 사실대로 말했는데 이중으로 곤혹을 당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S재판장은 그 절도범의 유죄를 이미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면서 그의 솔직한 참회를 바라는 게 엿보였다. 그러나 죄를 지은 그의 요구에 대해 한마디도 싫은 기색이나 의견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추천 비추천

0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시세차익 부러워 부동산 보는 눈 배우고 싶은 스타는? 운영자 24/05/27 - -
175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차우셰스쿠가 부러워한 북한 운영자 10.06.15 306 0
174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당원자격은 정상참작 사유 운영자 10.06.15 158 0
173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검사와 비슷한 변호인 운영자 10.06.15 154 0
172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요식행위인 재판제도 운영자 10.06.10 162 0
171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영장 없이 언제나 체포 [2] 운영자 10.06.10 205 0
170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처형방법에서도 독창성 주장 운영자 10.06.10 234 0
169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북한 형법교과서의 사형이론 운영자 10.06.10 241 0
168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법 위에 당, 그 위에 김일성 운영자 10.06.08 204 0
167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믿을 만한 통계 없어 운영자 10.06.08 155 0
166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보위부의 살인공작, 고문‧처형 운영자 10.06.08 316 0
165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정치범 사형은 국가보위부 재량 운영자 10.06.03 328 0
164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한 여교사의 신앙증언 운영자 10.06.03 340 1
163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군인도 공개처형 [1] 운영자 10.06.03 406 0
162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한국 노래 불렀다고 인민재판 운영자 10.06.03 199 0
161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경제범 공개처형 빈번 운영자 10.06.03 226 0
160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학생까지도 공개재판 대상 운영자 10.06.03 201 0
159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풍기문란자 공개처형은 전통 운영자 10.06.01 485 1
158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조총련 상공인 위해 여배우 처형 운영자 10.06.01 1300 1
157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즉결처형이 지금도 있는 나라 [1] 운영자 10.06.01 620 0
156 이혼 두번하면 벌금 5천 원 - 입양제도의 부활 운영자 10.05.27 130 0
155 이혼 두번하면 벌금 5천 원 - 당 간부들 대거 이혼하기도 운영자 10.05.27 223 0
154 이혼 두번하면 벌금 5천 원 - 가족법 제정의 의미 운영자 10.05.27 625 0
153 이혼 두번하면 벌금 5천 원 - 대동강변 李家村의 몰락 운영자 10.05.27 294 0
152 굳세어라, 보리 문둥이 운영자 10.05.25 254 0
151 미움받는 유태인 [1] 운영자 10.05.25 434 2
150 추억상속 운영자 10.05.25 232 0
149 리히텐 슈타인 왕국 운영자 10.05.20 289 0
148 감옥과 무덤 운영자 10.05.20 244 0
147 괴테 호텔, 단테 집 운영자 10.05.20 282 1
146 뺑소니 [1] 운영자 10.05.18 239 0
145 월부장사 [1] 운영자 10.05.18 274 0
144 간이 바뀐 친구 운영자 10.05.18 234 0
143 뚝방옆 전과자 교회 운영자 10.05.13 242 0
142 사진관 변호사 영감 운영자 10.05.13 283 0
141 엄마,합의합시다. 운영자 10.05.13 276 0
140 뜨거운 감자 운영자 10.05.11 249 0
139 변호사와 사기꾼 [1] 운영자 10.05.11 434 2
138 두 얼굴의 미인 [1] 운영자 10.05.11 469 2
137 앳된 판사와 심통난 늙은 피고 [1] 운영자 10.05.06 434 1
136 한심한 대리인 운영자 10.05.06 249 0
135 양자 빼 주세요 운영자 10.05.06 240 0
134 벙어리 증인 운영자 10.05.06 244 0
133 복대리(複代理) 운영자 10.05.06 281 0
132 약 좀 먹게 해줘요 운영자 10.05.06 243 0
131 임신한 여죄수 [1] 운영자 10.04.29 638 1
130 야! 가라 가! [1] 운영자 10.04.29 283 0
129 큰일낼 여자네 운영자 10.04.29 372 0
128 직접 실험해 보시죠 [1] 운영자 10.04.27 372 1
127 미녀와 법정 운영자 10.04.27 480 0
126 아마데우스 [1] 운영자 10.04.27 252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