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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대리(複代理)

운영자 2010.05.06 14:21:24
조회 280 추천 0 댓글 0

   어느 민사법정에서 본 일이다. 한참 동안이나 자기가 맡은 사건순서를 기다리던 머리가 희끗희끗한 변호사 한 사람이 차례가 되자 법대앞으로 다가섰다.

  “일만오천칠백사십 호 사건입니다.”

  “이 법정에는 그런 사건 번호가 없는데요. 번호를 다시 보시죠.”

  재판장이 익숙하게 사건 요약지를 뒤적이면서 그 변호사가 다시 사건 번호를 호명하기를 기다렸다.

  “사건 번호가 분명히 맞는데요.”

  변호사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 순간 재판장은 그 변호사가 실수로 법정을 잘못 찾아왔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우리 재판부에는 그런 번호가 없습니다.”

  법정을 잘못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어이없는 작은 실수로 엉뚱한 법정에서 시간을 낭비한 그 변호사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점잖고 치밀해 보이는 그 변호사의 얼굴에 순간 당혹한 빛이 흘렀다. 수많은 방청객과 변호사들의 시선을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당황한 그 변호사는 얼른 자신의 실수를 얼버무리고 그 자리를 모면하고 싶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 법정이 삼백사 호 법정 분명히 맞죠? 기록봉투에 그렇게 씌어 있는데.....”

  그는 기록 봉투를 쳐들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사무직원의 실수이지 자기의 실수는 아니라는, 자신은 그렇게 경소한 사람이 아니라는 변명을 하고 싶은 눈치였다. 순간 재판장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법정 안내원에게나 조용히 물을 사항을 어떻게 감히 재판장에게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짧은 순간 침묵이 흘렀다.

  “재판장 이름이 김 아무개 아닙니까?”

  떨떠름한 표정으로 재판장을 쳐다보면서 그 변호사가 말했다. 담당 재판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적어도 법정에서라면 최대의 존경과 경의를 받아온 재판장으로서는 최대의 모욕을 받았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김 아무개가 아닙니다.”

  재판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 변호사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보아하니 나이도 들어 보이는데 어찌 그리 눈치 없이 주책을 부리느냐는 채근이 재판장의 눈빛에 가득 들어 있었다. 그 순간 재판정은 진공상태가 되는 것 같았다. 그 변호사는 속으로는 어쩔줄을 모르면서도 망신 당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내가 복대리라서.....그렇지만 기록에는 분명히 이 법정으로 기재되어 있는데.....이것 참 별일이네요.”

  발버둥치면 칠수록 늪 속 깊이 빠져들어가듯이 그 변호사는 점차 곤혹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복대리는 민사재판에서 바쁜 변호사가 임시로 다른 변호사에게 법정에 대신 출두해 줄 것을 부탁하는 제도이다. 결국 그 말은, 내가 원래는 그렇게 경솔한 사람이 아닌데 다른 사람의 재판을 대신 맡다보니 그런 어이없는 실수를 하게 되었다는, 참으로 옹색한 변명이 되고 말았다.

  어색한 변명만 늘어놓다가 그 변호사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어기적어기적 법정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미 저질러버린 실수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법정을 잘못 찾아왔다, 미안해 됐다’고 솔직하게 실수를 시인했으면 금방 끝날 일을 가지고 그 변호사는 옹색한 변명을 늘어놓다 보니 더욱 우스꽝스러운 몰골이 되어버린 것이다. 실수한 것은 실수한 대로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 지혜라는 생각을 해 본다. 변변치 못한 체면 때문에 사소한 일을 변명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그리고 부끄러워 할 이유가 없는 일을 부끄러워 하다 보면 정말 부끄러 일을 부끄러운 줄 모르게 되기가 쉽다. 대수롭지 않은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정말 소중한 것을 소홀히 여기기 쉬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잘났든 못났든 자신의 모습 그대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자신을 자신 이상으로 보이기 위해 꾸며야 하는 거짓된 언행이다. 그것은 허영심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나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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