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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가라 가!

운영자 2010.04.29 14:20:03
조회 282 추천 0 댓글 1

  일제시대부터 재판정 자리로 사용되어 오던 서소문의 서부지원 형사법정은 마치 시골 간이역의 3등 대합실을 연상케 한다. 노후한 건물에 채광이 안되어 낮에도 죄수의 잉크색 관복같이 법정은 우중충하다. 한쪽 벽에 놓여진 비닐커버를 씌운 변호사 대기석은 용수철이 주저앉은지 이미 오래다. 잠시 앉아 있어도 궁둥이가 배긴다. 누구하나 고쳐주기는 커녕 관심조차 갖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찌그러진 변호인 대기의자에 앉아 나의 재판차례를 기다리는 시간을 책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아직 이른듯 한데도 노안이 온다고 해서 돋보기를 쓰니까 답답하다. 돋보기 테 너머로 나무로 만든 벤치 같은 방청석에 사람들이 주눅이 들은채 앉아 있었고 뒷쪽 공간도 사람들이 만원버스 속처럼 발디딜틈 없이 들어차 있다. 이윽고 이마가 넓고 인물이 훤한 재판장이 배석판사를 데리고 들어와 법대에 앉았다. 오후 심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재판장이 사건번호를 호명했다.

  아직 어린티가 물씬나는 열서너살 또래의 남자아이들 네명이 손에 수갑을 차고 한복으로 된 죄수복을 입고 피고인석으로 굴비두름같이 묶인채 끌려 나왔다. 모두들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 방청석에서 그 아이들의 부모로 부터 나오는 듯한 커다란 한숨소리가 흘러 나왔다. 재판장이 그 사건의 증인 나오라고 불렀다.

  한 여자 아이가 방청석에 끼어 앉아 있다가 법대 앞에 있는 증인석으로 나가 섰다. 역시 열서너살쯤 되는 여자 아이였다. 꼬마들의 상구머리같이 머리를 바짝 쳐 올렸다. 뒷통수와 귀의 윗부분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꼭 쥐가 뜯어먹다 만 것 같았다. 블루진 쟘바와 청바지를 입고 허리는 두툼한 가죽 벨트를 매고 있었다. 얼굴에는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눈꼬리가 치켜올라가 보이도록 검은 눈화장을 하고 있었다. 조금 과장한다면 꽃잎이 나기도 전에 벌레가 먹은 장미같은 느낌이었다.

 “증인 말이요 강간을 당한 피해자로 법정에 나왔는데 피고인들 앞에서 말하기 곤란하면 피고인들 없는데서 말하게 하겠어요. 어떻게 할래요?”

 재판장이 증인의 입장을 고려해서 그 여자아이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앞에 사람들이 있어도 상관 없습니다. 그냥 얘기할께요---”

 그 여자아이는 의외로 당차게 얘기했다. 부모같은 수많은 방청객이 쳐다보는데도 눈한번 내리까는 일이 없이 당돌해 보였다. 검사의 신문이 시작되었다.

 “증인 말이야 내가 조사를 할 때 저 앞에 서있는 피고인들이 방에서 증인의 다리를 잡고 청바지를 내린 후에 강간을 했다고 말했었지? ”

 “아니예요 내가 좋아서 했어요.강간당하지 않았어요----”

 그 말을 듣자 검사의 얼굴이 붉그레해지기 시작했다.

 “증인 말이야 내 앞에서 그렇게 분명히 얘기했잖아? 내가 강제로 그렇게 말하라고 하든가? 아니면 때리기라도 하든가? 왜 갑자기 검사실에서 하던 얘기와 그렇게 달라지지?”

 “검찰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어요. 같이 즐긴 여자 친구아이가 그렇게 말을 맞추라고 해서 그랬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예요”

 “증인 그러면 경찰에서는 왜 강간당했다고 진술하면서 상세히 상황까지 설명을 했었나?”

 “순경이 너 강간당했지 하고 자꾸만 그쪽으로 요구해서 순경이 말해주는대로 그렇다고 대답해 줬어요.”

 “그러면 사실은 어떤가?”

 “저하고 친구 미자하고요. 저기 서있는 아이들과 한방에서 비디오도 보고 화투도 치다가 같이 자게 됐거든요.이불을 펴고 같이 자는데 남자 아이가 하자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좋아서 비디오에서 본 대로 둘하고 했어요---”

 “그러면 진작에 그렇다고 말하지 이제와서 그러나!”

  담당검사는 열네살짜리 여자아이의 교활성에 분이 치민듯 억양을 높여 화를 내고 신문을 마쳤다.

  방청석에서 나이어린 소년 피고인들의 부모로 온 사람중의 하나가 ‘담당 형사놈이 조작한 겁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그 광경을 지긋이 바라보던 재판장이 이윽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증인이 검찰에서 말한 것을 쓴 조서를 보면 앞에 있는 피고인들에게 윤간을 당했다고 아주 정확하게 상황이 기재되어 있어. 그렇게 일단 진술한게 맞나?”

 “네”

 “왜 그랬어?”

 “-----”

 “검사님이 때렸나?”

 “아니요.”

 “너 합의했다고 피고인들한테 억지로 유리하게 말해주는거 아니야? 강간 당한 적이 없는데 이렇게 만들었으면 너는 무고죄로 처벌을 받아야 하는거야 그리고 이자리에서 거짓말을 하면 위증죄가 되는 거고 어느게 맞니? 잘 말해!”

 “강간 당하지 않았어요. 정말 내가 좋아서 한거예요. 그런데 경찰에서 같이 저 아이들하고 한 미자가 자기가 강간당했다고 진술했으니 그렇게 말을 맞춰 조서를 꾸며 달라고 해서 그런거예요. 검찰에서도 마찬가지구요. 의리때문이예요...”

  아버지같은 재판장이 기가 막힌다는듯 한 표정이 역연했다.

 그 때 방청석에서 남자 아이들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이 ‘저년 때문에 다 이렇게 됐잖아!’하고 고함을 질렀다. 재판장이 그 쪽을 향해 눈을 째렸다.


 “지금 방청석에서 말한 사람 누구요? 누구냐 말이요? 내가 물어보고 있는데..”

 그 서슬에 질린 방청석이 곧 숙연해 졌다.

 “너 말이다 네가 그렇게 경찰에서 진술을 하지 않았으면 이 아이들이 풀려 났을거 아니냐. 그리고 검찰에서라도 사실대로 진술했으면 이렇게 재판받느라고 오랫동안 저 아이들이 구치소에 있지는 않았을 거 아니냐.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니? 학교 다니던 저 아이들 신세 망쳐준 거 아니니?”

 “---------”

 “여기 재판장석 앞까지 와서 이 서류를 한번 보거라. 강간당했다고 저 남자 아이들 처벌해 달라고 네가 손도장찍은 고소장인데 이거 정말 네가 찍은거니?”

  증인석에 있던 여자아이는 재판장 앞으로 가서 발돋움을 하고 고소장을 쳐다 보았다.

 “네.제가 손도장 찍은 고소장이예요.” 
 “왜 찍었니?”

 “친구가 그렇게 하면 나중에 합의금으로 돈을 받을수 있다고 그래서...” 
 재판장이 그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무 깜찍하게 까진 그 여자아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한 모양이었다.

 “너 아버지가 뭐하시니?”

 “--------”

 “아버지 어머니가 뭐하냐고 묻고 있잖니?”

 “아버지는 죽었구요 엄마는 노동해요”

 “너 조서에는 학생이라고 써 있는데 어느학교 다니니?”

 “학교 안다녀요”

 “그럼 왜 학생이라고 했어?”

 “중학교 일학년때 남자 아이들과 놀다가 학교선생님에게 걸려 짤렸어요.”

  자기에게 주어지는 시선이 무슨의미를 가지는지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그 여자아이는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또박또박 재판장의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을 했다. 수치심도 없었다. 잘못의 의미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재판장은 묵묵한 시선으로 그 여자아이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한마디 내뱉었다.

 “야 가라 가!”

 그 여자아이는 증인석을 빠져 나오며 혀를 살짝 내밀고 싱긋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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